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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7-18 22:02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046  

발톤 스톤(Barton Warren Stone, 1772-1844)

출저: D. Newell Williams, "Stone, Barton Warren (1772-1844),"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4)
번역: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역자 주: D. Newell Williams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Brite Divinity School의 교수

목차

1. 서론
1.1 성인 같은 성품
1.2 신학적 논객
1.3 부와 접대

2. 장로교 목사 되기
2.1 가족 배경
2.2 교육
2.3 회심과 목회소명
2.4 삼위일체론에 대한 초기 난관들
2.5 연이은 신학적 난관들과 또 다른 소명을 찾으려한 결심
2.6 설교자격증과 안수

3. 대부흥회
3.1 남부 켄터키 주 부흥회 방문
3.2 믿음에 대한 새 빛
3.3 북부 켄터키 주 부흥회 진작과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과의 결혼
3.4 켄터키 주 노회와의 결별

4. 그리스도인의 교회
4.1 유언서와 그리스도인의 이름
4.2 대속에 대한 새 빛
4.3 이전 동료들과의 결별과 신자들의 침수세례를 채택
4.4 <<제언>>(An Address) 출판, 셀리아 보웬(Celia Bowen)과 재혼, 테네시 주로 이주
4.5 켄터키 주로 귀환
4.6 삼위일체론과 대속론에 관한 논쟁을 일신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6. 교회와 사회
6.1 노예제도에 대한 초기 반대
6.2 해방 흑인들의 이주 지원 및 일리노이 주로 이사
6.3 노예제도의 즉각적인 폐지 지원
6.4 노예, 그리스도인 연합, 전 천년설
6.5 반정부입장 채택 및 평화주의

7. 스톤-캠벨운동과 그리스도인 연합에 관한 후기 회상
8. 죽음과 장사
9.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스톤의 영향
참고목록

5. 알렉산더 캠벨의 추종자들과 연대

1811년 마샬과 톰프슨이 장로교회로 회귀한 지 20년 이내에 서부에서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켄터키 주, 테네시 주, 앨라배마 주, 오하이오 주, 인디애나 주에서 교인이 16,000명이 넘게 성장하였다. 많은 이들이 신앙고백과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가입하였고, 다른 이들은 버지니아 주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그리스도인의 교회 운동에 공감하였다. 그러나 쾌 많은 수가 침례(자) 교회들의 교인들이었고, 종종 침례(자) 교회 협의회들이 통째로 들어오곤 하였다. 이들은 오직 성서에로 그리스도인이 연합하자는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였다.

스톤은 1824년 가을에 자기보다 16살이나 아래인 알렉산더 캠벨과 만났다. 그때 캠벨은 두 달간 켄터키 주 소재 렉싱턴, 베어사이(Versailles, 베르사유), 루이빌, 그보다 작은 지역들과 시골 교회들 사이를 순회 집회 중이었다. 51세였던 스톤은 나중에 기록하기를, 그가 “종종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에 대해서 들었고,” 또 그의 태도와 내용에 기뻤다“고 하였다. 캠벨이 켄터키 주 패리스(Paris)에 있을 때, 캠벨에게 보내진 스톤의 초청에 따라서 캠벨은 조지타운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연단에 섰고, 숙식은 스톤의 집에서 하였다. 일 년 전 캠벨은 월간지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의 발행을 시작하였고, 월간지에 실은 기사에서 신앙고백서를 반대하였으며, 교회들이 신약성서에로의 환원 혹은 사도 질서에로 개혁할 것을 요청하였다.

캠벨의 견해로 인한 켄터키 주 침례자들의 분열이 1825년에 예시(豫示)되었다. 루이빌 소재의 한 침례(자) 교회가 침례자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Baptist Philadelphia Confession of Faith)를 반대하고, 성서만을 그 교회의 믿음과 실천의 안내자로 삼으며, 켄터키 주에서 캠벨의 개혁에 공식적으로 공감하는 최초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캠벨의 개혁에 대한 완강한 반대가 곧바로 켄터키 주 침례자들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1826년 봄 켄터키 주 블룸필드(Bloomfield)의 침례자 스펜서 클락(Spencer Clack)은 캠벨이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에 실은 글들과 “옛 질서(사도전통)의 회복”(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에 관한 그의 시리즈를 통해서 신앙고백서를 공격하면서 그 자신의 신조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일 년 이내에 캠벨의 반대자들은 캠벨의 개혁을 반대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잡지인 <<뱁티스트 리코더>>(Baptist Recorder)를 사용하고 있었고, 협의회들은 캠벨의 개혁들을 주창하는 설교자들을 정직(停職)시키기 시작하였다.

