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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12 15:25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 3. 대부흥회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86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1772-1844)

출저: D. Newell Williams, "Stone, Barton Warren (1772-1844),"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번역: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역자 주: D. Newell William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

목차

1. 서론
1.1 성인 같은 성품
1.2 신학적 논객
1.3 부와 접대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2.2 교육
2.3 회심과 목회소명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3. 대부흥회
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3.2 믿음에 대한 새 빛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의 이름
4.2 대속에 대한 새 빛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4.5 켄터키 주로 귀환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7. 스톤-캠벨운동과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후기 회상
8. 죽음과 장사
9.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스톤의 영향
참고목록

3. 대부흥회

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한편 켄터키 주 남부에서는 스톤의 신학적인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될 부흥회가 제임스 맥그레디와 몇몇 스톤의 이전 콜드웰 아카데미의 급우들의 리더십아래서 시작되었다. 1796년 제임스 맥그레디는 켄터키 주 남부의 강들, 즉 레드(Red), 머디(Muddy), 가스퍼(Gasper)를 따라 이름 붙여진 세 개의 회중들을 돌보는 목사가 되었다. 1797년 봄까지 가스퍼 강가에 짧은 기간의 각성운동(awakening)이 있었다. 1798년 여름과 가을에 이들 세 회중들이 각성되어진 것 같았다. 몇몇 젊은이들이 일련의 “성찬 집회들”(sacramental meetings)을 통해서 체험한 회심을 고백하였다. 성찬 집회는 스코틀랜드의 성만찬 전통(Scots communion tradition)이었다. 이 전통은 18세기 미주 장로교회들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비록 집회는 한 회중에 의해서 개최되지만, 전형적으로 여러 회중들과 설교가들이 이들 집회들에 동참하였다. 금요일, 토요일, 주일에 목사들은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주일날 동참한 교인들은 주의 만찬예배를 가졌다. 높아진 종교적 관심의 패턴과 성찬 집회들에 관련되고 보고된 회심들은 1799년 여름동안 반복되었다. 그래서 1800년 여름기간에 서부 대 부흥회(1797-1805, the Great Revival in the West)로 알려진 것의 특징들, 즉 대단히 큰 규모의 군중들, 성찬 집회들을 위해서 땅바닥에 텐트를 치는 관행, “쓰러지는”[역자 주: 입신과 비슷한 현상] 사람들의 신체적 현상들이 처음 나타났다.

부흥회 소식을 접한 스톤은 1801년 이른 봄에 맥그레디와 다른 노스캐롤라이나 주 장로 교인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성찬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켄터키 주 남부로 여행하였다. 자서전에서 스톤은 그가 처음 보았을 때의 쓰러짐의 현상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전사자들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외관상으로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때로는 잠깐 동안 소생하기, 깊은 신음, 혹은 공기를 가르는 비명, 혹은 격렬하게 부르짖으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에 의해서 삶의 증상들을 들어내 보이기를 여러 시간 연속적으로 계속하였다.” 점진적으로 그들은 깨어나곤 하였다. “그들의 안면을 덮고 있던 우울한 구름”이 처음에는 소망의 미소들에, 그러고 나서는 기쁨의 미소들에 물러나곤 하였다. 종국에 그들은 “구원을 외치면서” 일어서곤 하였다. 그러고서는 둘러선 군중에게 “진실로 유창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설교하곤 하였다. “놀라서” 스톤은 “내가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복음의 영광스런 신비들을 선포하는 것을 듣지 않았는가.”라고 외쳤다. 다른 이들에게 주는 그들의 호소가 엄숙하고, 심장을 꿰뚫으며, 용감하고, 자유로운“ 것이었다고 그는 전하였다. 그들이 행한 설교에서 ”전개된 복음진리에 관한 지식에“ 그가 깜짝 놀랐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들의 호소를 들으면서 ”연사들이 막 전달받았던 동일한 상태로“ 사람들이 쓰러지는가를 스톤은 관찰하였다.

3.2 믿음에 대한 새 빛

안수를 받은 다음 스톤은 선택, 유기, 예정에 관한 칼뱅주의 교리들과 계속해서 씨름하였다. 그들 교리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셨으나 버림받은(유기) 자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스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가르침과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인가 이었다.

스톤이 1805년에 출판한 그의 신학적인 발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서 그는 그의 “모든” 난제들이 켄터키 주 남부에서 “하나님의 일”을 관찰하는 동안 사라졌다고 보고하였다. “많은 수의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신앙을 고백하였고, 모두가 동일하고 단순한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나는 목소리를 알았고, 권세를 느꼈다”고 그는 썼다. 스톤이 안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가 느낀 그 “권세”는 복음의 권세였다. 그 복음은 영적이나 “도덕적”인 권세로써 죄인들로 하여금 죄 사함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 것이었다. “믿음은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 혹은 기초였다. 그 믿음은 예수의 증거 혹은 복음이었다. 죄인들은 이 복음을 믿고, 또 하나님께로 나아가 은총과 구원을 받을만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고 스톤은 전하였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믿음을 주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영적 혹은 도덕적 자발성을 주신 것과 죄인들은 도덕적 탁월성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그들을 기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할 그 메시지를 믿을만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받을 정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했다.

