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현 함태영 목사의 약력 연보(환원운동 /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수정
본문
(그리스도의교회)
(자료)
창현 함태영 목사 약력(唱泫 咸泰英 牧師 略歷)
● 창현 함태영(1914.5.24∼1983.11.28) 목사의 年譜
◎ 1914년 5월 24일(음력 4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능 함씨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와 김해 김씨 김월림(金月林)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 1919년 (5세 때)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닦음.
◎ 1924년 (10세 때) ☞선친의 독립운동(의병전투 참가 여파 등)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에 쫓기어 가세가 기움.
☞전남 장성에서 구례군 구례면 봉서리로 이주함. 이 때에 생계에 막중한 타격이 있었으나 선친의 독립운동의 뜻은 계속 되었음.
◎ 1931년 (17세 때) ☞7년 후 전라남도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이주함.
☞보통학교를 졸업.
◎ 1932년 (18세 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해 단신 부산으로 가출,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섬.
◎ 1935년 (21세 때) ☞중학을 수료함.
☞건축분야의 미장, 조적. 토목, 조각, 설계 등 기술자가 됨.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러시아 국경지인 마주리 등지에서 2년을 기거함.(일본군징병 징용기피 목적)
◎ 1936년 (22세 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하는 중, 전남 담양에서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한국인 담당 감독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 이를 살해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평안 북도 신의주로 피신함. (동아일보보도)
☞중학교동창친구인 서씨와 함께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해 접근 시도하다가 발각 미수에 그침.
◎ 1937년 (23세 때) ☞평안북도 선천으로 주거지를 옮김.
☞기독교인 하동 정씨 정용옥(鄭觀林과 李鳳女 사이의 장녀)여사와 혼인하고 이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교에 입교함.
◎ 1938년 (24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1939년 (25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 집사 피택.
☞ 6월 21일(음,5월4일) 장남 함동진 출생.
◎ 1941년 (27세 때) ☞일제의 강압적 신사참배거부문제로 감금된 경찰서에서 탈출.
☞담양사건의 추적 등으로 평안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함.
◎ 1944년 (30세 때) ☞단신으로 전라남도 순천시로 피신하여 기독교 신앙인으로 은거했으나 일본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 됨.
◎ 1945년 (31세 때) ☞4월에, 가족들은 평북선천에서 후발(後發)로 순천 외서면 장산리에 귀향.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얻음.
☞순천시에 가옥 한 채를 매입 이주함.
☞해방직후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장로교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시무함.
☞별량면에 임차한 셋방으로 주거를 옮김.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에 사재를 들여 첫 번째의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함.
◎ 1947년 (33세 때)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함.
☞서울 마포 도화동으로 이주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한 정착촌 미군용 천막에 임시기거함.
☞강순명 목사를 도와 월남난민촌 천막학교(공명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주일이면 교회로 사용, 목회와 복음 전도에 힘씀.
☞일본군의 고사포부대 지하 벙커로 옮겨 임시 기거함.
☞벙커의 임시거처를 월남민에게 양보하고 임차한 집으로 거소를 옮김.
☞도화동산 정상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지를 마련, 점포가 달린 주택을 손수 건축하여 이주하고. 점포를 운영 생계를 유지하며 학비를 조달, 새벽마다 판매할 상품을 매입하랴 신학공부하랴 분주함.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운동이 성서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로 학적을 옮김.
☞점포가 달린 주택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야간에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빵을 구어 파는 행상과 임시 구멍가게운영으로 늦깎이 신학공부를 함.
☞본인이 다니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한국신학대학교교장인 함태영(咸台永-심계원 원장 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됨)과 종친으로서 친분을 갖고 아현동 댁에 자주 들러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으나 그분이 제의한 공직자리는 사양함.
◎ 1948년 (34세 때) ☞10월 19일「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 직전에 서울로 이주하여 화를 면함(순천 별량면에 거주 당시, 주민과 신도들 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어 항상 이상한 낌새가 돌았고, 교인의 일가족이 예수 믿고 반동자가 되었다고, 공산주의자의 방화에 의해 몰사한 사건도 있었음. 공산주의자 중 신앙심을 갖고 교화된 신도는 함태영 목사에게 어떤 어려운 사건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라는 귀띰도 주었다 함. 신도 중에서 경찰에 연행된 공산주의자는 경찰을 설득하여 인도 받아 책임지고 교화시킴.)
