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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의 조건에 관해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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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196 2006.05.25 11:48

본문

선민의 조건에 관해서
On Conditions of the Elect


조동호(한민대학교 신학과 교수)

목차

들어가는 말
1. 본향을 생각함
2. 말씀사랑
3. 기도생활
4. 안식일성수
5. 가정생활
6. 신앙교육
7. 절기축제
나오는 말
참고자료

들어가는 말

‘선민’이란 선택된 민족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자긍심이 바로 이 선민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대인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선민사상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과거 수천 년 동안 그들의 이 선민사상 때문에 타민족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아왔던 민족이다. 이런 시련이 그들을 더욱 뭉치게 했고, 강한 연대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기반을 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 유대인들을 ‘옛 선민’이란 뜻으로 ‘구약공동체’라고 말한다. ‘구약공동체’란 ‘옛 언약 공동체’란 뜻인데, 유대인들은 이제 과거의 선민이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신약’이란 말은 ‘새 언약’이란 뜻이고, ‘교회’는 ‘새 언약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우리 기독교가 ‘새 언약 공동체’이고, 진정한 의미의 선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우리가 새 언약 공동체요, 선민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과연 선민의 자격이 있는지, 선민의 가치가 지나치게 평가절하된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전에는 로마시민권을 갖는 것이 일종의 특권이었고, 로마시민권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노력이 있어야했다. 그러던 것이 주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아누스 칙령’으로 누구나 로마제국의 시민이면, 로마인이든, 속주민이든 상관없이 시민권을 갖게 되니까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게 돼서 좋긴 했는데, 시민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로마제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되었던 것이다.[각주1]
뜻있는 기독교인들이 심히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의 복음전파로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양반이나 상놈의 구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은 매우 좋은데, 자칫 값싼 은혜로 전락하여 복음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결과를 가져와 기독교의 쇠퇴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인구는 세계 여러 곳에서 줄어들고 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선민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유대인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들은 ‘Judaism 101’ 홈페이지[각주2]의 영문 자료들을 번역함으로써 얻었음을 밝혀둔다.

1. 본향을 생각함[각주3]

오늘날 유대교의 대부분의 가르침과 또 축일과 예배에 따른 전통들은 길게는 2500년, 짧게는 1900여년이나 된 아주 오랜 것들이다. 예를 한 가지 들면,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데, 아침(Shacharit), 오후(Minchah) 그리고 저녁(Ma'ariv)에 한다. 이 때 하는 기도인 ‘쉐모네 에스레이’(Shemoneh Esrei)[각주4]라 부르는 18개(성전멸망 후 1개가 추가되어 현재는 19개)의 기도는 25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동일하게 해온 기도이다. 신약성서에는 이 세 번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신 시간도 바로 이들 기도시간이었다.[각주5]
유대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약속의 땅 가나안 본향을 생각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들은 회당을 건축할 때 반드시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짓는다. 기도할 때에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다.
3800여 년 전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들의 오랜 숙원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사는 것이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한 처음 3-4백년간은 그런대로 숙원이 풀린 듯싶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주전 931년) 국가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그 후 200여년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2730여 년 전인 주전 722년에 앗수리아 제국에 완전히 망해버렸고, 남왕국 유다도 2600여 년 전인 주전 586년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고 쓸 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짧게는 70년, 길게는 173년, 더 길게는 아예 그곳에서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이어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회개운동을 펼쳤고, 회복운동, 곧 메시아사상을 발전시켰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회당을 짓고,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루 세 번씩 드리는 쉐모네 에스레이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본토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은 2세대부터 5-6세대의 사람들에게 이뤄져, 최초로 주전 537년에 본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토록 곤란한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성전재건이었고, 20년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주전 516년).
그 후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국 땅에 와서 살게는 되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제국과 헬라제국의 지배를 거쳐 예수님 때인 로마제국의 지배까지 무려 6-7백여 년 동안이나 외세에 눌려 살아야했다. 그 사이에 남의 나라에 나가 사는 유대인이 4백만 명이 넘게 되었다.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이 70여만 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나가 사는 사람들이 6배나 더 많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14백만 유대인들 가운데 6백만 명이 본토에 살고 있고, 또 다른 5백만 명이 미국에 살고 있고, 나머지 3백만 명이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 살고 있다. 여전히 남의 나라에 사는 유대인이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수적으로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 당시 이스라엘에는 두 번의 독립전쟁이 있었다. 첫 번째가 66-70년까지의 전쟁으로써 유대인들이 패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초토화가 되었다. 이때부터 성전은 영구히 사라졌다. 그리고 주후 132-135년까지 있었던 또 한 번의 독립전쟁의 실패로 모든 유대인들이 본토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지 1878년만이었다. 그야말로 감격과 감동의 순간이었다. 기쁨의 함성이 천지를 울렸고, 기쁨의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유대인들은 그 긴 세월 동안 가나안 땅, 본향에 대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들은 2500년 넘게 매일 세 번씩 이런 기도를 드렸다.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 거대한 쇼파르(양각나팔)를 울리게 하소서. 우리들의 유배생활로부터 모일 수 있도록 깃발을 올리게 하옵소서. 지구 곳곳으로부터 우리들을 함께 모이게 하옵소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는 하쉠 당신이시여, 복을 받으시옵소서.[각주6]

