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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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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동진
댓글 0 조회 9,259 2009.06.17 08:35

본문

(수필)


                밤꽃의 계절 6월이 오면 

                                                   함동진


   6월은 밤꽃의 계절이다. 밤나무는 시골 어디를 가나 산언저리 동네주위 개천이나 강가에 많이 심겨져있다. 유실수로서 지방 곳곳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6월이면 절정인 밤꽃의 자욱함은 안개가 서린 듯 장관이다. 구수하다고나할까? 이상야릇한 밤꽃의 향이 코끝을 간지르는 계절은 고향을 생각케 하는 특유의 냄새이다. 어떤 이들은 밤꽃의 향을 남성이 발정하는 냄새라고도 한다. 남성이 발정을 한다함은 생식을 위한 단계가 아닌가. 생식은 곧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기에 밤꽃의 향기는 맡을수록 향수에 빠지게 하는 은근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고향, 순천 외서의 선산인 넓다란 안산에는 밤나무 단지가 무성하다. 너무나 넓은 밤나무단지인지라 해충방제를 할라치면 살충제를 헬리콥터로 공중살포 하여야한다. 농촌계몽가이신 나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우량종 또는 개량종의 밤나무를 손수 접목번식하여 단지를 일구어 왔다. 조부께서 타계하신 이후 숙부께서 이어받아 경영하신다. 밤은 영양가가 높은 열매로 산골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이며 농촌에는 농가소득의 효자수(孝子樹)가 된다.

 6월, 밤꽃의 계절이 오면 고향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조부님 생각이 간절하다. 항상 객지에 머물러 살던 나는 8.15 해방 무렵과  6.25전쟁 피란 중 약 2~3년 정도(4~7세 때 잠간씩과 11세 때) 짧은 기간이나마 조부님 슬하에 머문 적이 있다. 조부님은 나를 장손이라고 많은 관심으로 엄하게 훈육하시려고 애를 쓰셨다. 조부님 댁에는 사랑채와 칙간채를 사이에 두고 대문을 달아놓았는데, 대문 안쪽의 칙간은 가족용이고, 대문 밖쪽의 칙간은 손님이나 길손들의 용도였다. 1950년 겨울 어느 날 대문 밖쪽의 칙간문 기둥모서리에 기대어 개머리판 닮은 밤나무토막을 들고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더니 마침 용변을 보시던 조부님께서 청천벽력의 고함과 함께 그만두라고 외치시더니 집 울타리의 낭창한 개나리 가지를 손주 손으로 직접 꺾어가지고 사랑방으로 당장 오라고 호통치셨다. 여느 때에나 마찬가지로 나에게 잘못된 행실의 벌칙인 종아리 걷어올리고 목침 위에 올라서서 회초리 맞기 벌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찌나 고집이 세었던지 엄살도 없이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않으니 매맞기 시간이 길어졌다. 종아리는 뱀이 휘어 감듯 피멍줄기가 수없이 많은 가닥으로 얽혀 있었다.
 
 조부님께서는 구한말(舊韓末) 의병에 가담하시어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왜병들을 사살하였고, 수많은 의병들 역시 왜병들의 총칼에 의해 전사 희생되는 것을 보셨기에, 총으로 사람 죽이는 짓은 인간으로서 참아 못할 행위임에 치를 떠시는 것이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생명의 존귀함을 아셨기에 총 쏘는 흉내가 가없이 가슴 떨리는 죄악으로 보이셨기 때문이었으리라.

 나의 조부(송암 함봉표)께서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6.25 전쟁 중에 아래의 시를 남기셨다.


   존폐와 합분이 각기 때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의 길흉을 어찌 알리요.
   산간 폐옥은 밥지은 연기 끊어지고
   야외의 벽촌에 사람, 개도 드물다.
   남을 해친 너희 무리 빨리 가거라.
   백성 건질 우리 님 언제 오려나
   동서(우익과 좌익)에서 공작하느라 쉬는 땅이 없으니
   언제나 벼개 높이고 편한 잠을 자리요.