1827년 이후 점진적으로 현저하게 된 캠벨의 개혁들 가운데 한 가지는 죄 사함을 위한 침례였다. 침례자들은 침례의 설계나 목적이 교회의 회원들로서 신자들을 구별하거나 “인치기”(to seal) 위한 것이었다고 가르쳤다. 침례를 받기 전에 후보자들은 전형적으로는 그들의 회심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받았다. 캠벨이 1823년 10월 장로교인 맥칼라(W. L. Maccalla)와 가진 캠벨의 토론회 둘째 날에 “침례의 설계와 취지”의 독특한 관점에 근거해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논의를 끌어들었다. 캠벨은 그 주제에 관해서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아마 침례자들이나 유아세례자들이” 침례의 설계와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가능한 한 충분히” 말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캠벨이 제안하기를 신약성서에서 침례의 중요성을 지목한 소수의 신약성서의 본문들을 인용한 후에 그는 침례의 설계는 신자들에게 모든 죄로부터 “정화”(cleansing)의 확신 또는 “공식적인 표시”(formal token)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캠벨은 “침례가 신자에게 그가 지은 모든 죄의 공식적 혹은 개인적 사함이 되도록 정해졌기 때문에 이 성례의 성격과 취지를 크게 곡해하고 악용하지 않고서는 유아에게는 시행될 수 없다”고 논하였다.

캠벨의 전기 작가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은 캠벨이 죄 사함을 위한 침례론을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 교리를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하기란 죄 사함과 성령의 내주의 확신을 원하는 회개하는 신자들에게 침례를 받도록 권하는 것을 리차드슨은 의미하였다. 리차드슨은 침례의 목적에 관한 캠벨의 견해를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인물이 캠벨의 동료였던 월터 스코트(Walter Scott)였다고 주장하였다. 스코트는 1827년 8월에 마호닝 침례자 협의회(Mahoning Baptist Association)의 전도자(역자 주: 부흥사)로 임명되었고, 11월에 회개하는 신자들에게 침례를 받도록 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26년 봄에 벌써 캠벨의 견해에 정통한 그리스도인의 교회 설교가들은 회개하는 신자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침례를 권하고 있었다. 1827년 1월 스톤은 그 실행을 공개적으로 승인하였다.

1826년 11월 스톤은 월간지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스톤은 1827년 7월에 실은 “그리스도인 침례자에게”란 제목의 기사에서 캠벨에게 제안하였다. 그는 캠벨의 재능들과 학식과 캠벨이 따랐던 과정의 “보편적” 찬성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표하였다. “여러 점에서 귀하의 종교적인 견해들은 우리의 것과 또 우리가 희망했고, 우리 모두가 우리의 노력들을 지향했던 한 가지 점에 일치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무리를 합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기를, “우리는 삼손의 팔과 다윗의 용기로 해묵은 파당의 기초를 허무는 귀하를 지켜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캠벨과 그의 반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능력의 전쟁,” 즉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캠벨이 “전쟁터에 들어가기” 전부터 수년간 교전했다고 그가 주장한 전쟁을 따랐던 것은 “무관심한 구경꾼들로서가 아니었다.”고 관찰하였다.

그러나 스톤은 캠벨을 찬양하거나 선한 싸움을 하고 있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거나 혹은 종교(역자 주: 신앙) 논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쓰지 않았다. 캠벨로부터 “종교에 관한 추측(사색)의 사악함을 좀 더 충분하게” 배웠다고 주장하면서 스톤은 캠벨이 그의 선배들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에 관하여 추측하고 이론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놀람과 슬픔을 표시하였다. 스톤은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의 5월분 발행에 실린 삼위일체(the Trinity)에 관한 기사를 말하고 있었다. 다음 해에 걸쳐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 공포된 기사들은 스톤과 캠벨이 삼위일체론뿐만 아니라 다른 이슈들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톤이 안수 받은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이 목회 후보자를 안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반면, 캠벨은 회중(역자 주: 교회)이 투표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주의 만찬에 관하여 캠벨은 성찬을 침수세례자에게 국한해야 한다고 가르친 반면, 스톤은 그 침수세례 하나만을 침례라고 아직 확신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회심시키신 것이 뚜렷하기 때문에 성찬을 침수세례 받은 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톤은 개혁가들(역자 주: 캠벨 측의 호칭)과 그리스도인들(역자 주: 스톤 측의 호칭)에게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믿었다.