또 매년 춘분 지나고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 밤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랍비들 가운데는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한 민수기 33장 53절에 의지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취하고, 거기서 사는 것이 계명이라고 선언해왔다. 또 탈무드는 그 땅 자체가 매우 거룩해서 거기서 걷기만 해도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적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밖에서의 삶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면서 그러한 삶을 유배생활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이스라엘 땅에로 돌아가게 될 것이란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 희망은 ‘하티크바’(Ha-Tikvah, 희망)에 표현되고 있다. 이 ‘하티크바’는 시온주의자들의 운동가이자 이스라엘 나라의 국가(國歌)이기도 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 속 깊이만큼 오랫동안 유대인의 영혼은 따스하다.
그리고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각주7]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로 이주한다.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알리야’(aliyah)라 하는데 문자적으로 ‘오름’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시온에 오른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한 예로 러시아 한 나라에서만 이스라엘로 이주한 ‘알리야’의 수가 1998년에 1만4천 명, 1999년에 3만 명, 2000년 2만 명에 이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주에는 러시아의 경제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그간 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본토에 이주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고달픈 삶일 텐데도 그들은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시온에 오름’(ascension to Zion)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향에 대한 집념, 이것이 바로 선민이 되는 첫째 조건이다.

2. 말씀사랑

유대인들의 기도문 가운데 ‘쉐마’(Shema)라는 것이 있다. 쉐마는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그리고 민수기 15장 37-41절로 이뤄진다. 기독교인들은 이 쉐마의 말씀을 교훈적으로 받아드리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드려 실천하고 있다.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다. 신명기 6장 4-9절이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7절, 8절, 9절을 문자적으로 실천하는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고, 강론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또 유대인들은 쉐마의 말씀을 잘 실천하기위해서 ‘트필린’이라 불리는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끈으로 그들의 손이나 이마에 붙인다. 또 ‘메주자’라 불리는 칼집형태의 말씀상자를 만들어 집안 문설주 옆에 부착해 놓고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세 번씩 이 메주자에 입을 맞춘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토록 사모하고, 계명대로 살려는 유대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행위들이다. 신명기 11장 13-21절이다.

[13]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17]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21]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18-20절은 앞에서 읽었던 6장 4-9절의 말씀과 같기 때문에 생략했다. 계명대로 살면, 생업에 복을 받고 약속의 땅에서 영구히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민수기 15장 37-41절이다.

