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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2 22:16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 2. 장로교 목사 되기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72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1772-1844)

출저: D. Newell Williams, "Stone, Barton Warren (1772-1844),"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번역: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역자 주: D. Newell William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

목차

1. 서론
1.1 성인 같은 성품
1.2 신학적 논객
1.3 부와 접대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2.2 교육
2.3 회심과 목회소명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3. 대부흥회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3.2 믿음에 대한 새 빛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의 이름
4.2 대속에 대한 새 빛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4.5 켄터키 주로 귀환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7. 스톤-캠벨운동과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후기 회상
8. 죽음과 장사
9.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스톤의 영향
참고목록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1722년 12월 24일, 메릴랜드 주 찰스 군(郡)의 군청 소재지였던 포트 토바코(Port Tobacco) 근처에서 출생한 스톤은 메릴랜드 주의 상류층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공직(公職)과 상당한 토지를 오랫동안 소유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증, 증, 증조할아버지, 캡틴 윌리엄 스톤(Captain William Stone, 1603-1695)은 메릴랜드 주의 첫 개신교인 주지사였다. 그의 둘째 사촌 토마스 스톤은 독립선언서의 서명자였고, 찰스 군(郡)에서 가장 큰 부동산들 가운데 하나를 소유하였다. 발톤 스톤의 아버지 존 스톤(John Stone)은 1775년에 사망하였고, 토지와 16명의 노예들을 소유하였으며, 자신을 중상류층으로 분류하였다.

1779년 스톤의 어머니 메리 워렌 스톤은 네 자녀와 적어도 12명의 노예들을 거느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경계를 따라 버지니아 주 서쪽에 위치한 피츠실베이니아(Pittsylvania) 군(郡)으로 이사하였다. 메리 스톤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어렸던 발톤 스톤은 이 때 만 여섯 살이었다. 스톤의 아버지는 그의 토지를 이미 혼인한 나이든 두 아들들에게 유언으로 증여하였으나 남편 사망 후에 메리는 합법적으로 포트 토바코에 있는 부동산의 삼분의 일을 소유하였다. 메리 스톤이 이사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부 농장주들의 많은 수가 18세기 후반 들어 경제사정의 개선을 희망하면서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2.2 교육

스톤은 그의 가족이 버지니아 주에 정착 후에 학교에 보내졌다. 1843년에 작성한 그의 자서전에서 스톤은 그의 첫 교사가 “폭군”이었으며, “모든 사소한 잘못에도 학생들을 매질하고 학대하였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고 전하였다. 스톤은 그 교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며칠 후에 그는 ”다른 기질“의 교사에게 보내졌다. 상류층에서는 ”의지를 꺾는“ 자녀양육철학에 동의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아이의 뜻을 존중하는 ”온화“하거나(moderate) ”우아한“(genteel) 방법을 주창하였다. 온화한 방법은 아이의 의지를 꺾으려 했고, 우아한 철학은 아이의 뜻이 자유롭게 표현되도록 허락하였다. 성인으로서 스톤은 온화한 접근을 주창하였고, 교사들이 가끔씩은 회초리를 사용하도록 권하였으며, 만약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면, 그들은 ”순종함으로 즐거워할 것이고, 또 그들에게 주어진 학과들을 배우지 못하는 일이 좀처럼 없을 것이다“는 점을 충고하였다. 스톤의 두 번째 교사는 로버트 소멀헤이즈(Robert W. Somerhays)였다. 스톤은 그를 ”영국인“으로 확인하였다. 스톤은 소멀헤이즈의 지도로 쉽게 배웠고, 읽기, 쓰기, 산수를 4-5년 공부한 후에 소멀헤이즈는 그를 ”더할 나위 없는 학자“(a finished scholar)로 선언하였다고 기억하였다.

스톤은 그가 “15-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세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분할을 요구하였다고 전하였다. 그는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이 할당된 후에 그의 “마음은 그것을 불릴 방법을 찾느라 밤낮으로 빠져들었다”고 회상하였다. 드디어 그는 자기 유산을 그가 법조계에 진출하여 경력을 쌓는데 필요한 소양교육에 투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같은 교육에는 과학 과목들, 고대 언어 과목들, 철학 과목들을 포함하였다. 1790년 1월 스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길포드(Guilford) 군에 소재한 데이비드 콜드웰(David Caldwell)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아카데미의 유일한 교사 콜드웰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버펄로(Buffalo)와 앨라만스(Alamance)에 소재한 장로교회들을 담임한 65세 된 목사였다. 교육과 목회를 결합한 기존의 장로교회의 방식을 따라서 콜드웰은 자신의 집에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스톤은 콜드웰 아카데미에서 3년간 공부하였고, 1793년에 그의 소양교육을 마쳤다.

