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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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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조회 8,618 2004.07.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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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마 4:1-11)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이 땅에서의 삶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내세에 희망을 걸게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주기를 바라거나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에서나 다 마찬가집니다. 특히 역사․정치적 상황이 비슷하고 오랫동안 한을 품고 살아온 유대민족과 우리민족에게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유배이후 메시아사상을 발전시켜왔고, 많은 수의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났었던 것이고, 우리민족은 삼국시대이후 미륵사상을 발전시켜왔고, 역시 많은 수의 자칭 미륵들이 나타났었던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유대인 열심당원 발 코크바이고, 태봉의 왕 궁예입니다. 발 코크바는 ‘별의 아들’ 곧 다윗의 자손 메시아란 뜻으로 지구상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지 102년만인 주후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유대전쟁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이 존경했던 랍비 아퀴바로부터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혁명가였습니다. 이들 자칭 메시아 또는 자칭 미륵들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다 정치․군사적 혁명을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혁명들은 백이면 백 다 민중에게 큰 아픔과 시련을 안겨준 채 끝장나곤 했습니다. 발 코크바나 궁예는 말할 것도 없고, 근대에 일어난 혁명들, 예를 들어, 청나라 사람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레닌의 러시아혁명(1917), 우간다의 이디 아민, 이라크의 후세인, 박정희의 군사혁명까지 그들 민족에게 시련을 안기지 않았던 예는 없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600년 넘게 제국들의 억압을 받으면서 피폐할 때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더 애타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유대지방이 로마총독의 관할아래 있던 때여서 유대민족에게 왕이 없었고 또 왕을 둘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특수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란 칭호를 여러 통로들을 통해서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이스라엘나라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 유대인의 왕이 될 사람 또 바벨론유배이후 많은 예언자들이 ‘오실 자’로 예언했던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들 칭호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반란자로 내몰릴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메시아란 칭호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여러 경로란 민중의 입을 통해서, 귀신의 입을 통해서,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실 자 메시아란 사실이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도 다른 여타의 자칭 메시아나 자칭 미륵들처럼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혁명군의 선봉장이 되었어야 했고, 민중에게 큰 아픔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서 말한 여타의 메시아나 미륵들과는 다른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진정한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였음이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고,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어났습니다. 또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시련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오히려 그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자칭 메시아나 미륵들과의 차이를 크게 만든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출생서부터 십자가에 매달린 상황까지, 마태복음 첫 장서부터 끝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로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장 족보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에서 난 자손임을 입증하였고, 2장에서 베들레헴에 출현한 별은 다윗의 고향에 나타난 다윗의 별을 말하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것과 동방 페르시아에서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로 출생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3장과 17장의 하늘의 소리를 통해서 또 병자들과 민중의 외침을 통해서, 귀신의 입을 통해서,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로마총독과 그의 군사들에 의해서, 심지어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패를 통해서조차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란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나지 않고 구차한 마구간에서 나셨습니다. 왕궁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목수의 일을 배우며 가난한 시골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이 마가복음에 2번, 누가복음에 2번, 마태복음에 9번이나 언급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인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예수님을 백마 탄 왕으로써가 아니라, 나귀새끼를 탄 평화의 왕으로 소개합니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오른 손에 홀을 쥐고 옥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고 민중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힘겨운 부역을 명령하는 왕이 아니라,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손에 갈대를 쥐고 십자가에 매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권세와 명예와 부를 누렸던 자들에게서는 들어볼 수 없었던 권위 있는 것이었고, 권세와 명예와 부를 누렸던 자들에게는 독설로 들린 반면, 그들로부터 짓밟히며 살아가던 민중에게는 위로의 말로 들렸습니다. 이 왕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모세오경이나 그 율법을 가르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도 훨씬 더 권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의 모세와 율법보다 더 권위 있는 분, 특히 말씀에 권위 있는 분으로 설명하였고, 예수님을 세례 요한보다(11:11), “성전보다”(12:6), “요나보다”(12:41), “솔로몬보다”(12:42), 심지어 다윗보다 더 큰 분(22:45)으로 소개하였습니다.