[3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옷술을 ‘찌찌트’라 하는데, 유대인이면 누구나 달아야 한다. 38절에서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절에서는 술을 달아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처럼 유대인들은 쉐마의 말씀을 잘 실천하기위해서 ‘트필린’이란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끈으로 그들의 손이나 이마에 붙이고, 또 ‘메주자’라 불리는 칼집형태의 말씀상자를 만들어 집안 문설주 옆에 부착해 놓고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세 번씩 이 메주자에 입을 맞추고, 옷에는 ‘찌찌트’를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나게 하고 준행하려고 힘쓴다.
유대인들의 토라사랑은 대단하다. 그들은 토라(Torah)라 불리는 모세오경을 깊이 사모한다. 유대인들은 이 토라의 본문을 54개로 나눠서 회당 예배 때마다 읽어서 일 년에 한 번씩 완독한다. 회당을 출입하는 유대인들은 평생 동안에 토라를 몇 수십 번 읽게 되는 셈이다. 또 월요일 목요일 아침기도회 때에도 토라를 읽는다.[각주8]
태양력으로 10월경,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 첫 달 티쉬레이월 22-23일, 초막절이 끝나는 다음날부터 이틀간 ‘심핫 토라’(Simchat Torah)라 불리는 특별한 토라축제를 갖는다. ‘심핫 토라’란 말은 “토라 속에서의 기쁨”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차례씩 토라, 곧 모세오경을 완독하게 되는데, 이날이 바로 그 날인 것이다. 매주 회당예배 때에 창세기 1장서부터 시작하여 신명기 34장까지 공개적으로 몇 개의 장씩 읽는다. 심핫 토라 때 그 마지막 부분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즉시 다시 창세기 1장에로 돌아간다. 토라는 일년주기로 읽히는 일종의 사이클(원)이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날 토라읽기를 다 마치면 토라 두루마리 성경을 들고 회당주변을 행진하면서 충만한 기쁨으로 마음껏 노래하고, 토라와 더불어 회당에서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며 축하한다. 이 때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토라 두루마리 성경을 운반하는 명예가 주어진다. 이날은 물론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축일이다.
매주 드리는 회당예배 때에도 토라읽기에 앞서 토라행진이 있다. 토라가 회당내로 운반되어질 때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이 토라를 잡는다. 토라가 회중에게 전달될 때,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혹은 때때로 기도서나 그들의 ‘탈리트,’ 곧 유대인 남성이 아침 예배 때 착용하는 어깨걸이로 책표지를 만진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혹은 그들이 토라를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입을 맞춘다. 정통주의 회당에서는 토라행진이 종종 여성 지정석 쪽으로 가지를 않는다. 여성은 보통 토라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그들의 손에 입을 맞춘다. 또 토라 읽기가 마친 후에 토라는 회중을 향하여 거양된다. 회중은 “브조트 하토라”(v'zot ha-Torah)를 낭송하면서, 보통은 손가락으로, 토라를 향하여 손을 뻗어 손가락에 입을 맞추는 것이 전통이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할라카’(Halakhah)라 부른다. 그 가운데 토라에 근거한 613개의 ‘미츠보트’(Mitzvot)라 불리는 계명이 있다. 이들 613개의 계명들 가운데 248개는 ‘~하라’는 긍정적 계명으로써 남성 신체의 하나하나의 뼈와 기관을 위한 것이고, 나머지 365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으로써 태양력으로 일 년 365일의 매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들 613개의 계명들이 오늘날에도 다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밖에서 지켜질 수 있는 계명은 77개의 긍정적인 계명들과 194개의 부정적인 계명들뿐이라고 한다. 계명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유대인들은 토라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각주9]
‘게자이라’(gezeirah)는 법도 있는데, 사람들이 토라 계명을 우발적으로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랍비들이 제정한 율법이다. 예를 들면, 토라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한다. 그러나 게자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할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 곧 연필, 돈, 망치와 같은 것들을 치워놓고 보이지 않게 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무크짜’(Muktzah)라 하는데, 그런 물건들이 가까이 있어서 눈에 띄게 되면 그날이 안식일이란 사실을 잊고 금지된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타카나’(takkanah)란 율법도 있다. 랍비들에 의해서 제정된 율법인데, 예를 들면, 구약성경이후에 생긴 축일인 ‘하눅카’(Chanukkah), 곧 수전절 때에 촛불을 밝히라는 계명이 ‘타카나’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공개적으로 토라를 읽는 관행도 에즈라 때에 제정된 타카나이다. 타카나와 게자이라는 토라의 미츠보트, 곧 계명들이 갖는 구속력을 동일하게 갖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인 모세오경을 얼마나 극진히 사모하고 경건하게 받아드리는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강론한다.
둘째, 쉐마의 말씀을 실천하기위해서 ‘트필린’이라 불리는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끈으로 그들의 손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닌다.
셋째, ‘메주자’라 불리는 칼집형태의 말씀상자를 만들어 집안 문설주 옆에 부착해 놓고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세 번씩 이 메주자에 입을 맞춘다.
넷째, 하나님의 계명을 잘 기억하고 준행하기 위해서 ‘찌찌트’라 하는 옷술을 달고 다닌다.
다섯째, 매년 한 차례씩 토라를 완독한다.
여섯째, 토라 완독을 축하하는 ‘심핫 토라’ 축제를 갖는다.
일곱째, 매주 회당예배 때마다 토라를 읽는다.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기도회 때에도 토라를 읽는다.
여덟째, 회당예배 때에 토라에 입을 맞춘다.
아홉째, 토라의 계명들인 613개의 율법들을 지킨다.
열 번째, 토라의 계명을 우발적으로 범하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 날이 닿기 전에 안식일 법을 어길만한 물건들을 미리 치워서 보이지 않게 한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 선민의 두 번째 조건이다.

3. 기도생활[각주10]