2.3 회심과 목회소명

스톤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을 때, 학생들 사이에 “대단한 신앙의 흥분”이 있었다. 아마도 50명이 넘지 않았을 등록된 학생들 가운데 30명쯤 되는 수가 제임스 맥그레디(James McGready)의 목회 아래서 최근 “신앙을 받아들였다.” 맥그레디는 콜드웰로부터 문법학교 교육을 받았고, 1789년 봄 길포드 군(郡)에 목사로 임직하기 전에 장로교의 설교가들인 존 맥밀란(John McMillan)과 조셉 스미스(Joseph Smith)와 함께 서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공부하였다. 콜드웰 아카데미에서의 “깨우침”이 스톤의 기독교에로의 첫 노출은 아니었다. 스톤은 영국교회(성공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피츠실베이니아(Pittsylvania) 군(郡)으로 이사한 후에도 스톤의 가족은 영국교회(once-established church)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스톤은 또 독립전쟁 후 피츠실베이니아(Pittsylvania) 군(郡)에 복음을 전한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의 설교에도 노출되었다.

콜드웰 아카데미에서의 신앙의 흥분에 대한 스톤의 첫 반응은 그것을 무시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스톤은 주장하였다. 스톤은 그의 학업에서 신앙부흥운동을 주의가 산만한 것으로 보았다. 길포드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들어간 주요 비용은 가까운 민박집에 들어가는 비용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들 때문에, 가능하다면, 빠른 기간 내에 프로그램을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드웰 아카데미에서의 신앙의 흥분을 무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전하였다. 그는 초신자들이 수업시간(recitation) 전에 매일 아침 개인 방에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고서 “적지 아니 놀랐다.” 게다가 스톤은 초신자들의 “매일의 신앙생활”(daily walk)을 주시함으로써 “그들의 신실한 경건과 행복”을 보았다. 그 결과 스톤은 그의 룸메이트의 초청을 받아들여 맥그레디가 인도하는 설교집회에 참가하였다. 맥그레디의 설교는 행복추구에 초점이 맞춰졌다. 맥그레디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행복은 육체의 쾌락에서나 부와 명예의 소유를 통해서는 발견되어지지 않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칭송할만한 속성들“에 관한 지식과 즐거움 속에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었다. 스톤은 맥그레디의 설교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기억하였다. ”만일 내가 서있었다면, 필경 나는 감명을 받아 마룻바닥에 가라앉았을 것 같은 것이 나의 흥분이었다“고 그는 나중에 전하였다.

맥그레디의 설교 후에 스톤은 신앙을 추구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자신이 회심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맥그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안(容顔)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죄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회심시킨다고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안(容顔)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성자를 보내신 자의 영광이었다. 맥그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안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의 관찰은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래서 단지 죄의 처벌뿐 아니라, 죄의 악함에 대해서 탄식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같은 사랑과 그 같은 사랑이 만들어낸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의 결과로써, 죄인은 죄의 처벌로부터의 용서와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모두를 위해서 “기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려고” 하였다. 단지 죄의 처벌을 피하려는 바람에서가 아닌 이 의지의 변화,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가 회심이었다.