     
[世感]
   存廢合分各有時      존폐합분각유시
   到頭吉凶豈人知      도두길흉기인지
   山間廢屋炊烟絶      산간폐옥취연절
   野外僻村人犬稀      야외벽촌인견희
   害物爾徒去亦速      해물이도거역속
   濟民我后來何遲      제민아후래하지
   東西工作無休地      동서공작무휴지
   何日安眠高枕支      하일안면고침지

      (松庵 咸鳳表의 시 世感<이 세상은 -6.25를 겪으며> 전문) 


 그렇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것이다. 산간벽촌까지 인적이 끊일 정도로 인명이 살상된 6.25 전쟁은 참으로 끔직하지 않은가. 고향을 생각케 하는 밤꽃의 계절 6월에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기념일」이 있다. 이 두 기념일이 인간의 목숨이 희생된 것과 관련된 기념일이기에 그 날이 오면 심정이 더욱 숙연해진다.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조부님의 산소와 밤나무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조부님을 회상한다. 가을이면 사촌이 형님 맛보라고 햇밤 한 박스를 택배로 부쳐온다.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내가 태어난 흙에서 난 밤이 제일 맛있다고 고향 자랑을 한다.


   선영에 올라
   할배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더디게 찾아 뵙는 참회의 묵념을 드린다.

   네 살 적 할배 수염 끄들어 잡으면
   네 이놈! 하시곤 
   머리 쓰다듬던 할배.

   저만치 밤나무 한 그루
   할배의 혼이 배었나
   엣다, 또 끄들어 보아라
   밤꽃은 할배의 수염이 되어
   머리 위서 하늘거린다.

           (1994. 10. 1. 작  졸시 <밤꽃> 전문) 


 다시 밤꽃의 계절 6월이 왔다. 6월은 밤꽃으로 고향을 생각케도 하지만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숭고한 순국영령들과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으로 얼룩진 6.25 전쟁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계절이기도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지붕 위로 굉음을 지르고 지나가는 비행기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생사를 건 6.25 전쟁 피난 중 폭격기의 공습에 놀란 가슴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이랴 푸른 하늘 흰 구름 사이로 비행기가 벗어 나와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가 살아있는 목숨은 거저 얻어 지니고 있는 목숨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북교류는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이 아니라 신중을 기하면 좋겠다.

 밤꽃의 계절에 고향과 조부를 생각하며, 개나리회초리의 엄하신 훈육의 덕으로 사람됨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는 지금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2001. 6. 6.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http://www.poet.or.kr/h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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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 함봉표의 년보(松庵 咸鳳表의 年譜)    

                                                           함동진


                     [031]

                                       (사진: 송암 함봉표 지사(松庵 咸鳳表 志士)


1889년 8월 14일 : 

       ☞ 송암 함봉표는 정언관, 의관(正言官, 議官)인 父 명사 함장기(明沙 咸莊基 - 基昊, 兆海)와 母 파주 염씨(波州 廉氏)와의 사이에 七子女 중 次男으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삼룡리(全南長城郡黃龍面三龍里 - 지금의 와룡리-臥龍里)에서 출생하다.
1894년 : 

       ☞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겪다.
1895년 : 

       ☞ 연옹 박선생 문하(然翁 朴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하다.
1897년 : 

       ☞ 죽은거사 김대규 문하생(竹隱居士 金大奎 門下生)으로 2年間 受學하다.
1899년 : 

☞ 朴然翁 先生 門下에서 2年間 수학(受學)한 後 16세가 될 때까지 가내(家內)에서 독학(獨學)을 하다.
1903년 : 

       ☞ 광산 김영호(光山 金永鎬) 선생 門下에서 受學하다. 이 때에 社會가 극(極)히 혼란(混亂)하여 의지(意志)를 굳게하다.
1907년 1월 : 

       ☞ 장성 황룡면에서"<생즉의사 사즉의귀-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의(義)를 위(爲)하여 싸우는 투사(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귀신(鬼神)이되어 싸운다."라는 좌우명(座右銘)으로 의지(意志)와 정신(精神)을 삼아 분연(憤然)히 일어나 자위대(自衛隊)를 조직 인솔(組織 引率)하여 호남의용장(湖南義勇將)인 참봉 김태원 막하(參奉 金泰元 幕下)에 가담하다.
       ☞ 창평 무등촌에서
의병장 김태원 휘하(義兵將 金泰元 揮下)에서 창평 무등촌 전투(昌平 無等村 戰鬪)에 참전, 외적 길전부대(參戰, 倭敵 吉田部隊)와 혈전분투(血戰憤鬪)하여 적장 길전(敵將 吉田-요시다)와 그 부대(部隊)를 총몰살(總沒殺)하고 무기(武器)를 노획하는 전과(戰果)에 가담(加擔)하다.
          2월 : 