10년 말엽까지 켄터키 주 침례자들의 분열이 거의 마무리 되었다. 아마 켄터키 주 침례자들의 4분의 1내지 3분의 1까지 (어쩌면 10,000정도) 캠벨의 편에 섰다. (역자 주: 1800년대 초기 켄터키 주는 변방 개척지였으므로 인구가 많지 않았다.) 1829년 9월 스톤은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 보도하기를, 최근에 “한 유덕한 침례자 형제가” 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과 “신약성서 침례자들이”(New Testament Baptists) 하나의 백성이 되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고 하였다. 스톤은 “침례자들 사이에 신약성서 개혁가들이 우리가 인정한 부분을 보편적으로 행해왔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모든 파당의 이름들을 거부하였고”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을 취하였으며, 그들은 피차 “성서를 읽고, 그들 스스로 그것의 의미를 판단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그들은 “친교의 시금석으로써 특정한 교리들을 믿도록 피차에 묶지” 않았다. 두 단체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가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방해할 아무 것도 우리 가운데 없다. 그들이 그들 가운데 그것에 반대할 아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마음)으로 하나이다.”고 그는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연합의 끈들을 튼튼히 해 주시옵소서!”라고 그는 덧붙였다.

캠벨은 스톤의 진술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와 그것의 후속지(後續誌)인 <<새천년 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아리우스주의(Arianism)와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피력하도록 허락하였다. 스톤은 개혁가들이 그들의 “침수세례에 대한 독특한 견해들”을 친교의 시금석으로 삼지 말아야 하며 또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1830년 8월 두 번째로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개혁가들(Reformers)과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의 연합에 관한 이슈를 제기하였다. 이번에는 캠벨 자신이 <<새천년 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에서 응답하였다. 그는 “죄 사함”(Remission of Sins)에 관해서 그가 <<새천년 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에 기고한 “부록”(Extra)을 스톤이 검토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for remission of sins)를 뺀, 어떤 침수세례도 없다”는 것을 그에게 납득시킬 것이라는 그의 소망을 피력하였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관해서 그는 그것이 “신성(Deity)의 묘한 견해들”(peculiar views)을 연상시켜왔으며,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분파”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취한다면, 어떻게 개혁가들이 죄 사함을 위한 침례와 매주일 주의 만찬의 준수와 같은 개혁들을 채택하지 않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차별 지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그는 개혁가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이란 이름을 추천하게 되었다.

스톤은 캠벨의 대답에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830년 9월호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매주일 주의 만찬을 정말 지지하고 나왔다. 캠벨은 1830년 10월호 <<새천년 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에서 스톤이 주의 만찬의 매주일 기념을 승인한 것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록 스톤이 죄 사함을 위한 침수세례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지 또 침수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어떻게 계속해서 교제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스톤이 죄 사함을 위한 침수세례를 승인하였다는 것을 그가 “얼마 전” 생각해봤다는 것을 추가하였다. 1831년 8월호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스톤은 침수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교제하는 관행과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의 헌신을 방어하였다.

스톤과 캠벨사이의 주고받기 논쟁은 1831년 12월까지 계속되었지만, 스톤의 입장에서는 연합에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쨌든 간에 스톤은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의 연합에 지속적으로 헌신하였다. 그해 초에 그는 개혁가 소속 존 T. 존슨(John T. Johnson)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관계를 형성하였다. 변호사요 전 국회의원이었던 존슨은 조지타운 서쪽의 그레이트 크로싱즈(Great Crossings)에 있는 침례자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레이트 크로싱즈 침례자 교회를 캠벨의 개혁에로 이끄는데 실패한 존슨과 다른 두 사람은 그 교회를 그만두고 1831년 2월에 그레이트 크로싱즈에 제자들의 교회(회중)를 조직하였다. 10월에 조지타운과 그레이트 크로싱즈 일대의 제자들(Disciples, 캠벨 측)과 그리스도인들(Christians, 스톤 측)이 함께 만나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1832년판 책의 설명에서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의 공동 편집인으로 존슨이 스톤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알렸다.

11월 말에 개혁가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에 관하여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논의가 조지타운에서 있었다. 참석자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 소속 존 로저스(John Rogers)와 개혁가 소속 존 스미스(John Smith)가 있었다. 스미스와 로저스는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의 회중들을 절충하여 연합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기꺼이 켄터키 주 전역을 함께 여행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을 출범시키기 전에 조지타운에서 크리스마스를 끼고 4일간의 집회와 그와 유사한 집회를 신년을 끼고 렉싱턴에서 개최할 것과 주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이 참석하도록 초청할 것을 합의하였다.