☞중학동창이며 압록강철로절단미수에 동행한 서씨는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도화동에 있는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린치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었음. 그의 자녀들은 창현의 가족들과 함께 6·25전쟁피난 시 한강을 도강한 후, 노량진 부근 백사장에 이르러 한강철교에 투하되는 폭탄의 화염 속에서 생사를 모르는 채 헤어짐.
◎ 1950년 (36세 때) ☞창현은 6·25 전쟁으로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단신으로 전남 순천 외서면으로 본가로 피난하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 별도로 피난함
☞초등학교 친구인 공산주의자의 밀고에 의해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외서면 내무서에 투옥 옥고를 치룸.
☞부친 송암 함봉표의 선행 덕분에 죄목을 붙이지 않고, 밤중 남 몰래 풀려나 숲 속의 토굴에 은신 두문불출함.
☞부인 정용옥 여사 역시 38선을 넘어 월남한 동생들을 만나려다 순천 해룡면 내무서에 체포되어 갔으나 감시소홀을 틈타 탈출함.
☞공산주의자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단신 부산으로 옮겨 기독신보사 파견, 국방부정훈국 소속 선무원으로 종군함.
☞종군 선무원으로서 군복을 입고 벌교에 야간 잠입하든 중 선박 내에서 빨치산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기지로서 탈출에 성공 죽음을 면함.
☞수복과 동시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 서병렬(徐炳烈) 목사 댁으로 임시주거지를 옮김.
◎ 1951년 (37세 때) ☞김은석 목사를 비롯하여 창현 함태영, 이신, 최요한, 김재순, 장주열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
☞창현 함태영 목사는 사재를 들여,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함.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이신 목사를 환원운동에 동참케 한 데에는 함태영 목사와의 교유에 의한 것임.),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함.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재정적 후원으로 신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됨.
☞가을,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함.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함.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김.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함.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였음.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함.
◎ 1953년 (39세 때)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주택을 기증하여 현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를 창립 개척하는데 도움을 줌.
☞3월 24일(음), 유림이면서도 환원운동과 복음전도에 물심양면 아낌없이 지원하시던 부친 송암 함봉표께서 서거하심.(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6월 18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측이 모르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므로 논산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의 총격을 받고 탈주한, 겁먹은 5명의 포로를 국가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의식주를 제공 보호함.
☞7월 13일(음 6월4일), 복음전도의 동반자인 아내 정용옥(鄭龍玉) 여사가 급환으로 소천(32세 요절, 1921년∼1953년)되어 시련이 따름.(묘소: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
☞종군을 하였던 관계로 인연이 있는 미8군과 교섭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도강이 어려운 시기에 교역자들에게 도강이 쉽도록 알선 편의를 제공함.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 숭실중학교 교장과 학교 교목을 역임함.
◎ 1955년 (41세 때)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 졸업.
◎ 1957년 (43세 때) ☞이리시로 주거를 옮김.
☞이리시에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김.
☞전주 금암동에 주택 한 채를 손수 건축함.
☞전주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 1세대 분 주택을 매입 이주함.
☞인후동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반공포로 정착촌 의무실을 운영하며.)
◎ 1958년 (45세 때) ☞전주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재 전주시편입)에 100여 평의 대형건물을 매입 용진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원광대학교에 다니는 장남 동진(군입대시 까지)과 함께 약종상(藥種商-제약회사에서 포장되어 출하된 완제품만 판매)경영.
◎ 1962년 (49세 때) ☞대전시 가오동에 손수 협소한 집을 짓고 주거를 옮김.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림.
☞불럭공장을 운영, 손수 시멘트 불럭을 찍어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며 시련을 겪음.
☞생활안정에 도움이 된다할지라도 교파주의는 배격하고. 오직 환원교회만을 선택 고집스레 고수하였음.
◎1963. 12 전주그리스도의 교회(전주시 경원동 3가 37번지 조주희 집사 설립) 제1대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 부임, 1964. 03 사임
◎ 1964년 (50세 때)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
☞충북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함.
◎ 1974년 (60세 때) ☞논산 대명중학교 창립20주년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황금기념메달을 받음.
◎ 1975년 (61세 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장남 함동진의 집에서 동료 목회자인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 목사, 박정훈, 백○○ 장로, 김경옥 부평보육원 원장 등과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여 조출한 회갑연을 베품.
