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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탄생과 이크투스(마 1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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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372 2005.12.16 08:28

본문


예수님 탄생과 이크투스(마 12:38-40)

지난 주일에 ‘예수님 탄생과 등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막에 놓였던 등대의 실체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참 빛, 곧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들은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죽음에 그늘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탄생과 물고기’가 주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헬라어 이크투스(ichthus)는 물고기란 뜻이며, 십자가(✝)가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를 잡기이전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사용됐던 상징입니다. 이크투스(ichthus) 다섯 글자는 각각 '예수'(i), '그리스도'(ch), '하나님의'(th), '아들'(u), '구세주'(s)의 첫 자에 해당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물고기 몸통에 이 헬라어 대신에 ‘예수'(Jesus)라는 글자를 넣거나 글자 없이 그냥 물고기 표시만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에 반발하는 반기독교인들, 특히 진화론자들은 아래와 같은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기독교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물고기는 몸통에 다리나 등에 지느러미를 그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몸통에 '다윈'(darwin), '이교'(Pagan), '사단'(Satan), '마귀'(Devil), '죄인'(sinner) 등의 글자를 넣고 있으며, 기독교의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제압하는 상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상어(shark)를 상징으로 삼기도 합니다. 등에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상어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삼켜버린다는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 표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과 ‘이크투스’ 곧 물고기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이크투스’ 곧 물고기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물고기 표시를 달고 다니는 행위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이크투스’와 연관성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크투스’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바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탄생이 없다면, 물고기는 그저 물고기일 뿐이고, 우리에게 아무런 구원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그저 물고기일 뿐이고, 우리에게 아무런 구원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복음서에 실린 물고기와 관련된 말씀들을 보면, 사복음서 모두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있고, 마가복음 1장 17절에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5장 6절과 요한복음 21장 6절에 잡은 고기가 심히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고, 그물을 들 수 없었다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을 낚는 어부와 잡은 고기가 많았다는 말씀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잡은 고기가 많았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에 도달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고기와 관련된 복음서의 말씀들을 고려해볼 때, 물고기는 확실히 죽음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둘째, 물고기는 요나의 표적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요나의 표적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구약성경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나 표적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굴 무덤에 장사되어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메시아이심을 입증한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요나 표적의 실체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의 상징인 물고기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물고기가 예수님의 탄생과 연관이 있는 것은 성탄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부활에 대한 소망도 있을 수 없고, 영생에 대한 소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 부활사건의 모형이요, 그림자요, 예표에 불과한 요나의 표적은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나 표적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그림자요, 모형이며, 예표에 불과한 것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요나 표적의 실체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물고기는 참 메시아의 상징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온 것처럼, 우리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사실의 상징이며, 예수님이 바로 인류가 고대하던 메시아란 사실의 상징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를 그들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천4백만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불과 2-3만 명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찾았던 표적과 예수님이 제시한 표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행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거짓 메시아인지 참 메시아인지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2세기 초의 발 코크바와 17세기 중반의 샤베타이 제비를 비롯해서 역사상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가 30여명이 넘는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짓 메시아가 많았다는 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행하는 자라야만이 참 메시아다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이 세례 요한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을 보려간 것은 그가 메시아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메시아인가를 확인해줄 표적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마태복음 12장 38-40절은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은 요나의 표적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표적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와도 연관이 있는데, 연결고리는 ‘표적’이란 단어입니다. 본문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고,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처럼, 혹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한 것처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에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내리는 큰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과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물고기의 등장입니다. 물고기는 요나의 표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또 무슨 다른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2-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독점과 비호아래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시고, 청소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성격을 띤 이런 과격한 행동들에 대해서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주문하였습니다. 이와 연관된 말씀들이 사복음서에 적지 않게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 성구로써는 마태복음 12장 38절, 16장 1절, 마가복음 8장 11절, 누가복음 11장 16절 등이 있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2장 39절, 16장 4절, 누가복음 11장 29절, 고린도전서 1장 22절 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많은 표적들을 행해 보이셨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20개씩, 마가복음 18개, 요한복음에 7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모두가 다 그분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표적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이었다기보다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오매불망하며 기다렸던 하늘로써 내린 표적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표적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요한복음 12장 37절의 말씀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던” 사람들까지도(2:23) 그들이 표적을 구한 목적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르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막 8:33).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6:26)고 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을까요?
진정한 메시아는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의식주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는 인류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의식주문제, 곧 사람의 일을 위해서 메시아를 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없이 많은 표적들을 보고서도 그들은 그분이 메시아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보류한 채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천 년 전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빵과 고기를 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표적이 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위한 표적, 곧 빵과 고기를 위한 표적을 찾지만, 이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요나의 표적이 참 메시아 됨을 증명하는 표적이란 것을 압니다. 어둠에서 벗어나고, 혼돈에서 안정을 찾고,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진정한 길이 먹고 배부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일(정치, 군사), 빵의 문제(경제)를 해결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과 관심은 세상의 일이나 빵을 주기 위한 육신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 곧 영생의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아 왕을 삼으려하는 유대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인 ‘이크투스’ 곧 물고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이며, 부활의 상징이고, 참 메시아의 상징입니다. 이크투스가 상징하는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과 관심은 세상의 일이나 빵을 주기 위한 육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복음의 일, 살림의 일, 생명의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크투스’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바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일과 육신의 일에 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 복음의 일, 살림의 일, 생명의 일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세상의 일도 중요하고, 빵의 문제도 심각하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위해 사는 것은 영생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썩는 양식만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존재나 삶의 의미를 이 땅에 두지 말고 저 높은 곳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임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다 그분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탄과 물고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믿음’과 ‘부활’과 ‘영생’입니다. 성도님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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