조지타운 논의에 의해서 계획된 4일간의 크리스마스와 신년 집회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 모두에 의해서 좋은 참석률을 보였으며, 존 스미스의 전기 작가 존 아우구스투스 윌리엄스(John Augustus Williams)에 따르면, 참석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예배드렸고 협의하였다.” 비록 집회들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기록들은 없지만, 윌리엄스는 렉싱턴 집회에 관한 설명을 제공하였다. 개혁가 소속의 스미스는 개혁가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성서 위에서만 연합할 것을 요청하였다. 스톤은 스미스의 호소를 지지하는 자신의 소견을 마치면서 ”환희와 형제우애로 전율하는 손”(a hand trembling with rapture and brotherly love)을 스미스에게 내밀었고, 스미스는 "진실한 친교의 징표들이 가득 담긴 손으로“(by a hand full of the honest pledges of fellowship) 스톤의 손을 꽉 붙잡다. 그러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았고, “한 노래가 일었다.” 주일에 참석자들은 다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였다.

1832년 1월호에서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는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선포하였다. “이 연합을 증대시키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 개혁가의 이름으로 또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알려진 존 스미스와 존 로저스가 “함께 말을 타고 모든 교회들을 순회하기 위해서 또 기술된 양쪽 교회들의 연합된 기부금들의 지원을 동등하게 받기 위해서” 선발되었음을 또한 알렸다.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이 우리나라의 다른 주들과 지방들에서 그래서 합칠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에서 스톤과 그의 새로운 공동편집자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들이 그들의 고백에서 성실하고, 파당심이 없다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합칠 것이다.”고 하였다. 공동편집자들은 인디애나 주의 러쉬(Rush) 군(郡)과 테네시 주의 모리(Maury) 군(郡)에서의 연합에 대한 정보를 듣고 “연합의 정신(the spirit of union)이 세 개 주(州)들에서와 매우 유사한 방법에서 동시에 진척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기뻐하였다.

스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연합의 열쇠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받는 정신the spirit)이었다. 1833년 10월호 <<크리스천 메신저>>(Christian Messenger)에서 스톤은 연합의 네 종류를 기술하였다. 책 연합(Book union)은 하나의 신조나 신앙고백서 위에 세워졌다. 머리 연합(Head union)은 고백서의 조항들이 책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책 연합과 같다. 물 연합(Water union)은 물에 들어가는 침수세례위에 세워졌다. 불 연합(Fire union)은 “정신의 일치, 즉 진리의 정신위에 세워진 하나의 연합”이었다. 불 또는 정신 연합은, 그가 주장하기를, 홀로 “설”(stand) 것이며, 다른 어떤 연합도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이 정신은 기록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인위적인 형식이나 일련의 견해들로 되지 않고,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또 알려진 주님의 모든 명령들을 즐겁게 순종함으로써 얻어진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이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즉 모든 종족을 사랑하며 기도하도록 이끌어준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이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될” 불 연합이라고 진술하였다. 또 다른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가 말하기를, “잔가지 다발을 한데 묶어서 그것들을 함께 성장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려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이 얼마나 헛된가!“라고 하였다.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잔가지들이 ”어떻게든 상호 연합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살아 있는 줄기에 연합해야 하고, 그것의 수액을 받아야 하며, 정신을 받아야 한다.“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든 정신 안에서 피차 연합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그의 정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연합시킬 많은 계획들을 궁리하였지만, 모두 헛되다.“고 그는 피력하였다. ”오직 한 가지 효과적인 계획, 즉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그 안에서 걷는 계획이 있을 뿐이다.“고 그는 충고하였다.

그리스도인들과 개혁가들의 연합을 성취시키려는 스톤과 다른 사람들의 노력들은 켄터키 주에서 크게 성공적이었다. 캠벨의 죄 사함을 위한 침례의 가르침을 거부한 많은 오하이오 주 그리스도인들과 일부 인디애나 주 그리스도인들이 개혁가들과 합치는 것을 거절하였다. 스톤은 여생을 그 정신에서 연합에 힘썼다. 그러나 1834년까지 그의 관심의 상당 부분은 그의 가족이 켄터키 주에서 일리노이 주로 이주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이 이주는 그의 목회기간 내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전념했던 이슈인 노예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참고목록

Dunnavant, Anthony L. Ed. Cane Ridg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 (1992).
Hughes, Richard T.
Reviving the Ancient Faith: The Story of Churches of Christ in America (1996).
Stone, Barton Warren.
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Written by Himself, with Additions and Reflections by Eld. John Rogers (1847), reprinted in The Cane Ridge Reader (1972).
Ware, Charles C.
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1932).
West, William Garrett.
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
Williams, D. Newell.
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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