◎ 1980년 (66세 때) ☞노환으로 목회직을 은퇴함.
◎ 1983년 (69세 때) ☞대전시 가오동 자택에서 11월 28일 01시 30분 소천함. (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 인쇄물 등 수록내용
*「조선일보」인터넷 DB(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수록 www.hidb.co.kr 또는 www.chosun.com 의 hiDB 인물정보 함태영(咸泰英).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WHO'S WHO IN KOREA)」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가나다 順, "함태영"항. 中央日報創刊30週年記念 出刊.
*「대한민국5천년사 제7권 한국인물사」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0. 12. 30. 803쪽.
*「대한민국성씨대보총람 제6권 인물총람」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3. 12. 15. 3142쪽.
*「강능양근함씨대동보 제3권」갑자보 32世 英柱 (咸泰英-唱泫) 1987년 2월, 강능양근함씨대종회, 제1권 272쪽, 제3권 671∼673쪽.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나의 아버지 밀알로 썩다 -창현 함태영 목사>,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한 알의 겨자씨앗이 복음의 큰 그늘을 이루다 -우리 가문의 기독교로의 개종 내력>,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詩 <사부곡-思父曲> 및 <사모화-思母花> 올림.
* 고 창현 함태영 목사의 子 함동진의 연락처
www.poet.or.kr/hdj 게시판 및 방명록
hdj@poet.or.kr
hamdongjin@hanmail.net
(자료)
창현 함태영 목사 약력(唱泫 咸泰英 牧師 略歷)
● 창현 함태영(1914.5.24∼1983.11.28) 목사의 年譜
◎ 1914년 5월 24일(음력 4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강능 함씨 송암 함봉표(松庵 咸鳳表)와 김해 김씨 김월림(金月林)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 1919년 (5세 때) ☞선친 송암 함봉표께서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닦음.
◎ 1924년 (10세 때) ☞선친의 독립운동(의병전투 참가 여파 등)으로 일본 경찰과 헌병에 쫓기어 가세가 기움.
☞전남 장성에서 구례군 구례면 봉서리로 이주함. 이 때에 생계에 막중한 타격이 있었으나 선친의 독립운동의 뜻은 계속 되었음.
◎ 1931년 (17세 때) ☞7년 후 전라남도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이주함.
☞보통학교를 졸업.
◎ 1932년 (18세 때) ☞중학과정을 닦기 위해 단신 부산으로 가출, 고학으로 면학의 길에 들어섬.
◎ 1935년 (21세 때) ☞중학을 수료함.
☞건축분야의 미장, 조적. 토목, 조각, 설계 등 기술자가 됨.
☞만주의 봉천, 태래, 지하자루 및 러시아 국경지인 마주리 등지에서 2년을 기거함.(일본군징병 징용기피 목적)
◎ 1936년 (22세 때) ☞전라남도 광주를 잠시 경유하는 중, 전남 담양에서 한국인을 학대하는 일본인 감독을, 한국인 담당 감독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 이를 살해 담양사건을 일으킴으로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고 평안 북도 신의주로 피신함. (동아일보보도)
☞중학교동창친구인 서씨와 함께 압록강 철교의 철로를 절단키 위해 접근 시도하다가 발각 미수에 그침.
◎ 1937년 (23세 때) ☞평안북도 선천으로 주거지를 옮김.
☞기독교인 하동 정씨 정용옥(鄭觀林과 李鳳女 사이의 장녀)여사와 혼인하고 이의 전도에 의하여 기독교에 입교함.
◎ 1938년 (24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에서 독립운동가 백영력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1939년 (25세 때) ☞평안북도 선천 북교회 집사 피택.
☞ 6월 21일(음,5월4일) 장남 함동진 출생.
◎ 1941년 (27세 때) ☞일제의 강압적 신사참배거부문제로 감금된 경찰서에서 탈출.
☞담양사건의 추적 등으로 평안북도 압록강 주변인 자성군으로 피신 후 만포진과 만주 삼강진 등으로 옮겨 은거생활로 2년을 기거함.
◎ 1944년 (30세 때) ☞단신으로 전라남도 순천시로 피신하여 기독교 신앙인으로 은거했으나 일본경찰의 추적에 적발되어 투옥 됨.
◎ 1945년 (31세 때) ☞4월에, 가족들은 평북선천에서 후발(後發)로 순천 외서면 장산리에 귀향.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얻음.