유대인들의 핵심 기도들 가운데는 ‘쉐마’(Shema)가 있다. 이 쉐마는 유대교에서 가장 오래고 고정된 매일 드리는 기도이다. 내용은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그리고 민수기 15장 37-41절로 이뤄진다. 유대인들은 고대 때부터 이 기도를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낭송해왔다.
유대인들은 ‘쉐모네 에스레이’(Shemoneh Esrei)라는 기도를 아침과 오후와 저녁에 하루 세 번 드린다. 신약성경에는 아침 9시와 정오 그리고 저녁 3시에 행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쉐모네 에스레이’는 19개의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도를 하루 세 번씩하게 되면 57번의 기도가 되는 셈이다.
이 기도문은 2,600여 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제국에 유배되어 갔을 때에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던 희생제사를 바칠 수 없었기 때문에 희생제물 대신에 기도를 바쳤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루 세 번씩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바쳤는데, 유배상태에서는 행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에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예배와 안식이 있는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이어지는 안식일에는 매일 드리는 기도이외에 추가로 기도회가 있었고, 특정한 축일들에도 있었는데, 그 축일들에 바쳐졌던 희생 제사들을 대신하는 추가 기도회들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관행이 바벨론 제국에 유배되어가기 이전에도 경건한 자들 사이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기도에 대한 이 좋은 사례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희생제사일 수 있다는 점을 교훈한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일 수 있고, 하나님과의 사귐과 교제를 상징하는 화목제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대신하는 속죄제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대신하는 속건제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원래 제사는 제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이다. 그러나 제 몸을 드려 제단에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제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제단에 오른 제물에 안수를 하고 예배자의 허물을 대신해서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개념이다. 허물의 사죄를 위한 것이든 감사와 화목을 위한 것이든 제물을 바친다는 개념은 제 몸을 바친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도가 제사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유대인들이 과거 2,500여 년간 회당에서 기도회로 모였던 것이다. 회당의 예배는 기독교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여 드리는 기도를 통한 예배 또한 제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도를 히브리어로 ‘테필라’(tefilah)라 한다. 이 말은 자신을 성찰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 말은 기도의 목적을 분명하게 파악하게 해준다. 어떤 기도든, 그것이 간구든, 감사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든, 혹은 고백이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상 속에서의 우리 자신의 역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기도란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도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카바나’(kavanah)라 한다. 카바나는 일반적으로 “집중” 혹은 “의도”란 말로 번역된다. 카바나의 최소 단계는 기도자가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의식과 기도할 의무를 이행하려는 의도라고 말한다. 이 카바나의 이 최소 단위를 갖추지 못한다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유대인의 카바나는 다른 잡생각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고,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며,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시편 35편 10절, “나의 전 존재(내 모든 뼈)가 외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노래로 기도하거나 몸을 전후로 흔들면서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자국어인 히브리어를 2,600여 년 전 바벨론에 유배되었을 때에 잊어버렸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를 되살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노력 또한 눈물겨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제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기도만이라도 히브리어로 하기를 권장한다. 한 유대인이 히브리로 기도를 하고는 싶었지만 히브리어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는 히브리어 알파벳만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기도를 듣고 있던 랍비가 수상하게 여겨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랍비에게 대답했다. “거룩하신 분, 복 받으시는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아십니다. 내가 그분에게 알파벳문자들을 드리면, 그분은 그것들을 조합해서 단어들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중심을 보신다. 미사려구의 아름다운 기도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알아듣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이 하나님께 바친 이 무식한 기도를 학식이 많았던 랍비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알아들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그 기도를 받으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룹기도를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도들은 “나”란 말 대신에 “우리”란 일인칭 복수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의 단체기도는 서로를 위한 책임과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개인 활동이기보다는 단체 활동이다. 유대인들이 기도회로 모일 수 있는 최소인원은 유대인 성인 남성 10명이다. 유대인들은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이 기도문을 외우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할 의무를 가진 자로 본다. 그래서 10명의 정족수를 채우지 않고서는 기도회로 모이지 않는다. 이 기도의 정족수를 '민얀'(minyan)이라고 하는데, 이 민얀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도회나 신앙 활동들이 수행될 수 없다. 이런 민얀의 요구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리 먼 곳에 흩어져 있더라도 기도회를 위해서 모이게 되는 것이다. 지난 2,600여 년간 외국에 살면서 갖가지 핍박과 탄압 속에서도 유대인들이 흩어지지 않고 공동체를 이뤄 민족성을 지켜갈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과거 2,600여 년간의 유대인들의 삶은 회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대인에게는 '베라코트'(berakhot)라 불리는 기도가 있다. 유대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기도가 베라코트에 속한다. 베라코트는 '베라카'의 복수명사이다. 그런데 베라카는 ‘축복’이란 뜻이다. 이 말의 히브리어 어근은 ‘무릎’이란 뜻의 벹-레쉬-카프(Bet-Resh-Kaf)에서 유래하며, 무릎을 굽혀 절함으로써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베라코트를 낭송할 때 무릎을 굽히면서 절을 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하는 대부분의 기도를 베라코트라 부르는 것에서 우리는 매우 깊은 뜻을 발견한다. 물론 유대인의 베라카는 “복 받으시옵소서. 당신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기도를 ‘축복’이라 부른 것은 의미가 깊다.