스톤은 피츠실베이니아(Pittsylvania) 군(郡)에서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에게 노출된 뒤로 그의 죄 사함과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기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전에 “길고 고통스런 투쟁”을 예상하였다. 회심추구의 고통은 구도자가 점증하는 죄의 권세를 깨닫는 것과 짝을 맞춰 구도자의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에서 잉태된 고뇌와 탄식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침례 교인들, 감리 교인들, 장로 교인들은 모두가 회심받기 전에 깨우친 죄인의 회심추구 즉 그들이 흔히 “고통”(distress)이라고 말한 기간이 전형적으로 몇 주에서부터 일 년까지 지속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드렸다. 스톤은 꽉 찬 일 년 동안 “구원하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때때로 낙심하고, 그것을 얻는 것을 거의 단념하기도 하면서 불확실성의 파도에 들까불렸다”고 회상하였다. 결국 그는 콜드웰이 섬기는 교회들의 하나인 앨라만스(Alamance)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어느 주일 저녁, 스톤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설교가인 윌리엄 핫지(William Hodge)가 회중에게 설교하였다. 스톤은 핫지의 본문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였다는 것과, 핫지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은 동작과 많은 눈물로 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였다. 스톤은 ”기술된 그 사랑스런 성품에 대한 사랑으로 내 마음은 훈훈하였고, 내 마음은 그 교리에 빨려들었으며, 내게는 그것이 새로운 것이었다.“고 할 만큼 깊은 영향을 받았다. 장로 교인들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훈훈해진“ 것을 발견하는 것과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에 대한 설교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회심의 표지(signs)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였다. 스톤은 그가 회심 받았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하였고, 또 동시에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의 희망을 억누르려하고 있었다고 전하였다.

핫지의 설교를 들은 후, 스톤은 성경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나는 희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여러 가지 느낌들을 가지고 읽고 기도하였다.”고 나중에 적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와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다”에 대한 본문들에 대한 스톤의 전거(典據)로부터 판단하자면, 핫지가 “상한 심령”이나 “가망 없는” 죄인을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초청함으로써 설교를 마쳤던 것으로 드러난다. 핫지의 설교들은 결코 출판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맥그레디의 설교들은 성서의 바로 이 구절들을 사용하여 “파멸했고 망쳤다”고 느낀 죄인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촉구하였다. 이 호소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가망이 없다고 느끼지만, 지금은 가망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 사함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기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에게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스톤은 성서를 읽고 있었고, 그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죄 사함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의지를 갖고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다. 스톤은 그가 듣기만 했던 메시지에 대한 그의 마음의 반응에서 그가 그의 답을 찾았다는 것을 전하였다. “내가 듣기만 했던 진리,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지배하였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나는 자발적인 주제에 그의 발 앞에 굴복하였고 가라앉았다.”

회심 후에 법조계에서 활동하려던 스톤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려는 소망으로 바꿨다. 그는 콜드웰에게 설교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알렸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렸다고 전하였다. 스톤은 침례교와 감리교 설교자들이 꿈과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장로교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콜드웰은 스톤이 설교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킬 기적을 기대할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오히려 콜드웰은 만약 “스톤이 설교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망이 있다면, 또 만약 그의 “선배 목회자들이”(fathers in the ministry) 그에게 용기를 준다면, 그가 주저 말고 안수를 받도록 힘써야 된다고 충고하였다.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1793년 봄 20살이 된 콜드웰 아카데미 졸업생은 오렌지 장로회(Orange Presbytery) 소속 목회후보자가 되었다. 목회후보자들을 받고 교육하고 시험하는 것은 장로회의 책임이었다. 장로회는 스톤과 다른 후보자들에게 “심사의 과정으로써” 신학분야에서 독특한 주제들을 연구하도록 배정하였다. 그들은 가을 장로회 모임에서 그 주제들에 관해서 심사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스톤과 이전 급우인 사무엘 홈즈(Samuel Holmes)에게 주어진 주제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포함되었다. 그들의 연구를 돕기 위해서 그들에게 17세기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비트시우스(Herman Witsius)의 책이 할당되었다. “단지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러고 나서 이 한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persons),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다는 것, 아버지는 태어나신 적이 없고(unbegotten), 아들은 영원히 태어나셨으며(begotten),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발출(發出)하신다(proceeding)는 것, 하나님 한분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 그러면서도 동등한 예배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비트시우스는 먼저 입증했을 것이다.”고 스톤은 회상하였다. 이전에 스톤은 우상숭배에 대한 두려움 없이 혹은 그것들에 따라서 동등한 예배에 대한 걱정 없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기도를 드렸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트시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그의 노력의 결과는 그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회심이후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이 곧 줄어들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은밀한 기도와 묵상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나의 하나님과 구세주께 다가가는 것은 지상에서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천상의 의식(儀式)은 저지되었다. 그리고 우울함과 두려움이 나의 고통스런 마음에 찼다.”고 스톤은 기록하였다. 홈즈가 비트시우스에 비슷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함에 따라서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비밀스런 어둠”에 말려들게 하고, 그들 헌신의 “열정을 식게”하려고 “의도되었다”고 믿으면서 스톤과 홈즈는 “그 책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초기 미주 공화국의 다른 시민들처럼, 스톤은 영국 계몽주의의 넓은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계몽주의는 우리의 명확하고 독특한 개념들과 “일치하지 않는” 곧 “이성에 상반된” 명제들을 확인하였다. 스톤에게는 동등한 예배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드려져야 한다는 비트시우스의 가르침에 내포된 하나님은 한분보다 더 많다는 개념은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명확하고 독특한 개념과 일치하지 않았다. 물론 비트시우스는 하나님은 한분보다 더 많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동등한 예배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드려져야 한다는 가르침에 내포된 하나님은 한분보다 더 많다는 개념을 반대하였다. 비트시우스가 성서이외의 것을 읽었던 최초의 신학서적이었다는 것을 주목한 스톤은 긴장 속에서 모순되는 것 같은 명제들을 유지함으로써 기독교 진리를 밝히는 신학하기방법에 익숙하지 않았다. 스톤에게는 비트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의 논술이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톤과 홈즈가 비트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의 논술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일한 노스캐롤라이나 주(州)의 장로 교인들은 아니었다. 헨리 파틸로(Henry Patillo)는 오렌지 장로회의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존경받는 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교리에 대한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대안적 논술을 선호하였고 상당히 퍼뜨렸다. 비록 지금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 “주 달려 죽은 십자가”와 같은 찬송들로 우선 기억되지만, 아이작 와츠(1674-1748)는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철학자와 신학자로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와츠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성서의 교리가 이성에 상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히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라든지, 세 인격이 한 인격이라”는 교리는 이성에 상반되었다. 그러나 와츠에 의하면, 성서는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서는 “동일한 참된 신성(Godhead, 神性)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속한다. 그리고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인격(persons)이라고 무리 없이 불려도 좋을, 세 독특한 대리인들(agents)이거나 행동의 원칙들(principles)이다.” 따라서 와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명제에 상반되지 않는다. 와츠에 따르면, 잘못은 계시된 교리의 ”견해들“과 인위적인 해설들을 교리 그 자체와 혼동하는 것이다. ”평이한 성서교리 그 자체와 그것의 독특한 해설 사이를 잘 구분하는“ 신학자는 ”몇 가지 해설의 인위적인 형태들이 공격을 받고 아마도 폐기되는 동안, 신성한 교리의 믿음을 확고히 동요 없이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와츠는 약속하였다.