       ☞ 장성 황룡면에서장성군 황룡면 월암리(月岩里-鼓岩) 전투(戰鬪)에 참전(參戰)하여 일주야간 일본군부대(一晝夜間 日本軍部隊)와 대혈전(大血戰)을 벌여 日本軍을 총몰살(總沒殺)하는 전과(戰果)에 가담(加擔)하다.
          3월 :

      ☞ 羅州·靈岩·江津·海南에서 군자금조달운반책(軍資金調達運搬責)의 命令을 받들고 義兵 3人을 거느리고 羅州·靈岩·江津·海南 等地를 巡廻, 義兵支援을 꾀하는 元老들의 家宅을 秘密裏에 訪問, 軍資金受領調達의 任務를 完遂하다.
          6월 : 

        ☞ 光州(光山) 魚登山에서光州(光山) 魚登山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血戰, 追擊하던 中 不幸하게도 義兵將 金泰元 將軍께서 戰死하므로 哀慕하고 痛哭하다.
같은 때 海山 全垂鏞 將軍과 痴齊 金 將軍이 義兵을 이르켜 軍士를 모으므로 이에 加擔하다.
          10월 : 

         ☞ 光州(光山) 大峙里에서光州 大峙里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여 日兵을 總 沒殺하고 武器를 노획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 福興面 內東里에서같은 때, 淳昌의 義士 申昌學 將軍이 軍士를 모아 福興面 內東里에서 義兵을 指揮하므로 이 戰鬪에 參戰하여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1월 : 

         ☞ 長城 自隱谷에서長成의 自隱谷戰鬪에 參戰, 日兵과 大血戰을 벌이며 追擊하는 戰果에 加擔하다.
          12월 : 

         ☞ 羅州 古幕浦에서 羅州의 古幕浦 戰鬪에 參戰, 日軍駐屯所를 包圍하여 攻擊하다. 이 戰鬪에서 先鋒將 鄭 參尉의 指揮로 連戰連勝의 攻擊이 繼續되었으나 不幸하게도 先鋒將 鄭 參尉의 戰死로 哀慕하다.
1908년 : 

        ☞ 日將 西村(니시무라)의 捕虜가 되어 拷問을 당하면서도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義로운 鬪士요, 죽어서도 義로운 鬼神이 되어 싸운다."라는 義兵 加擔時의 決意를 되세기며 意志와 節介를 屈하지 아니하다.(木浦刑務所 3個月 受刑) 이로써 가정이 敗家(破産)되어 훗날을 期約하고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던 中 參奉 金平淑의 次女인 金月林과 結婚을 하다.
1910년 : 

        ☞ 大韓帝國의 國運이 不幸하여 韓日合邦이 되었다는 消息을 듣고 땅을치며 哀痛학 痛哭하다.
1911년 : 

        ☞ 珍原面 栗谷里로 移住하여 農業에 熱中하는 한편 松沙 奇宇萬(蘆沙 奇正鎭의孫으로 義兵을 이르키고 日本을 排斥한 人物) 先生을 따르며 隱居生活을 계속하다.(義兵決意를 못버림). 
 (註 : 松沙 奇宇萬은 蘆沙 奇正鎭의 손자이고, 노사 기정진은 송암 함봉표의 조부 죽포 함병후(선욱)의 스승이되고, 송사 기우만은 송암 함봉표의 부친 명사 함장기(기호)와 교유함).
         ☞ 같은 때, 大聖敎春秋大祭를 맡음과 아울러 河西 金麟厚 先生의 長成 筆岩書院 春秋大祭를 맡아 執禮하므로 民族正統文化를 지키는데도 앞장서다.
    ※ ☞ 刑務所 出所後에도 日本 憲兵과 巡査의 繼續監視로 行動과 나들이가 自由롭지 못하다. 이로서 生活苦가 따르고 잦은 移住가 있게 되다.
1913년 10월 15일 : ☞ 부친 함장기(父親 咸莊基, 기호-基昊, 조해-兆海)께서 患憂가 있어 誠心을 다하여 약수발을 하였으나 別世하므로 草土에서 3年間 謹愼으로 보내다.
1914년 5월 24일 : 