☞순천시에 가옥 한 채를 매입 이주함.
☞해방직후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장로교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시무함.
☞별량면에 임차한 셋방으로 주거를 옮김.
☞전라남도 승주군 별량면에 사재를 들여 첫 번째의 개척교회(장로교회)를 설립함.
◎ 1947년 (33세 때)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함.
☞서울 마포 도화동으로 이주하여 38선을 넘어 월남한 정착촌 미군용 천막에 임시기거함.
☞강순명 목사를 도와 월남난민촌 천막학교(공명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주일이면 교회로 사용, 목회와 복음 전도에 힘씀.
☞일본군의 고사포부대 지하 벙커로 옮겨 임시 기거함.
☞벙커의 임시거처를 월남민에게 양보하고 임차한 집으로 거소를 옮김.
☞도화동산 정상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대지를 마련, 점포가 달린 주택을 손수 건축하여 이주하고. 점포를 운영 생계를 유지하며 학비를 조달, 새벽마다 판매할 상품을 매입하랴 신학공부하랴 분주함.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 2년 수료 후 그리스도의교회의 환원 운동이 성서적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인 서울성서신학교(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로 학적을 옮김.
☞점포가 달린 주택이 완성되기까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야간에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을 맞아가며 빵을 구어 파는 행상과 임시 구멍가게운영으로 늦깎이 신학공부를 함.
☞본인이 다니고 있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한국신학대학교교장인 함태영(咸台永-심계원 원장 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됨)과 종친으로서 친분을 갖고 아현동 댁에 자주 들러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으나 그분이 제의한 공직자리는 사양함.
◎ 1948년 (34세 때) ☞10월 19일「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 직전에 서울로 이주하여 화를 면함(순천 별량면에 거주 당시, 주민과 신도들 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있어 항상 이상한 낌새가 돌았고, 교인의 일가족이 예수 믿고 반동자가 되었다고, 공산주의자의 방화에 의해 몰사한 사건도 있었음. 공산주의자 중 신앙심을 갖고 교화된 신도는 함태영 목사에게 어떤 어려운 사건이 있을지 모르니 떠나라는 귀띰도 주었다 함. 신도 중에서 경찰에 연행된 공산주의자는 경찰을 설득하여 인도 받아 책임지고 교화시킴.)
☞중학동창이며 압록강철로절단미수에 동행한 서씨는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도화동에 있는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린치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었음. 그의 자녀들은 창현의 가족들과 함께 6·25전쟁피난 시 한강을 도강한 후, 노량진 부근 백사장에 이르러 한강철교에 투하되는 폭탄의 화염 속에서 생사를 모르는 채 헤어짐.
◎ 1950년 (36세 때) ☞창현은 6·25 전쟁으로 한강철교가 폭파되기 전 단신으로 전남 순천 외서면으로 본가로 피난하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 별도로 피난함
☞초등학교 친구인 공산주의자의 밀고에 의해 기독교인 및 친미파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외서면 내무서에 투옥 옥고를 치룸.
☞부친 송암 함봉표의 선행 덕분에 죄목을 붙이지 않고, 밤중 남 몰래 풀려나 숲 속의 토굴에 은신 두문불출함.
☞부인 정용옥 여사 역시 38선을 넘어 월남한 동생들을 만나려다 순천 해룡면 내무서에 체포되어 갔으나 감시소홀을 틈타 탈출함.
☞공산주의자들의 감시의 눈을 피하여 단신 부산으로 옮겨 기독신보사 파견, 국방부정훈국 소속 선무원으로 종군함.
☞종군 선무원으로서 군복을 입고 벌교에 야간 잠입하든 중 선박 내에서 빨치산에 의해 포위되었다가 기지로서 탈출에 성공 죽음을 면함.
☞수복과 동시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 서병렬(徐炳烈) 목사 댁으로 임시주거지를 옮김.
◎ 1951년 (37세 때) ☞김은석 목사를 비롯하여 창현 함태영, 이신, 최요한, 김재순, 장주열이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
☞창현 함태영 목사는 사재를 들여,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함.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감리교신학대학 출신인 이신 목사를 환원운동에 동참케 한 데에는 함태영 목사와의 교유에 의한 것임.),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함.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재정적 후원으로 신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됨.
☞가을,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함.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함.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함.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김.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함.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였음.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함.
