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닝햄의 사역에 동참했던 성결교 출신 목회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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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한국에서 독립 기독교회 선교사 윌리엄 D. 커닝햄의 조선인 기독교회 사역에 동참했던 성결교 출신 목회자들
Holiness Church-trained pastors who collaborated with Independent Christian Churches missionary William D. Cunningham in establishing Korean Christian Churches in Japan and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도쿄 요츠야 기독교회 선교부에 의해서 처음으로 도쿄와 한국에 세워질 당시인 1923-41년 사이에 윌리엄
D.
커닝햄 선교사
부부에 고용되어 사역했던 목회자들의 대다수가 성결교출신이었다.
그들 가운데
이인범,
이원균,
김상준,
주정국,
윤낙영,
이성영,
신신근 등이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배후에 이인범 목사가 있었다.
또 성결교
출신은 아니지만,
윌리엄 커닝햄에
고용되어 횡빈(요코하마)조선기독교회와 ‘동경사곡(요츠야)선교회 기독교회’의 초대 조선포교관리자였던 성낙소도
성결교 목사 곽재근의 추천서를 받아 1920년 8월부터 1922년 3월까지 죽첨정에 소재한 경성성서학원에서
수학하였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창시자들 가운데 한분이었던 김상준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분들이 남긴
교회들의 흔적으로는 도쿄 미카와시마 동경복음교회,
인천
송현성결교회,
인천제일교회(장로교 통합)가 있다.
이인범은 성낙소에 이어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의 제2대 포교관리자가 된 직후, 여러 차례 변경계와 폐지계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신고하여 성낙소와 김문화의 업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이후 교단 명칭을 ‘기독교회 조선선교회’로 변경하고 자신을 제1대 포교관리자로, 신신근을 제2대 포교관리자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에 소속되었던 교회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들 가운데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북한 지역에 세워졌던 교회들은 남북 분단으로 인해 존폐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남한에 세워진 교회들 가운데서는 인천송현성결교회와 인천제일교회(장로교 통합)의 교회사 기록을 통해서만 이들 교회가 과거 기독교회 조선선교회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5월 일제의 강압으로 인천 금곡동교회와 유동(화정)교회가 송현기독교회에 병합되었고, 신신근이 별세한 지 8일 뒤인 1946년 12월 10일 송현기독교회는 인천송현성결교회로 재건되었다. 또한 1945년 11월 송현기독교회에서 분리되어 정삼선이 시무했던 또 하나의 교회는 이후 인천제일장로교회(통합)로 재건되었다.
조선인 기독교회들 가운데 전후에 유일하게 재건된 삼하도(미카와시마)교회는 1960년 6월 요츠야 선교부로부터 재산을 양도받은 뒤, 1969년 8월 명의를 변경하여 초교파적 성격의 동경복음교회로 발전하였다.
우리가 이분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기려하는 목적은 우리가 지나온 다리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그 다리를 세워 준 선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찰리 웨인 킬패트릭(Charlie Wayne Kilpatrick)이 말했듯이,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We are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거인들은 자신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오직 성경말씀 위에 선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 온 분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짊어진 십자가에 의지한다(We rely on the cross that someone else has carried.) 우리가 주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회가 이 만큼 성장해 온 것은 누군가가 짊어졌던 십자가 덕분이다. 시몬이 골고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자들이다.
거인들이 짊어졌던 십자가를 통해, 그리고 그들이 놓아 온 디딤돌과 세워 온 다리를 통해, 또 우리가 놓을 디딤돌과 세울 다리를 통해 과거 세대와 다음 세대를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한국에서 독립 기독교회 선교사 윌리엄 D. 커닝햄의 조선인 기독교회 사역에 동참했던 성결교 출신 목회자들에 어떤 분들이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성결교회 목회자들이 요츠야 기독교회 선교부에서 목회자로 섬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대략 네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일제 강점기에 생활이 어렵던 목회자들이 먼저 발을 디딘 이인범 목사 등의 권유를 받았을 때 선뜻 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요츠야 선교부가 매월 지급하는 급여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돈은 아니었을지라도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급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인 목회자들과 조선인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요츠야선교부에 소속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도 월급을 받았다.