        ☞ 장자 태영<영주,창현>(長子 泰英<英柱,唱泫>)을 낳다. <註>: 창현 함태영 목사(唱泫 咸泰英 牧師 1914. 5. 24∼1983. 11. 28 조선일보 인터넷 인물 DB에 수록 - 자세한 인적사항은 www.poet.or.kr/hdj <문학의즐거움>詩人 함동진의 홈페이지 참조. 창현 함태영 목사는 함동진의 父이다. 
1915년 : 

        ☞ 동북면 남산리(東化面 南山里)로 이주하여 수년간 농업(數年間 農業)을 경영(經營)하다. 이 때에도 춘추성제(春秋聖祭)를 계속 집례(執禮)하다.
1918년 : 

        ☞ 자산(自産)과 자비(自費)로 本家에 사립학교(私立學校)를 설립(設立)하고, 교사김종운(敎師 金鐘雲)을 임명(任命)하여 자신-봉표(自身-鳳表)가 校長이 되었고, 생도(生徒)의 수(數)는 백여명(百餘名)으로 수년간 교육(數年間 敎育)을 하다.
1919년 3월 1일 : 

       ☞ 기미(己未) 3·1 독립운동(獨立運動)이 일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도록 높이 부르고, 민족(民族)을 교육(敎育)으로 깨우쳐 항일정신(抗日精神)을 기르는데 힘쓰다.
     7월 26일 : 

        ☞ 모친(母親)이 별세(別世)하여 동귀산 고조묘소(東貴山 高祖墓所) 아래 부친묘(父親墓)와 쌍묘(雙墓)로 합장(合葬)하고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늘같이 가없는은혜)하며 초토(草土)에서 근신(謹愼)하다.
1922년 : 

        ☞ 군(郡)의 사회유지회의 요망(社會有志會議 要望)에 의(依)하여 소작상조회 감사(小作相助會 監司)에 피선(被選)된 後, 회장 김경환(會長 金璟煥)씨의 협력하(協力下)에 전답지세(田畓地稅)를 소작인(小作人)이 선세(先稅)로 부담(負擔) 하느냐, 부호(富戶)가 자진납부(自進納付) 하느냐는 일로 각처(各處)의 지주(地主)들 간(間)에 언쟁(言爭)과 다툼이 있으므로 각면(各面)에 설명회(說明會)를 개최(開催)하여 지세(地稅)는 완전(完全)히 지주(地主)의 부담(負擔)으로 하여 소작인(小作人)을 보호(保護)하고 小作人의 離農을 防止하다.
또한 小作料를 6割 增收하느냐 3割 增收하느냐는 일로 富戶들과 討論을 벌여 極力 理解시켜 3割 增收로 完全決定을 봄으로 小作農民을 保護하다.
      ( 註 : 평생동안 어려운 문제발생시마다 언제나 약자편에서서 선의적으로 정의롭게 해결하므로 후일 "변호사"라는 별명이 따름).
1923년 2월 : 

       ☞ 2月에 求禮地域方面을 돌아보다.
            5월 : 

       ☞ 5月에는 구례 봉서리(求禮 鳳西里)로 移住, 土地를 개간 농업(開墾 農業)을 經營하던 中 7年間이나 天災로서 한발(旱魃)이 들다.
1929년 : 

        ☞ 繼續된 凶年으로 因한 生活苦로 不得已 順天郡(昇州) 外西面 長山里 12 番地에 새로히 기반(基盤)을 造成하여 移住하다. 이곳 長山里에서 田畓을 開墾하며 "自力更生"의 意志를 圖謀하여 農業을 經營하다.
1932년 : 

        ☞ 地域區 農民會 會員들의 要望에 依하여 自力更生委員長에 피선(被選)된 後에 뜻하는 바 民風을 改善하고, 農業方法을 改良하며, 靑少年 兒童을 敎育키 爲하여 私設學習場을 運營 民族意識을 고취(高趣)하다.
이로써 向後 13年間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장려(奬勵)하고, 나무심기를 장려하며, 퇴비증산(堆肥增産)을 奬勵하고, 畜産奬勵運動을 積極 展開하며, 지도하다.
1933년 : 