◎ 1953년 (39세 때)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주택을 기증하여 현 도원동그리스도의교회를 창립 개척하는데 도움을 줌.
☞3월 24일(음), 유림이면서도 환원운동과 복음전도에 물심양면 아낌없이 지원하시던 부친 송암 함봉표께서 서거하심.(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6월 18일 0시를 기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측이 모르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므로 논산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의 총격을 받고 탈주한, 겁먹은 5명의 포로를 국가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의식주를 제공 보호함.
☞7월 13일(음 6월4일), 복음전도의 동반자인 아내 정용옥(鄭龍玉) 여사가 급환으로 소천(32세 요절, 1921년∼1953년)되어 시련이 따름.(묘소: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3구 아개울방죽마을 뒷산 공동묘지)
☞종군을 하였던 관계로 인연이 있는 미8군과 교섭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도강이 어려운 시기에 교역자들에게 도강이 쉽도록 알선 편의를 제공함.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로 이주 숭실중학교 교장과 학교 교목을 역임함.
◎ 1955년 (41세 때)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 졸업.
◎ 1957년 (43세 때) ☞이리시로 주거를 옮김.
☞이리시에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김.
☞전주 금암동에 주택 한 채를 손수 건축함.
☞전주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 1세대 분 주택을 매입 이주함.
☞인후동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반공포로 정착촌 의무실을 운영하며.)
◎ 1958년 (45세 때) ☞전주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재 전주시편입)에 100여 평의 대형건물을 매입 용진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시무
☞원광대학교에 다니는 장남 동진(군입대시 까지)과 함께 약종상(藥種商-제약회사에서 포장되어 출하된 완제품만 판매)경영.
◎ 1962년 (49세 때) ☞대전시 가오동에 손수 협소한 집을 짓고 주거를 옮김.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림.
☞불럭공장을 운영, 손수 시멘트 불럭을 찍어 생산하는 중노동을 하며 시련을 겪음.
☞생활안정에 도움이 된다할지라도 교파주의는 배격하고. 오직 환원교회만을 선택 고집스레 고수하였음.
◎1963. 12 전주그리스도의 교회(전주시 경원동 3가 37번지 조주희 집사 설립) 제1대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 부임, 1964. 03 사임
◎ 1964년 (50세 때) ☞충북 부강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
☞충북 남일면 방서리그리스도의교회에서 시무함.
◎ 1974년 (60세 때) ☞논산 대명중학교 창립20주년기념일에 설립자에 대한 공로표창과 황금기념메달을 받음.
◎ 1975년 (61세 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장남 함동진의 집에서 동료 목회자인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 목사, 박정훈, 백○○ 장로, 김경옥 부평보육원 원장 등과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여 조출한 회갑연을 베품.
◎ 1980년 (66세 때) ☞노환으로 목회직을 은퇴함.
◎ 1983년 (69세 때) ☞대전시 가오동 자택에서 11월 28일 01시 30분 소천함. (묘소: 순천시 외서면 장산리 산12 선영)
◈ 인쇄물 등 수록내용
*「조선일보」인터넷 DB(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수록 www.hidb.co.kr 또는 www.chosun.com 의 hiDB 인물정보 함태영(咸泰英).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WHO'S WHO IN KOREA)」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가나다 順, "함태영"항. 中央日報創刊30週年記念 出刊.
*「대한민국5천년사 제7권 한국인물사」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0. 12. 30. 803쪽.
*「대한민국성씨대보총람 제6권 인물총람」창현 함태영 목사 프로필, 1993. 12. 15. 3142쪽.
*「강능양근함씨대동보 제3권」갑자보 32世 英柱 (咸泰英-唱泫) 1987년 2월, 강능양근함씨대종회, 제1권 272쪽, 제3권 671∼673쪽.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나의 아버지 밀알로 썩다 -창현 함태영 목사>,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수필 <한 알의 겨자씨앗이 복음의 큰 그늘을 이루다 -우리 가문의 기독교로의 개종 내력>, 2000. . . 올림.
* 인터넷「문학의즐거움」www.poet.or.kr/hdj 함동진의 詩 <사부곡-思父曲> 및 <사모화-思母花> 올림.
* 고 창현 함태영 목사의 子 함동진의 연락처
www.poet.or.kr/hdj 게시판 및 방명록
hdj@poet.or.kr
hamdong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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