도덕적 탁월성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을 통해서 죄의 형벌과 권세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의지와 갈망을 죄인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개념 속에는 장로 교인들이 새롭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운 특징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믿을만한 능력, 곧 그들에게 죄의 권세에 대해서 깨닫게 할 성령의 사전(事前) 사역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인지할 힘이 있다는 것이 스톤의 주장이었다. 스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는가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발전시켰고, 켄터키 주 남부 집회에 참석하기 이전에 그것을 다른 목회자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죄인에게 죄의 권세를 깨닫게 할 성령의 사전(事前) 사역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주신다는 개념이 집회 중에 쓰러지고 [역자 주: 입신과 비슷한 현상] 있는 사람들과 시간의 문제일 뿐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회심들이 이뤄지는 대 부흥 집회 중에서 더욱 강요되고 있었다. 스톤과 같은 사람이 겪었던 상당기간의 “고뇌”는 동시대의 신앙인들에게는 전형적이었다.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스톤은 그가 목격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또 그가 죄인에게 “지금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켄터키 주 북부로 돌아왔다. 머지않아 켄터키 주 북부 장로교인들 사이에 대부흥회의 뚜렷한 특징들에 대한 보도들이 있었다. 6월 첫 주일 스톤은 콘코드(Concord)에서 성만찬을 집례 하였다. 그날의 모임은 켄터키 주 북부에서 열린 집회들 가운데서 가장 큰 신앙집회였다. 유명한 인디언 전사(戰士)이자 예비군 수장(captain)이었던 로버트 패터슨 대령(Colonel Robert Patterson)은 모인 수를 4,000명으로 추정하였다. 26년 후에 쓰인 그 부흥회에 대한 설명에서 스톤은 장로 교인들은 물론이고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도 참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집회는 밤낮으로 5일간 계속되었고, 야외에서 이뤄졌다. 콘코드 집회소가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넓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곱 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참석하였다. 적어도 한 명의 감리 교인이 설교하였다. 패터슨은 150명이 쓰러졌고, 250명이 성찬을 받들었다고 전하였다. 그는 또 12가족들이 식량을 가져왔고, 땅바닥에서 야영하였다고 적었다. “쓰러짐”과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의 참석으로 특징지어진 잘 거행된 성찬들이 6월과 7월 내내 켄터키 북부에서 계속되었다.

한편, 8월 첫 주말에 캐인 리지(Cane Ridge)에서 성만찬식이 있을 것을 광고한 후 6월 마지막 주간동안 28세의 스톤은 켄터키 주 무렌버그(Muhlenberg) 군(郡) 그린빌(Greenville)로 여행을 떠났다. 그린빌은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의 고향이었다. 스톤은 7월 2일 자신보다 11살 아래인 그녀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와 엘리자베스는 캐인 리지에서 거행될 8월 성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 “서둘러” 무렌버그를 떠났다고 스톤은 전하였다.

나중에 캐인 리지 집회 혹은 캐인 리지 부흥회로 알려진 캐인 리지의 성만찬집회는 1801년 8월 6일 금요일에 시작하였고 다음 주 목요일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마차들이 땅바닥에 야영하였고, 그 수가 적어도 토요일과 주일에 걸쳐 125대에서 148대까지 다양하게 추정되었고, 한 목격자는 그 넓이가 네 개의 도시 블록에 맞먹는 것이었다고 전하였다. 게다가 승마장에 거주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이웃 마을들에서 민박한 사람들까지 수천 명의 참석자들이 낮 집회를 위해서 도착하였다. 땅바닥에 선 사람들의 수가 토요일과 주일 1만 명에서 2만 명 또는 그 이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 참석자는 야영장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설교하는 목사가 모두 7명”이었다고 그 수를 헤아렸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루터기들과 마차들을 급한 대로 단상으로 활용하였다. 16명과 아마도 많게는 18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 적어도 4명의 감리교 목사들이 또한 설교하였다. 신원불명의 한 흑인(아프리칸 미국인) 설교가는 침례 교인이었을 것이다. 성찬을 받든 자의 수가 800명에서 1,100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었다. 쓰러진 자들의 수는 300명에서 3,000명까지 추정되었다.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믿음에 관한 스톤의 새로운 빛이 몇 명의 그의 장로교 동료들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장로 교인들이 지금 믿고 구원받으라는 죄인들을 향한 스톤의 초청에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죄의 권세에 대해서 죄인들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어떤 사전 사역도 없이 복음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다는 견해에 대한 반대가 리처드 맥네마르(Richard McNemar)의 켄터키 주 캐빈 크릭(Cabin Creek) 회중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1801년 11월 3일 캐빈 크릭(Cabin Creek) 회중의 세 명의 장로들이 워싱턴 장로회(Washington Presbytery)에 맥네마르의 교리를 비난하는 고소장을 보냈다. 1801년 11월 11일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장로회가 모였을 때, 캐빈 크릭의 장로들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가 다뤄지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맥네마르는 워싱턴 장로회를 통해서 오하이오 주 남부 터틀 크릭(Turtle Creek) 회중으로부터 청빙을 받아갔다.