유대전통에 따르면, 유대인은 매일 100개의 베라코트를 낭송해야 한다. 여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하루 세 번하는 19개의 쉐모네 에스레이가 포함된다. 그것만으로도 57개의 베라코트를 낭송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기도를 요구하는 베라코트가 수십 개씩 있어서 100개의 베라코트를 낭송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습관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지 않나 생각된다.
유대인들의 베라코트에는 기본적으로 세 종류가 있다. 물질적인 쾌락을 즐기기 전에 낭송되는 것들, 미츠바 곧 계명을 이행하기 전에 낭송되는 것들, 특별한 때나 행사들 때에 낭송되는 것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먹고 마시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은 물질적인 쾌락을 즐기기 전에 베라코트를 낭송한다. 이것은 사용하려고 하는 물질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빵을 위한 베라카는 “땅에서 빵을 생산하게 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새 옷을 입기위한 베라카는 “벌거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들 베라코트를 낭송함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과 먼저 그분의 승낙을 구함이 없이는 물질들을 사용할 어떤 권리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베라카는 본질적으로 물질을 사용할 승낙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모든 행동에 앞서서 먼저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승낙을 구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겸손한 자세요,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가?
유대인들은 손을 씻거나 촛불을 밝히라는 등의 일상의 계명을 이행하기 전에도 베라코트를 낭송한다. 그 베라코트는 “그분의 계명들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분, 곧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도록 명령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물론이고 랍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한다. 얼마나 겸손한 자세요,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가?
유대인들은 기쁜 소식이나 나쁜 소식을 접할 때와 같은 특별한 때나 행사들 때에도 베라코트를 낭송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발생되는 모든 선악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같은 베라코트는 좋은 일들이든 혹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든 모두를 위해서 낭송된다. 우리가 어떤 나쁜 것을 보거나 들을 때, 나쁘게 드러나는 일들은 궁극적으로 의로운 이유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한정된 이해 속에서 그 이유를 항상 알 수 없다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의로운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참된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만사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신앙이 반영된 기도이다. 얼마나 겸손한 자세요,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가?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도 기도하지만, 식사 후에도 기도한다. 이 기도를 ‘비르카트 하마존’(Birkat Ha-Mazon)이라 부른다. 신명기 8장 10절에 근거한 기도이다. 비르카트 하마존(음식의 축복)이란 말 또한 이디시(Yiddish)어로 ‘축복하다’는 뜻이다.
비르카트 하마존은 네 가지 축복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한 축복으로써 세상에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땅에 대한 축복으로써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유산으로 이스라엘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대한 축복으로써 예루살렘의 재건과 모쉬아크(메시아)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한 것과 선한 행동에 대한 축복으로써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찬양한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예배 때에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하루에도 100개 이상의 기도문을 낭송한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세워지고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이란 나라만큼 고난이 많았던 나라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도 건재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라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왕국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제국에 망해서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 땅이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이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나라가 망한 후에 그 땅에 남았던 가난하고 못 배운 이스라엘 천민들이 그 땅에 이주해온 이방인들과 결합해서 만들어진 혼혈인들을 말한다. 그리고 남쪽 유다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완전히 망해서 모두 다 바벨론에 유배되어갔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의 극도의 시련이 시작된다. 유배당한 후, 짧게는 70년, 길게는 173년 만에 페르시아제국의 허용아래 일부 유대인들이 본토에 돌아와 나라를 재건했지만, 또 다시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제국에 넘어가게 되고, 이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66년에 시작된 독립투쟁의 실패로 주후 70년에 철저하게 망해버렸고, 132년부터 시작된 또 한 번의 독립전쟁의 실패로 135년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본토에서 쫓겨나게 되어 과거 2,000여 년 동안 1,200만 명이 학살되는 수난을 겪었다. 1948년 5월 14일,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했던 기도의 응답을 받아 결국에는 이스라엘 국가를 조상들의 땅에 세우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기도의 힘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산 증거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이라고 해봐야 고작 1,400여만 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이지만, 세계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은 가공할 정도로 크다. 이 모든 기적이 그들의 끊임없는 기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기도생활은 선민이 되는 세 번째 조건이다.