또 이 왕의 행동은 권세와 명예와 부를 누렸던 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권세 있는 능력이었고, 권세와 명예와 부를 누렸던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시기와 미움으로 나타난 반면, 질병에 짓눌려 신음하던 민중에게는 치유와 해방과 구원의 환호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셨고(마 12:22),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를 고쳐 주셨습니다(마 15:30, 21:1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마 14:14). 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기적을 일으켜 수천의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신 것은 그분이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 메시아임을 증명한 표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왕의 가슴에서 나온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은 예수님의 삶을 정치․경제․군사통수권을 보장하는 옥좌로 몰아가지 않고, 오히려 인류의 죄 사함과 영생을 위해서 해골의 언덕 골고다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 왕이 추구한 삶의 목적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죽은 것이 가장 숭고한 죽음인지를 가장 감동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자칭 메시아나 미륵들과 달랐던 점은 마태복음 4장 1-11절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 가지 미끼를 던지면서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유혹들을 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물리치셨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혹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직을 시작하기에 앞서 40일간 금식기도하신 후에 마귀로부터 받은 힐문이며 또 메시아직을 마감하는 십자가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힐문이기도 합니다(마 27:4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는 이 말은 민중을 구하겠다고 나선 모든 자칭 메시아나 미륵들에게 던져진 유혹의 소리라고 봅니다. 이 말에 함정이 있는데요, 대부분의 자칭 메시아나 미륵들이 이 함정에 빠져서 자기가 마치 메시아인양 또는 미륵인양 또는 신의 아들인양 주제넘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함정에 빠진 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을 내세운 양가죽을 쓴 ‘사람의 일’을 일삼는 늑대들로 판명이 났습니다.
그리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첫째 자만심을 부추기는 소리요, 둘째 ‘하나님의 일’과 비교되는 ‘세상의 일’ 또는 ‘사람의 일’을 부추기는 소리입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표적을 행한 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것을 강하게 뿌리치고 계시고, 마태복음 16장 22-23절을 보면,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묻히는 메시아가 되지 말고 제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가 되어 달라는 베드로의 강한 만류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메시아나 미륵처럼 거창한 사명수행을 들고 나온 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장한 사람의 일을 하는 자들은 사람들의 괴롬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일 뿐 아니라, 불순한 생각과 목적으로 무모한 일에 뛰어들면서도 ‘하나님의 뜻’임을 내세우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걸어야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모하게 뛰어들면서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가장해서는 결말이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출세만을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 .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하나님섬기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에 더 가치를 두고,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의 일에 더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찬양을 받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칭 메시아임을 주장하고 미륵임을 주장했던 자들이 이런 유혹에 넘어가 좋은 결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에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로 인류의 구세주로 칭송을 받고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방한 자칭 미륵이 있어서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천도교를 창도한 최제우가 이 사람입니다. 본래 그의 이름은 제선(濟宣)이였는데, 1859년에 이름을 제우로 바꿨습니다. 제우(濟愚)는 ‘예수’와 뜻이 같은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최제우는 젊어서 오랜 방랑기를 보냈는데요, 이 시기에 알게 된 천주학 곧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최제우는 32세 때인 1855년에 49일간의 기도에 들어갔고, 37세 때인 1860년에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 천사문답(天師問答) 곧 ‘하늘스승문답’이란 것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세 가지 시험이란 것이 있는 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한울님이 가라사대, “네가 지금 그릇된 세상을 건지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살리고자 하니 그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 뜻을 이루고자하면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내 너에게 백의제상(白衣宰相)를 주어 금력과 권력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하리라.” 최제우는 대답하기를, “부귀는 본래 제 소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돈과 권세로서 망하게 되었거늘 다시 부귀로서 세상을 건지라 하시니 이것은 사나운 것을 바꾸는 격이 될 것이라, 저의 뜻은 이것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이 가라사대, “부귀가 네 소원이 아니라면 권모술수로서 세상을 건지라.” 최제우는 대답하기를, “이 세상은 권모와 간교로서 망하였는데 어찌 다시 적은 꾀로서 백성을 속여 일시의 평안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한울님은 다시 “그렇다면 나에게 조화의 술법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세상을 건지라”고 하자 최제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이치에 어기는 일이라. 만물이 다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이치로 자라고 사는데 어찌 이치에 어기는 술법으로서 세상을 건지겠습니까? 이것도 소원이 아닙니다.” 이 일 후로 최제우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울님이 또한 그릇된 도로써 가르치시니 내 이제부터는 다시 한울님의 명교를 듣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11일간의 단식에 들어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경지, 곧 “내 마음이 곧 그대의 마음”이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제우는 이 도를 깨달은 지 5년 만인 1864년 고종 원년에 체포되어 “사술로써 병인을 고치고 주문으로써 국가민족을 기만하며, 검가(劍歌)로써 국정을 모반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방했으면서도 반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했던 최제우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여 사람이 곧 한울님이요(人乃天), 사람과 한울님이 하나(同歸一體)라고 주장하였고, 검무(劍舞)를 추고 검가(劍歌)를 부름으로써 국정을 모반한다는 오해를 받아 참형을 받았던 자칭 미륵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말없이 걸었던 예수님이 추구했던 삶의 목적과 방법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죽은 것이 가장 숭고한 죽음인지를 가장 감동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성도님들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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