        ☞ 武科하여 주부-증 병조참판(主簿-贈 兵曹參判)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義兵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을 따라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戰死하고 선무원종 종훈(宣武原從 從勳)에 참여한 수정공 함덕립(水亭公 咸德立 -승주·구례·보성 地域의 江陵咸氏一家가 모시는 派先祖)의 墓所 神道碑 設立을 위한 모임을 發起한 바 종제 우현(從弟 宇鉉)과 종순(鐘淳)이 協力하여 卽時 設立하고 碑를 刻하고 이름을 넣다.
이러써 日帝末期에도 倭에 抵抗하는 뜻으로 壬辰倭亂 義兵參戰 戰死者 先朝의 碑를 세워 뜻을 기리다.
한편 江陵咸氏 大同譜編纂 南道有司로 委任되어 任務를 遂行하다.
1934년 : 

        ☞ 地域區民의 모임인 애림계(愛林契)의 長에 被選되다.
한편 죽천리 都門山에 各祭位의 土地가 不足하여 從弟 宇鉉의 協力과 誠意로 沓 40落을 買入하여 보제(補祭)하므로 祖上에 對한 孝를 發揮하다.
1935년 : 

        ☞ 農民들의 모임인 공려회(共勵會)의 長과 식산계(殖産契)의 主事로 被選되어 營農事業을 改善하여 이에 必要한 資金을 조달하다.
1936년 : 

        ☞ 竹山里 6代祖墓祭位의 沓 2筆地와 증조산위(曾祖山位) 土地 沓 1筆地, 전 1筆地, 垈地 1筆地를 買入하여 호제(護祭)하다.
1937년 : 

        ☞ 農民指導上 必要에 依하여 長城郡의 뽕나무農園의 누에치기를 視察하고, 光州의 모범농장(模範農場)과 방직공장(紡織工場), 제사공장(製絲工場) 等을 視察하다.
1938년 : 

        ☞ 外西國民學校 學務委員에 被選되어 3回 連任하였으며 向後 6年間 校務에 힘쓰다.
     3월 : 

        ☞ 水原의 模範農場을 視察하다.
        ☞ 京城(서울)의 박물관(博物館), 百貨店, 여러 工場 等을 視察하다.
        ☞ 開城과 평양(平壤)에서 채종재배법(菜種栽培法)을 視察하고 各種物産地의 一般工場을 視察하면서 各 名勝地를 觀光하다.
        ☞ 新義州에서는 제지공장(製紙工場), 木材工場, 其他 模範生産地를 視察하다.
        ☞ 滿洲 安東에서는 지나박물관(支那博物館)과 重要物資生産工場을 시찰하다. (<註>: 1930年代 우리 나라는 오늘날과 같이 交通이 發達하지 못한 때에 長距離 坊坊曲曲을 여행한다는 것은 經濟的 負擔도 클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으로서는 해내기 어려웠던 일이다. 松庵 선생은 八道江山은 勿論 滿洲까지 누비며 視察旅行을 해낸 것은, 많은 見聞으로 新知識을 쌓아 農民啓蒙을 하겠다는 强한 意志의 人間性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
1939년 : 

        ☞ 學術指導, 講習指導 功勞로 表彰을 받다.
     6월 21일(陰 5월 4일) : 

        ☞ 長孫 東振(그리스도의교회 목사 唱泫 咸泰英의 長子) 태어나다. <註>: 함동진 시인-「문학의즐거움」홈페이지 www.poet.or.kr/hdj 참조. 
1940년 : 

        ☞ 土地開拓優良成績功勞로 表彰을 받다.
☞ 生活諸般奬勵功勞와 子女 10名 模範養育으로 每日新報社主催 優良多産家庭 表彰을 받다.
1941년 :

       ☞ 淸日戰爭으로 四海가 분분(紛紛)하다.
1942년 : 

        ☞ 世界大戰宣戰布告와 포성(砲聲)으로 天下가 진동(振動) 地球의 變動이 일어나 초목금수(草木禽獸)가 다 죽어가고 民間人들은 定處없이 흐터져 방황(彷徨)하는 日帝天下의 無情의 歲月 34年을 지내다.( 註 : 日帝天下에서 굴욕적-屈辱的인 生活의 한탄-恨歎 섞인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 