4. 안식일 성수[각주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은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말만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부도수표나 다름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진심으로 창조주로 믿고, 또 그분을 진정으로 창조주 되게 하려면, 안식일에 우리 인간들이 모든 창조행위를 멈춰야한다 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 개념은 이렇다.
첫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기슭에서 체결한 계약의 내용이자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0장 8-1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 가운데 제4계명인데, 내용은 제칠일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24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유대인들은 이 안식일 계명을 ‘직장에 출근하지 말라.’거나 ‘주중에 진행하던 모든 생업을 중단하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출애굽기 20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가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일’이란 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가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수천 년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환경이 바뀌고 문명이 바뀌면 생활양식도 바뀐다. 이 바뀐 생활패턴에서 부딪치는 새로운 문제들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들의 행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혹은 해도 좋을 일인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둘째,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범주를 ‘창조행위’(Melacha)에 국한 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제칠일인 안식일에 쉬셨다(창 2:2). 안식일에 창조를 멈추신 것은 천지만물이 다 완성되었고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멈추셨던 것처럼 인간들도 안식일에 모든 창조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출 20:8-11). 안식일에 일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다는 사실과 우주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을 멈춤으로써 창조주를 진정으로 하나님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개념을 ‘완성’으로 생각한다. 세계의 완성, 나의 완성, 하나 됨에로 가는 길(path) 곧 할라카(halacha)라고 말한다.
유대교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관한 교리의 종교가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규정과 실천들로 가득한 포괄적인 삶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먹고 먹을 수 없는가? 무엇을 입을 수 있고 입을 수 없는가?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명절과 안식일은 어떻게 지키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인간과 동물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와 같이 살면서 필요한 실제적인 규정들로 가득하다. 이런 규정들이 수백 수천가지가 된다.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할라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법'이라고 번역되지만, '걸어가다,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길’이란 뜻이다. 우리말에 ‘도’(道)에 해당된다.
셋째, 유대인들은 인간의 창조행위를 39가지의 범주로 규정한다. 성경은 무엇이 “인간의 창조행위”인가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를 않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광야시대에 성막(Mishkan)을 짓도록 한 출애굽기 31-35장의 명령을 통해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을 규정하고 있다. 성막건축은 그 자체가 세계의 축소판이며, 창조행태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39가지 범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씨뿌리기, 밭 갈기, 추수하기(자르기), 거두기(묶기), 타작하기, 까부르기, 고르기, 빻기, 체질하기, 반죽하기, 굽기, 털깎기, 표백하기, 풀기(빗질하기), 물들이기, 실뽑기, 베틀에 실 걸기, 직조하기, 실 제거하기, 매듭매기, 매듭풀기, 바느질하기, 찢기, 가두기(덫 또는 올가미 설치), 죽이기, 가죽 벗기기, 소금치기(무두질하기), 선긋기(표시하기), 매끄럽게 하기 및 구김살 펴기, 재단하여 자르기, 알파벳 두 자 이상쓰기, 알파벳 두 자 이상 지우기, 건축하기, 허물기, 불끄기, 불 지피기, 마지막 망치질하기, 운반하기.
넷째, 유대인들은 성막건축에 필요한 상기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의 범주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던 39가지의 공정에 연관된 일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창조활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할 것은 39가지 범주란 말이 39가지 안식일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범주’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 39가지 범주에 들어가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들은 수백 수천 가지에 이른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1)나뭇가지와 잎을 뽑거나 자르기, 꽃 꺾기, 과일 따기, 채소 또는 나물채취하기, 잔디 깎기, 화초에 물주기를 할 수 없다.
2)밭 갈기, 씨뿌리기, 과일, 꽃, 나뭇가지 등을 모우기, 타작하기, 알곡 고르기, 과일을 짜서 주스내기, 상한 과일이나 음식, 더러운 그릇 등을 골라내는 것이 금지된다.
3)빻기나 찧기, 체질하기, 까불리기, 반죽하는 것이 금지된다.
4)불 켜기와 끄기, 음식과 물질에 열을 가해 변화를 주는 것이 금지된다. 밤중에 불을 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미등을 켜놓거나 화장실 등의 전기스위치에 테이핑을 해둔다.
5)손발톱 깎기, 털 자르기, 털 뽑기, 머리 빗질도 안 된다. 머리털이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부드러운 털 빗은 허용된다. 손톱깎이나 빗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게 안식일 전에 미리 치워둔다.
6)빨래와 사워도 안 된다. 뻗친 머리칼을 단정히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는 것만 허용된다. 화장도 안 되고 선탠도 안 된다. 입술에 아무것도 문질러 바를 수 없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립스틱을 바를 수 없다.
7)바느질도 안 된다. 접착제나 압침 사용도 안 된다. 종이우유팩을 여는 것도 안 된다. 절이기, 소금뿌리기 등의 방부처리도 안 된다.
8)알파벳 두 자 이상 쓰기, 선긋기도 안 된다. 심지어 글쓰기를 하게 할 어떤 행위도 금지된다. 반대로 알파벳 두 자 이상을 지워서도 안 된다. 연필이나 펜 종류는 안식일 전에 눈에 띄지 않게 미리 치워놓아야 한다.
9)절취선이 있는 티슈박스의 개봉이 안 되고, 두루마리휴지를 떼어낼 수 없다. 안식일에 쓸 휴지를 미리 떼어놓거나 또는 이미 절취되어 있는 티슈를 사용할 수 있다.
10)쇼핑을 할 수 없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을 사용할 수 없다. 안식일 전에 플러그를 미리 빼놓도록 권하고 있다.
11)땅에다 대고 무엇을 짓거나 수리를 해서도 안 되고, 부수는 것도 안 된다.
12)불을 피우거나 끌 수 없고, 전기스위치를 켜고 끌 수 없다. 자동차의 시동도 걸 수 없다. 따라서 안식일에 운전을 할 수 없다.
13)구두나 운동화에 새로 끈을 끼우는 것도 안 된다.
14)악기연주가 금지된다. 랍비들은 우발적인 조율을 막기 위해서 금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노래하기와 휘파람 부는 것은 허용된다.
15)율법은 안식일에 개인영역에서 공공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지한다. 공공영역에서는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 단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목숨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운전도 할 수 있고, 전화도 쓸 수 있고, 그밖에 행동들도 필요에 따라 할 수 있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을 어떻게 이해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안식일 논쟁에 관한 기사가 많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마 12:1-8, 막 2:23-28, 눅 6:1-5),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마 12:9-13, 막 3:1-6, 눅 6:6-11), 안식일에 18년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친 사건(눅 13:10-17), 안식일에 고창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 사건(눅 14:1-6),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요 5:2-18), 성전에서 안식일에 관한 말씀을 선포한 사건(요 7:14-24), 그리고 안식일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친 사건(요 9:1-41)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은 상당히 뜨거웠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일’을 유대인들이 ‘창조행위’로 본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창조행위는 하나님의 일이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행위에는 세 가지 범주의 일들이 있다. 첫째는 어둠이 빛이 되게 하는 것, 둘째는 혼돈이 질서가 되게 하는 것, 셋째는 죽음이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과연 이 세 가지 범주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를 안식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살림의 일로 보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막건축과 관련된 39가지의 일을 창조행위의 39가지 범주로 보고, 이것들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들의 범주로 확대 해석한 것을 비난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일, 곧 세 가지 범주의 창조행위가 아니라, 인간들의 일, 곧 죽임의 일을 말한다고 본다. 빛의 일보다는 어둠의 일, 질서의 일보다는 혼돈의 일, 생명의 일보다는 죽임의 일들을 일삼는 것이 인간들의 일이다. 이런 일들을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의 살림의 일을 묵상하고 본받으라는 것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참 뜻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암시하셨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마태복음 12장 9-13절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을 때, 거기 말라버린 한 쪽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이 한 마리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구해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가복음 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창조행위, 곧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한 주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이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그 병자를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러나 이 한 마디는 안식일에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고, 2,000큐빗(900미터 정도)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창조행위라면 그 창조행위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살림의 일을 비난하고 질타하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왜곡하는 자들이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본받고, 살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21절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이다. 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아들 예수님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유대교의 제칠일안식일 개념이 기독교에 와서는 제팔일 일요일 곧 주일로 바꿨지만, 안식의 개념은 동일하다고 본다. 한 주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일, 죽임의 일들을 많이 한다. 일주일 가운데 단 하루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 복음의 일, 살림의 일을 행하기도 하고 묵상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는 것이 참 안식이라 할 수 있다. 빛의 일, 생명의 일, 복음의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어둠의 일, 죽임의 일, 세상의 일은 멈추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 되는 네 번째 조건이다.