삼위일체론해설의 인위적인 형태들에 관해서, 그 교리의 대부분 해설들의 최우선적인 문제들은 신성의 두 번째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라고 와츠는 주장하였다. 와츠에 따르면,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라든가 세 인격이 한 인격이란 개념에로 이끈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 신분이었다. 이 문제는 신성의 두 번째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간의 영혼(human soul)으로서, 즉 하나님에 의해서 “형성된” 인간의 영혼으로서, 성서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확인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해결되었다고 그는 제시하였다. 이 인간의 영혼은 그의 인간의 몸(human body)이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신의 본질과 연합”되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간의 영혼이 한 신성에 속하는 독특한 대리인 혹은 행동의 원칙이라는 명제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명제의 진실이나 개연성은 이성에서 기인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간의 영혼은 한분 하나님께 통합된 독특한 대리인이란 명제는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개념에 상반되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각 인격들에게 마땅히 바쳐야할 적절한 예배문제에 관해서 와츠는 적절한 믿음과 실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서가 계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와츠에게 있어서 삼위일체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즉 “그들의 신성(神性)내지는 신의 본성 속의 교제”가 성서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한 예배와 영예”를 바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 “거룩한 세 인격들 개개인에게 동일한 형식의 식사(式辭)와 경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계시의 내용이 “성서가 그들에게 할당한 특별직위와 특성”에 맞게 삼위일체의 여러 인격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예배와 식사(式辭)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스톤과 홈즈는 삼위일체에 관한 와츠의 “논문” 사본을 구했고, 와츠의 견해들을 채용하였다. 헨리 파틸로는 오렌지 장로회의 1793년 가을 모임에서 목회후보생들의 신학 시험을 관장하였다. “파틸로가 삼위일체론의 주제에 도달했을 때, 그는 매우 작았고, 그 이론에 대한 그의 질문들은 유별나지 않았다.”고 스톤은 전하였다. 스톤은 홈즈와 자신의 답변들이 “정직했고 만족할만했다”고 기억하였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오렌지 장로회의의 1794년 봄 집회 전, 스톤은 목사고시를 마치고 설교 자격증을 받을 예정이었을 때, “상당히 우울” 해졌고, 설교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어떤 소명을 좇으려고 결심했다고 스톤은 전하였다. 그의 우울의 주된 원인은 신학적인 것이었다. “내 마음은 사실로 받아드려야 할, 그렇지만 성서에 명백히 가르친 다른 것들과 만족스럽게 일치시킬 수 없는 많은 난해한 교리들로 인해서 당황스러웠다”고 그는 썼다. 스톤의 마음을 “당황스럽게” 한 교리들의 두 가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과 “하나님의 은밀한 의지”에 관한 교리들이었다.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가르친 바와 같이 이들 교리들 모두는 성서에 “명백히” 가르친 명제라고 스톤이 본 것과 성서에 명백히 가르친 명제와 불일치한다는 암시들을 갖고 있다고 그에게 비친 또 다른 명제와 결합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의 교리에서 성서에 명백히 가르친 명제는 하나님은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가르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의 교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 자신의 의지(will), 구애받지 않는 불변의 운명(ordain)의 가장 현명하시고 가장 거룩하신 결정(counsel)에 의해서 행하셨다”고 또한 진술하였다. 그러나 스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분이란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밀한 의지”에서 성서에 명백히 가르친 개념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특정 개인들이 저주받게 될 것을 하나님이 결정하셨다고 또한 진술하였다. 그러나 스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 분이시란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스톤이 비트시우스의 삼위일체론에 의해서 혼란을 겪었던 앞서와 마찬가지로 스톤의 지적인 혼란은 그의 기도생활(devotion)에 악영향을 미쳤다. “칼뱅주의 틀 속에서 매우 오랫동안 조직신학연구에 종사했고 제한받았기 때문에 나의 열정, 평안 그리고 영적인 삶이 상당히 감소되었다”고 스톤은 적었다.

