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생명교회 강해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빛과생명교회 강해설교 KCCS Digital Archive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요 9:1-1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8,224 2003.08.24 07:26

본문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요 9:1-11)

[오후 성경공부 내용]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고침 받고 눈뜬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불행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뚜렷하게 들어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길가에서 만난 맹인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측은히 여기거나 도우려하기보다는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이유가 과연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는 신학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동시대의 유대인들은 인간이 당하는 불행의 원인을 죄 때문인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각 때문에 유대인들은 불행당한 사람들을 좋은 시선으로 볼 수가 없었고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오히려 멸시하고 천대하기일수였습니다. 살림의 일을 하기보다는 죽임의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불행만난 사람을 건져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 모세오경은 인간이 겪는 모든 환난과 고통의 원인을 죄 때문인 것으로 가르쳤고, 부모의 죄 특히 아버지의 죄는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출 34:7; 민 14:18; 신 5:9). 이로 인해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렘 31:29; 겔 18:2)는 속담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포로기를 전후해서는 이런 속담이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들이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습니다. 성경이 한 개인의 불행을 100% 자기 자신의 죄 또는 부모의 죄 때문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모세오경에 집중된 탓에 사람들의 생각에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세상에 유입된 자연법칙은 소위 말하는 엔트로피법칙(열역학2법칙)으로써 자연상태에서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生)은 다 죽음에로(老病死) 달려갑니다. 한 개인이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자연법칙에 따른 것이지 반드시 또는 100%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렀더라도 자기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기인한 불행이 많고 또 자연법칙 자체가 아담의 죄로 기인한 것이란 점은 강조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불행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인간이 겪는 불행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나타나심을 위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은 그 자체로써 불행하고 악한 것이지만 반드시 죄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와 같은 불행을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으로써는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하나님은 인간에게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불행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고통 중에 사는 이들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살림의 일 곧 사랑을 베풀라는 깊은 뜻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인간세계에 불행이 존재하는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대신에 완전행복을 주지 아니한 이유는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베풀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또 다른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일 곧 살림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믿었습니다.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듯이 예수님은 죽음이란 흑암이 찾아오기 전에 혹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이르기 전에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빛 아래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적인 모범이 인류를 구원하는 등대요 하나님과 그 분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는 인류의 빛인 것입니다.
여기서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빛을 볼 수 없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람이고,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살림의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상징입니다. 이들이 바로 당대의 유대인들이었고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눈뜨지 못한 사람들이 눈을 뜨고 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고 또는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덮고 있는 진흙을 씻는 일입니다. 6절에서 “진흙”은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죄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을 물과 성령으로 씻어내야 합니다(요 3:5; 딛 3:5).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벽 동남쪽 바로 안에 있었던 연못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성밖에 있던 기흔샘의 물을 지하통로를 파서 성 안쪽으로 끌어들여 만든 연못이었습니다. 그래서 7절의 말씀처럼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4절) 예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믿는 자들을 교회의 일군들로 보내십니다. 실로암은 어찌 보면, 교회일수도 있습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어 세우신 구원의 기관이요 물과 성령으로 씻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보내어져야할 자들은 눈이 어두워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어두워 살림의 일 또는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죽임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씻고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눈이 어두워 구걸하던 신앙이 변하여 증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11절의 말씀처럼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증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볼 수 있는 성한 눈을 가지고서도 율법주의의 형식과 논리에 빠져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멀쩡했지만 속에서는 썩어 냄새나는 자신들을 볼 수 없었던 영적인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우매한 율법주의에 빠져들게 하는 눈먼 인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분노를 금치 못하셨고 외식하는 자들을 저주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눈뜬 소경 또는 외식하는 위선자가 아닌가를 반성해 봐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잘못된 성서해석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진리에서 벗어나 흑암에 살게 하는 눈뜬 소경 또는 외식하는 위선자가 아닌가를 반성해 봐야 합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마 23:25) 위선자가 아닌가를 반성해 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복음에 눈뜨지 못한 사람들은 다 영적으로 맹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빛을 받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빛 가운데서 행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