        ☞ 日帝天下의 戰亂이 빨리 끝나고 太平스런 平和가 오라고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우리 大韓國 곧 새로운 大韓民國의 獨立萬歲 소리가 天地를 振動하니 萬物이 춤을 추며 和答하도다.
1946년 : 

        ☞韓國民主黨에 加入하여 建國運動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
1948년 3월 : ☞ 建國投票區 選擧委員 被選되어 投票를 管理하다. 또한 地域區住民들의 要求에 依하여 地域區農會長에 被選되다.
1949년 : 

        ☞ 本來의 (아호)雅號인 松原을 松庵으로 改號하고 雅號를 따서 長山里12番地 本家 뒷東山 山頂에 松庵亭을 건립하여 子孫들에게 松庵의 意志와 精神을 계승(繼承)토록 하다.
       8월 14일 : 

        ☞ 回甲日에는 子女들이 잔치상을 陳設하고 베푼 헌수(獻壽)에 鄕里의 모든 벗들을 招待하여 술을 돌리며 詩 읊기를 3日間 하고 詩集을 이루니 락광세지성사(樂曠世之盛事 - 세상에 비길 바 없는 가장 즐거움)하다. 또한 장산리 山12番地에 자신의 假墓를 準備, 封墳을 만들고 이로 하여금 門中의 山으로 삼도록 하다.
1950년 2월 : 

        ☞ 農民會長에 被選되다.
       3월 : 

        ☞ 地域區民 要望에 依하여 殖産契主事에 被選되다.
       6월 : 

        ☞ 北韓共産集團의 南侵, 6·25事變 戰爭으로 杜門不出 隱居生活을 하다. 鄕里의 指導者이며 共産黨에 非協助한 罪目으로 장자 창현 함태영 목사(親美波 罪目)와 함께 內務署에 연행되어 收監되는 苦痛을 겪었으나 天運으로, 人心 좋은 善行人 인정되어 풀려나다.
 向後 別世時까지 鄕里의 靑少年들에게 漢學을 敎育하다.
1953년 4월 2일 : 

        ☞ (家族祭日 陰曆3月24日) 午後4時 全羅南道 昇州郡 外西面 長山里 12番地  自宅에서 老患으로 逝去하다.
 
※ 墓所 : 全羅南道 順天市 外西面 長山里 山12番地.
  
◈ 出版物 等에 收錄 內容 
  *1994년「江東글모음집」, 漢詩<世感> 1994. 12. 20  141쪽, 서울강동구청발행
  *「순천문학」가을호 제38집, 漢詩<世感>,<懷古感今>,<閑吟> 1995. 9. 25 144∼146쪽,순천문학동우회발행.
  *「오늘의문학」여름호 제28호, 漢詩<世感> 1994. 6. 1. 70쪽 오늘의문학사발행.
  *「月刊書藝」1994년6월호 제154호, 漢詩<世感> 1994. 6. 1. 月刊書藝社(美術文化院).
  *「大韓民國5千年史-제7권 韓國人物史」<송암함봉표 프로필>1990. 12. 30. 4239쪽.
  *「大韓民國姓氏大譜總覽제6권人物總覽」<송암 함봉표 프로필>1993. 12. 15. 3141쪽.
  *「항일투사열전제2권」추경화저  <송암 함봉표> 1997. 7. 10. 청학사 발행, 화보43쪽, 공적250쪽.
  *「江陵楊根咸氏大同譜제3권 甲子譜」32世 鍾宗(松庵 咸鳳表) 江陵楊根咸氏大宗會發行, 
1987년 2월, 제1권 272쪽, 제3권 671∼673쪽.
  *「문학의즐거움」인터넷에 올림(시인),  www.poet.or.kr <시인 함봉표>로 검색.

(註 ; 이 年譜는 松庵 咸鳳表 志士의 親筆 家乘譜를 土臺로 번역작성(飜譯作成)됨. 또 咸 志
士의 계자 태욱(季子 泰昱)의 證言도 따름.)

1993년8월1일 강릉함씨장산리파선조기록 송암회 함동진 편저

2000. 12. 31. 
 참고 연락처
http://www.poet.or.kr/h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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