후에 스톤은 장로교 성직자들 사이에서 “정통에 까다로운 사람들”이 스톤과 맥네마르와 다른 목사들이 설교한 교리들에 괴로워 몸부림쳤지만, 이들 교리들이 사람들에 미친 “강력한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의 견해들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을 공개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였다고 썼다. 1802년 가을에 가서 장로교 목사들의 입장이 바꿨다. 입장변화의 이유는, 스톤에 따르면, 감리 교인들과 침례 교인들에게 교인들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스톤은 침례 교인들이나 감리 교인들이 된 사람들을 밝히지 않았지만, 성찬 집회에서 “신앙을 고백”했을 성싶은 장로교 가정들에서 자란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스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매인 자들”이 그것의 교리를 과감하게 설교함으로써 또 “그들을 방어하는데 가장 강력한 주장들을” 씀으로써 “제자들을 끌어가는데” 성공한 침례 교인들과 감리 교인들에 대응하였다고 전하였다. 여기에 대응하여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의 설교가들은 그들의 독특한 교리들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고백적 투쟁에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매인 자들은 그것에 반대되는 교리들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분개하였고, 우리의 진보를 저지하고 우리들을 주저앉게 만들려고 결심하였다”고 스톤은 주장하였다.

문제들이 1803년 9월 6일 렉싱턴에서 개최된 켄터키 주 총회(Synod of Kentucky) 때 부각되었다. 총회 시작 때부터 총회의 다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스톤과 맥네마르 그리고 그들과 함께 믿음의 교리를 나눈 세 명의 다른 목사들, 즉 로버트 마샬(Robert Marshall), 존 톰프슨(John Thompson), 존 둔라비(John Dunlavy)의 목회사역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9월 10일, 스톤과 맥네마르, 마샬, 톰프슨, 둔라비는 탈퇴하였고, “우리가 그의 결정권을 ”양심상 인정할“ 수 없는 재판관(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앞에 기소되기보다는 총회의 지배권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항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화해시키려는 노력들이 거의 즉시 시작되었으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한편 마샬, 둔라비, 맥네마르, 스톤 그리고 톰프슨은 정식으로 스프링필드 장로회(Springfield Presbytery)를 결성하였다. 스프링필드란 이름을 택한 것은 워싱턴 장로회와 그들의 역사에서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와의 긍정적 관련 때문이었다. 1804년 1월 스프링필드 장로회는 <<켄터키 주 총회의 지배권에서 탈퇴한 것에 대한 변호, 그것에 복음에 대한 간결한 견해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관한 몇 가지 견해들이 첨부되다>>(An Apology for Renouncing the Jurisdiction of the Synod of Kentucky, To Which Is Added a Compendious View of the Gospel and a Few Remarks on the Confession of Faith)는 주제로 100쪽짜리 팸플릿을 출판하였다. 마샬은 팸플릿의 첫 부분인, “변호”를 썼고, 이어지는 두 부분들은 스톤과 톰프슨에 의해서 각각 쓰였다.

스톤의 “복음에 대한 간결한 견해”는 새 장로회의 신학적 성명이었다. 스톤은 인간의 완전타락, 중생, 복음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논하였다. 반대자들은 죄인들이 복음을 믿도록 준비시키는 성령의 사역[역자 주: 성령의 조명론과 내적증거론]을 부인함으로써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그들이 부인한다고 고발하였다. 스톤은 이 고소에 대응하여 주장하기를, “우리는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물이 될 믿음을 갖고 있다.”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고 그는 선언하였다. “마음이 성령에 의해서 약간의 비밀과 신비스런 방법으로 진리를 보고 시인하기 위해서, 죄인이 그것을 믿을 수 있기 전에, 조명되어지는 것이 틀림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말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마음을 조명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어지기까지 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참고목록

Dunnavant, Anthony L. Ed. Cane Ridg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 (1992).
Hughes, Richard T.
Reviving the Ancient Faith: The Story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96).
Stone, Barton Warren.
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Written by Himself, with Additions and Reflections by Eld. John Rogers (1847), reprinted in The Cane Ridge Reader (1972).
Ware, Charles C.
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1932).
West, William Garrett.
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
Williams, D. Newell.
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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