설교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어떤 소명을 좇으려고 결심한 후에 스톤은 조지아 주 오글소르프(Oglethorpe) 군(郡)에 살고 있는 그의 형제, 매튜 스톤(Matthew Stone)의 집으로 향하였다. 매튜와 또 그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던 스톤의 사촌형제(half-brother) 토마스 스톤의 영향으로 스톤은 윌크즈(Wilkes) 군(郡)소재 워싱턴 가까운 곳에 최근 세워진 감리교 아카데미에서 언어 교수로 채용되었다. 1794년 봄에 스톤이 겪었던 우울함의 근원은 신학적 문제에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도 있었으므로 이 임직은 우연한 것이었다. 그의 기금은 고갈되었고, 그의 친척들 가운데 누구도 기꺼이 그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조지아 주에 머무는 동안 스톤은 존 스프링거(John Springer)의 설교 집회에 참석하였다. 스톤은 그를 “매우 열정적인 장로교인”으로 기술하였다. 델라웨어 주 윌밍턴(Wilmington) 근교에서 태어난 스프링거(1744-1798)는 오렌지 장로회의 주도적인 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제임스 홀(James Hall)의 지도아래서 신학을 공부했던 프린스턴의 졸업생이었다. 그가 출판한 저술들은 제임스 맥그레디의 것들과 스타일과 내용 면에서 눈에 띄게 유사하다. 스프링거의 설교를 통해서 스톤은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매우 강렬한 소망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들 “감명”을 “거부하고 억누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평안은 망가졌다.”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는 그 같은 경험이 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시는 증거였다.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1796년 봄에 조지아 주에서 일 년 반을 가르친 후에 23살의 스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로 돌아왔다. 1796년 4월 6일 그는 성공적으로 그의 남은 목사고시를 마쳤고, 오렌지 장로회로부터, 오렌지 장로회의의 범위 내에서 혹은 그가 “절차를 따라 초빙”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목회가 가능한 “목사보(牧師輔)”로서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초기에 느낀 칼뱅주의 신학의 당혹스러움을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목회 초기에 선택과 유기와 예정에 관한 칼뱅주의 교리들을 “진리이지만 가늠할 수 없는 신비들”로 보았고, 그의 설교를 “신앙의 실천분야”에 “국한하였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는 데이비드 콜드웰(David Caldwell)의 충고에 관한 이 입장을 채택했을지 모른다. 콜드웰은 동일한 질문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그의 학생들 가운데 다른 한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의 과정을 충고하였다.