5. 가정생활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수천 년 동안을 자기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박해를 받으며 떠돌이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1,878년 만에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했고, 잊고 살았던 히브리어를 복원하였으며, 소수민족이면서도 세계의 정치경제를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다. 그런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유대인의 원동력은 가정과 회당에서 온다고 말이다. 이 두 가지 원동력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이 유대인의 가정이다.
유대인의 가정은 예배하고 기도문을 낭송하는 성소이자, 배움이 있는 도서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가정은 기도문이 낭송되는 성소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100개 이상의 기도문을 낭송한다. ‘쉐마’(Shema)라는 기도문을 매일 낭송한다. ‘쉐모네 에스레이’(Shemoneh Esrei)라 불리는 19개의 기도문을 아침과 오후와 저녁에 하루 세 번 낭송한다. 먹고 마시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은 물질적인 쾌락을 즐기기 전에 기도문을 낭송한다. 손을 씻거나 촛불을 밝히는 등의 일상의 계명을 이행하기 전에도 기도문을 낭송한다. 기쁜 소식이나 나쁜 소식을 접할 때와 같은 특별한 때와 행사들 때에도 기도문을 낭송한다. 식사 전에도 기도문을 낭송하지만, 식사 후에도 한다.
유대인의 가정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강론하고, 모범을 보이는 성소이다. ‘쉐마’를 실천하기위해서 ‘트필린’이라 불리는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끈으로 그들의 손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닌다. ‘메주자’라 불리는 칼집형태의 말씀상자를 만들어 집안 문설주 옆에 부착해 놓고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세 번씩 이 메주자에 입을 맞춘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기억하고 준행하기 위해서 ‘찌찌트’라 하는 옷술을 달고 다닌다. 유대인의 일상은 신앙으로 일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간조선 2005년 6월호에 실린 형용수 명지대 객원교수의 글을 보면, 유대인의 거실에는 TV가 없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거실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고, 책장이 놓여 있지만, TV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거실에 TV를 놓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각을 통해서 전달되는 강렬한 세속문화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자녀들에게 독서습관을 길러주기 위해서이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논리력과 사고력을 배양한다고 한다.
셋째, 사고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이다.
넷째, 인간관계와 감성교육을 위해서이다.
다섯째, 집중력과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여가를 선용하기 위해서이다. TV가 없기 때문에 여가 시간이 많고, 그 시간을 성경공부와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노벨상의 30퍼센트를 쓸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유대인의 원동력은 부부와 부모자녀들의 유대감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결혼을 신성시 한다. 결혼식 때 유리컵을 발로 밟아서 깨트리는 의식이 있는데, 첫째는 가장 기쁜 순간에 가장 슬픈 일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며, 둘째는 신랑과 신부는 결혼을 통하여 한 몸을 이뤘기 때문에 이제 나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가정을 신성시한다. 식탁은 제단이고, 아버지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안식일마다 식탁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매년 돌아오는 축일(holidays)과 축제(festivals)를 반드시 지킨다. 유대인들의 축일들은 대부분 하나님과 연관된 신앙적인 것들이다.
유대인들은 여성을 존중한다.[각주12] 어머니들은 안식일 때마다 촛불을 밝힌다. 어머니가 가정의 빛이라는 유대교 사상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생활태도를 가르친다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킨다. 종교교육을 어머니에게 맡긴 것만 보아도 여성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성서시대에는 아버지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도 유대인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그 자녀가 유대인으로 인정된다. 그럴 정도로 유대인들은 여성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조심스럽게 대하고, 매 안식일에는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잠언 31장 10절 이하의 "현숙한 아내를 축복하는 말씀"을 읽어준다. 탈무드에 따르면, 경건한 남성이 사악한 여성과 결혼하면 사악하게 되고, 사악한 남성이 경건한 여성과 결혼하면 경건하게 된다고 한다.
십계명은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존경할 것을 요구한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나오지만, 레위기 19장 3절에서는 어머니가 먼저 나온다. 양부모 모두가 동등하게 존경과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
