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내가 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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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 내가 길이요◀
사람들은 길을 묻는다. 어느 길로 가면 되겠느냐고.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한 길’(only way!)뿐이라고 주장하고, 다원주의자들은 ‘다양한 길’(many ways!)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디로 가는 길을 말하는가? 궁극적 실재나 근원에 도달하는 길을 말한다. 성서에서는 이 길을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 또는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3-14장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베드로였다. “도미네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 도마가 14장 5절에서 반문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빌립이 8절에서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가룟 유다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유다가 22절에서 묻는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들 제자들이 묻는 질문들에 대한 총체적인 예수님의 대답이 6절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the way),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아는 진리(the truth)요, 영생(the life)에로 인도하는 길이란 뜻이다.
길이 한 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시도했거나 닦아놓은 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이 모든 다양한 길들이 죽음이란 깊은 계곡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끊긴다고 본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바다에 가로막힌 것과 같다. 또 사막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에 가로막힌 것과 같이 더 이상 길이 이어지 못한다고 본다.
문제는 누가 우리를 바다 건너 혹은 강 건너 해변으로 옮겨 줄 것인가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모하메드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준 사람은 없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노래처럼 “성난 물결 위에 놓인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 또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당신이 지쳐서 작게 느껴질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당신의 눈물을 다 닦아 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힘들고 어려운 때, 친구들조차 다 떠나버린 때, “내가 네 편이 되어 주리라. 성난 물결 위에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고 나서 줄 사람이 누군가?
죽음의 바닷가까지, 나락의 강가까지, 죽음의 계곡에까지 인도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러나 누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 건너 광명의 해변에로 인도할 것인가? 누가 나락의 강에 다리가 되어 주며, 죽음의 계곡에 다리가 되어 줄 것인가? 성서는 그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계곡에 인류의 죗값을 위해서 당신께서 짊어지시고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로 튼튼한 다리를 놓으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길을 묻는다. 어느 길로 가면 되겠느냐고.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한 길’(only way!)뿐이라고 주장하고, 다원주의자들은 ‘다양한 길’(many ways!)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디로 가는 길을 말하는가? 궁극적 실재나 근원에 도달하는 길을 말한다. 성서에서는 이 길을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 또는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13-14장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베드로였다. “도미네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 도마가 14장 5절에서 반문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빌립이 8절에서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가룟 유다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다른 유다가 22절에서 묻는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들 제자들이 묻는 질문들에 대한 총체적인 예수님의 대답이 6절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the way),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아는 진리(the truth)요, 영생(the life)에로 인도하는 길이란 뜻이다.
길이 한 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시도했거나 닦아놓은 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이 모든 다양한 길들이 죽음이란 깊은 계곡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끊긴다고 본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바다에 가로막힌 것과 같다. 또 사막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에 가로막힌 것과 같이 더 이상 길이 이어지 못한다고 본다.
문제는 누가 우리를 바다 건너 혹은 강 건너 해변으로 옮겨 줄 것인가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모하메드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준 사람은 없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노래처럼 “성난 물결 위에 놓인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 또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당신이 지쳐서 작게 느껴질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당신의 눈물을 다 닦아 줄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힘들고 어려운 때, 친구들조차 다 떠나버린 때, “내가 네 편이 되어 주리라. 성난 물결 위에 다리처럼 내가 그대를 위해 다리가 되어 주리라.”고 나서 줄 사람이 누군가?
죽음의 바닷가까지, 나락의 강가까지, 죽음의 계곡에까지 인도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러나 누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바다 건너 광명의 해변에로 인도할 것인가? 누가 나락의 강에 다리가 되어 주며, 죽음의 계곡에 다리가 되어 줄 것인가? 성서는 그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계곡에 인류의 죗값을 위해서 당신께서 짊어지시고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로 튼튼한 다리를 놓으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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