둘째, 모두는 아니었더라도 일부는 신약성경교회 회복운동에 공감했고 필요한 개혁운동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커닝햄이 조선의 여호수와 혹은 조선의 알렉산더 캠벨이라 칭한 이인범과 조선의 갈렙 혹은 조선의 발톤 스톤이라 칭한 이원균도 마찬가지였다. 이인범이 요츠야선교부에 보낸 마지막 편지가 ?도쿄 크리스천? 1941년 2월호에 실렸는데, 그 글에서 이인범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주님께 신실하겠으며, 죽을 때까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심적으로든 확신으로든 신약성경교회 회복운동인 무교파 ‘기독교회’(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에 크든 작든 공감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로 보인다.
셋째,
성결교회가 창립
초기에 교파나 교단으로 제도화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점도 목회자 이탈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정빈은 복음전도관이 교파로 발전하는 것에 반대하여 1914년 4월 22일 목사 안수식 때 안수를 받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이 문제로 김상준과 의견충돌을
빚었다.
이후
복음전도관이 1921년 9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단으로 재편되자 정빈은 사직하고
북간도로 떠났다.
목사안수를
받았던 김상준 역시 1917년에 사직하여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떠났고,
이후 비교파
초교파적 부흥목사로 활동하였다.
호주성산성결교회
임운규 목사는 이들이 성결교회를 떠난 이유를 ‘동양선교회’의 비교파적 정신을 버리고
“기존 교단들과 같이 목사라는 성직제도와
교단조직을 가진 기존 교단,
즉 제도화된
전통교회의 성격을 지니게”
된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한국성결교회의 개척자 김상준과
정빈,”
Daum 카페;
크리스천투데이).
또한 김상준
목사가 일본의 ‘비교파’(non-denominational),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s
only), ‘신약성서교회’(New
Testament Church)를 표방하는
기독교회(그리스도의 교회)의 초빙을 받아드려
1931년 7월 1일부터 1933년 3월까지 동경
삼하도(미카와시마)조선인기독교회를 섬긴
것도,
그가 이러한
비교파적 신앙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일제 말기에 일부 성결교회 목회자들이 타 교단에서 사역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1943년 12월 31일 성결교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일괄 포교폐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 관보? 제 5111호, 13면).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 신고한 형제교단들에는 세 개 곧 ‘기독교회 조선선교회(전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 ‘기독교회’ 그리고 ‘기독의교회’(基督の敎會)가 있었는데, 이 세 형제들 가운데 ‘기독교회’(현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와 총회)는 성결교회보다 만 6개월 뒤인 1944년 6월 30일 일괄 포교폐지 처분을 받았다(?조선총독부 관보? 제5306호 1면, 제5352호 5면, 제5387호 3면).
소속 교단이 강제로 포교활동을 중지당한 이후 목회자들의 선택은 크게 갈렸다. 일부는 위험을 감수하고 지하교회로 활동을 지속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목회를 중단하거나, 포교폐지를 당하지 않은 타 교단으로 옮겨 사역을 이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전체적으로 당시의 포교폐지 조치는 교단의 존속뿐 아니라 목회자 개인의 사역 방향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조선인 기독교회 사역에 동참했던 성결교 출신 목회자들
이인범 목사
https://kccs.info/이인범 목사.pdf
이원균 목사
https://kccs.info/이원균 목사.pdf
김상준 목사
https://kccs.info/김상준 목사.pdf
신신근 목사
https://kccs.info/신신근 목사.pdf
주정국 목사
https://kccs.info/주정국 목사.pdf
윤낙영 목사
https://kccs.info/윤낙영 목사.pdf
이성영 목사
https://kccs.info/이성영 목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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