여성은 날이나 해와 같이 특정한 시간에 이행되는 계명들, 곧 “~를 하라”는 시간과 관련된 모든 적극적 계명들을 지킬 의무에서 면제된다. 부인이나 어머니로서의 의무들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 같은 의무들이 지연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계명을 이행할 시간이라고 해서 우는 아기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매월 첫날을 ‘로쉬 코데쉬’(Rosh Chodesh)라 부르는데, 이 날은 여성을 위한 날이자, 작은 축일이다. 이날 여성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원래 로쉬 코데쉬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매월 각각 상징하려했는데,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남성들이 사막에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긴 죄 때문에 이 축일이 황금송아지 제작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 여성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남성들이 황금송아지를 제조할 때 여성들은 그들이 소유한 금붙이들을 내놓지 않았고, 결국 남성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금붙이를 거둬서 우상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열두 부족을 각각 상징하려고 했던 이 축일이 믿음을 지켰던 여성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이는 유대인들에게 축복의 선물이다.[각주13] 유대교에서는 원죄개념이 철저하게 거부된다. 유대교에서는 어린아이가 순결하게 전혀 죄 없이 태어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오 하나님, 당신께서 제게 주신 영혼은 순결합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을 창조하셨고, 조성하셨으며,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알리야’(aliyah)라 불리는 영광이 주어진다. ‘알리야’는 회당예배 때에 토라 곧 모세오경을 봉독하고 축복할 기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 때에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의 건강을 위한 축복이 낭송된다. 또 아기가 여자이면, 바로 그 때에 이름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여자 아기의 이름은 생후 첫 안식일 때 회당에서 짓게 되는 것이다. 아기가 남아이면, ‘브리트 밀라’(brit milah)라 불리는 할례의식 때에 이름이 주어진다.
유대인들의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은 그들의 이름에서 나타난다. 히브리어 이름의 표준 형태는 남자아이일 경우 아이의 이름 다음에 ‘~의 아들’이란 말을 붙인다. 예를 들면, ‘진수, 동호의 아들’ 곧 ‘Jinsoo, benDongho’라고 한다. 여자아이일 경우 아이의 이름 다음에 ‘~딸’이란 말을 붙인다. 예를 들면, ‘하은, 경기의 딸’ 곧 ‘Haeun, batKyunggi’라고 한다. 아이가 제사장이면, ‘하-코헤인’(ha-Kohein)이란 말이 더 붙고, 레위인이면 ‘하-레바이’(ha-Levi)란 말이 더 붙는다.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데 따른 종교적인 요구사항은 없다고 한다. 이디쉬(Yiddish) 이름이나 영어 이름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폴란드, 러시아계의 유대인들 곧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최근 작고한 친척의 이름을 아이의 이름으로 준다고 한다.
할례의식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대, 가족 간의 연대, 더 나아가서 유대민족을 연대시킨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일 경우 난지 8일 만에, 예를 들면, 수요일에 태어났으면, 그 다음 수요일에 할례를 행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브리트 밀라’(Brit Milah)라 부르는데, ‘할례의 계약’이란 뜻이다. 유대교 신앙을 갖지 아니한 유대인들조차도 이 할례의 계약만큼은 지킨다고 한다. 유대교의 율법들을 지키지 않는 세속유대인들조차도 할례의 계약만큼은 지킨다고 한다. 할례가 위생적인 면에서도 유익하지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계약의 외적 신체적 표시이며, 할례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표시이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영적인 파문을 당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올 세계에서 설자리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안식일에 피를 흘리는 일이 금지되지만, 할례만큼은 안식일에도 행해진다. 그리고 할례는 그 자체가 종교의식이기 때문에 할례의식에 자격을 가진 자 ‘모헬’(Mohel)이라고 불리는 경건한 사람이 집에서 시행한다.
할례가 수행되는 동안, 아이를 붙잡는 사람을 ‘산덱’(sandek)이라 부르는데, ‘대부’라는 의미를 갖는다. ‘산덱’ 곧 대부가 되는 영광은 보통 할아버지나 가족의 랍비가 갖게 된다. 전통적으로 엘리야를 위한 의자가 옆에 놓이는데, 엘리야가 모든 할례의식을 주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축복기도들이 낭송되고, 축복을 받은 포도주 방울을 아기의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아기는 이때에 히브리 이름을 받게 된다. 행사 후에는 다과회나 잔치가 배설된다.
유대인들은 맏배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믿기 때문에 ‘피됸 하벤’(pidyon ha-ben) 곧 ‘아들의 대속’이란 구속의식을 출생한지 31일이 되는 날에 행한다. 만일 이 날이 안식일이면 다음날에 행한다. 여기서 대속은 민수기 18장 15-16절의 말씀대로 속전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성서시대에는 은전 세겔 다섯 냥, 요즘에는 은전 달러 다섯 냥을 제사장이나 절차에 익숙한 경건한 자에게 주고 간략한 의식을 행한다. 이 모든 의식들이 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대, 가족 간의 연대, 더 나아가서 유대민족을 연대시키는 것들이다.
유대인의 자녀들은 적정한 나이가 되면 수많은 계명들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각주14] 남자아이는 13세, 여자아이는 12세가 되면 각각 ‘발 미츠바’(Bar Mitzvah)와 ‘밭 미츠바’(Bat Mitzvah)라 부른다. 이것은 종교적인 성인이 되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법적인 성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18세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13세가 되면 회당예배에 참여할 수 있고, 토라 곧 모세오경을 봉독할 수 있다. ‘민얀’이라 부르는 기도회가 열릴 수 있는 최소인원에도 포함되며, 종교법정에서의 증언이나 결혼의 권리도 갖는다. 특히 13번째 생일을 보낸 남자아이는 회당 예배 때에 그 주간의 토라읽기 곧 성경읽기를 수행한다. 아버지는 이때에 아들의 죄에 대한 책임의 짐을 벗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복을 낭송한다. 왜냐하면, 아들이 이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13세 이전까지의 아이들은 계명을 지킬 의무를 갖지 않는다. 자녀양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도 13세까지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가 13세 이상이 되면 체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성인이 되는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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