스톤은 부적절한 초기의 느낌들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해의 일 년 반 동안을 목사보로서 버지니아 주의 서부, 테네시 주, 켄터키 주를 목회하기 위해서 순회하였다고 전하였다. 1797년 겨울에 그는 켄터키 주 북부에 소재한 캐인 리지(Cane Ridge)와 콘코드(Concord) 지역의 장로교 회중들을 맡아 정착하였다. 자서전에서 스톤은 겨울이 찾아온 것 외에 캐인 리지와 콘코드에 그가 정착하게 된 그 어떤 이유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이 지역이 그에게 특별히 매력적이었는지 두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캐인 리지와 콘코드 공동사회들의 거의 전체 인구의 종교적 배경이 장로교회였다. 이전에 영국교회에 다니다가 장로교회로 옮긴 자로서 스톤은 장로 교인들의 모임을 평가하였다. 둘째, 스톤이 그의 자서전에서 지적한 대로, 캐인 리지와 콘코드 공동사회들은 “부유한” 농장주들로 구성되었다. 비록 스톤이, 다른 장로교회 목사들처럼, 부(富)가 하나님께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 수 있는 함정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는 배경과 교육에 의해서 변방 사회의 중상류 계층과 연결되어있었다.

1798년 봄에 스톤은 트랜실베이니아(Transylvania) 장로회를 통해서 캐인 리지와 콘코드의 연합 회중들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스톤은 그 부름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1798년 10월 4일이 그의 안수식 날짜로 정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서에 가르친 교리체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진실하게 받아드리고 수용하라”는 요구가 그에게 주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신앙고백서의 조심스런 재검토에 착수하였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이것이 내게는 거의 슬픔의 시작이었다. 나는 신앙고백서에 가르친 삼위일체론에 망설였다. 나는 그것을 믿어보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것에 양심적으로 서명할 수가 없었다.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친 선택과 유기와 예정에 대한 교리들에 관해서 의심들이 또한 내 마음에 일어났다.”

스톤의 안수식 날짜로 정해진 날 트랜실베이니아 장로회의 11명 위원들이 캐인 리지에 모였다. 스톤이 시험을 치르고 안수를 받게 될 장로회의 회의 전에 그는 장로회의 두 위원들인 제임스 블리스(James Blythe)와 로버트 마샬(Robert Marshall)을 사적으로 만나 그들에게 그의 난제들을 고지(告知)하였고, 그가 그 때 안수를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블리스와 마샬은 스톤의 “난제들과 이의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톤이 블리스와 마샬에게 드러낸 난제들의 크기는 후에 일부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1822년에 쓴 한 편지에서 제임스 블리스는 스톤이 그 때 신앙고백서에 표현된 “특정 교리들에 관해서 몇 가지 이의들을 제기하였으나 신앙고백서의 주된 교리들의 어느 것에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블리스의 편지에 대한 응답에서 스톤은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란 말에 반대하였다는 것과 삼위일체론에서 세 “인격들”(persons)이 세 “지적인 존재들”(intelligent beings) 혹은 세 “호칭들이나 관계들”(appellations or relations)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와 예정 교리들에 관한 그의 “의심들”을 블리스와 마샬과 나누지 않았다. 1729년 장로교 총회(synod)가 승인한 수용 조례(Adopting Act)에 따르면, 만약 장로회의 관점에서 신앙고백서에 대한 후보자의 이의들이 단지 “비본질”에 관한 것이면, 신앙고백서에 오로지 부분적으로 서명할 목사 후보자를 안수하는 것이 허용될만한 것이었다. 블리스와 마샬은 “얼마만큼까지”(how far) 신앙고백서를 기꺼이 수용할 것인지를 스톤에게 물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을 보는 한 신앙고백서를 기꺼이 수용할 것이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부분서명이 충분한 자격을 갖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스톤은 트랜실베이니아 장로회에 의해서 안수를 받았다.

참고목록

Dunnavant, Anthony L. Ed. Cane Ridg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 (1992).
Hughes, Richard T. Reviving the Ancient Faith: The Story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96).
Stone, Barton Warren. 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Written by Himself, with Additions and Reflections by Eld. John Rogers (1847), reprinted in The Cane Ridge Reader (1972).
Ware, Charles C. 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1932).
West, William Garrett. 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
Williams, D. Newell. 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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