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007: 인간은 누구인가?(창 1:26,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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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07: 인간은 누구인가?(창 1:26, 2:1-7)
오늘은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7절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살펴봤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첫째로 만들어진 존재 곧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러나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된 만물의 영장이란 것을 알 수 있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육과 영으로 된 특별한 존재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한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는 뜻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인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神)이 아닙니다.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란 필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가운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특별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한분 하나님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밖에 것들은 다 만들어진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합니다. 인간의 위에는 하나님만이 계십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분 말고는 어느 곳에도 신성(神聖)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한분만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어떠한 우상숭배도 거부하게 됩니다. 마귀나 그 세력들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습니다. 마귀도 귀신도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되면 마귀나 귀신들에게 제사를 바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의 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란 말은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예배와 신뢰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와 섬김의 의무를 가집니다. 인간끼리의 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들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신뢰와 책임입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적인 요소들은 책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이 약속과 책임을 다 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그는 자신이 부족한 존재요 죄인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겸손할줄 알아야 하고, 용서할줄 알아야 하고, 인내할줄 알아야 하며,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노력할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부족함을 채워가는 존재이지 이미 채워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고 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성서이외의 평가를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동물’로,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로, 호머는 ‘최약(最弱)의 존재’로, 세네카는 ‘사회적 동물’ 또는 ‘이성적 동물’로, 소포클레스는 ‘신기한 존재’로, 셰익스피어는 ‘만물의 영장’으로, 파스칼은 ‘신과 동물의 중간적 존재’ 또는 ‘생각하는 갈대’로, 엥겔스는 ‘관념의 생산자’로, 사르트르는 ‘자유의지의 행동인’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동’으로, 오펜라이머는 ‘우주의 불량소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특성에 따라서 ‘웃는 동물’, ‘옷을 입는 동물’, ‘말을 하는 동물’, ‘불을 이용하는 동물’, ‘문자가 있는 동물’, ‘세금을 내는 동물’ 등등으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또 인간에게 붙여진 학명(學名)도 다양합니다. 최초로 붙여진 학명은 잘 알려진 대로 ‘호모 사피언스’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영적인 지혜를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로 경제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 공작인이란 뜻으로 ‘호모 파베르’, 기능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하빌리스’, 형이상학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메타피시쿠스’, 광포한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데멘스’, 상징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심볼리쿰’,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루덴스’, 야만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바르바리타스’ 등으로 불렸습니다. 최근에는 ‘호모 노에티쿠스’라는 학명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정신적 충동에 의해서 자신의 의식이 우주 전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존재란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모든 평가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과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 코 입 귀 팔 다리와 같은 육체의 형상이나 모양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자연(對自然)과의 관계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어떤 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이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말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것의 형태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것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을 인간본성의 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으로 소유한 특성은 인성과 영성이외에 달리 없습니다. 인성이란 지성(혹은 이성), 감성, 의지, 그리고 관계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성이란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를 부여받은 것을 말합니다. 동물에게서 영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보고요, 다소의 지능과 감정과 의지와 관계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처럼 그 지성으로 학문을 창출할 수 없고, 그 감성을 문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으며, 본능 말고는 의지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관계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들도 사회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들처럼 복잡한 형태의 사회구조나 관계형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인성의 요소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로서, 만물에게는 청지기로서, 예배와 찬양, 관리와 보전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인간이 관심하는 신학과 신앙은 지성과 감성적 활동보다는 결단과 관계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예배와 신뢰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와 섬김의 의무를 가집니다. 인간끼리의 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자연만물에 대해서 청지기의 사명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는 신뢰와 책임이 우선되어야 할 계약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신뢰와 책임입니다.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책임적 존재인 인간이 이 계약을 파기할 때에 발생되는 불편한 관계에서 파생되고, 죄악은 이 악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과 만물 앞에서 신실한 책임적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형상과 모양의 형태 즉 인성만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습니다(엡 4:24; 골3:9-10).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실질적인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죄로 가려졌습니다. 따라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갈 5: 19-21)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와 같은 것들입니다.
셋째,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호흡을 뜻하고, ‘생령’은 짐승 곧 살아 있는 존재란 뜻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생기’는 단순한 호흡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생령’은 단순한 짐승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한 가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이며, 본문에서 ‘생기’는 하나님의 ‘기운’ 혹은 ‘숨’ 혹은 ‘호흡’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분출 또는 하나님의 영의 파생 곧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 뿌리를 둔 유한한 영의 파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고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단지 인성만이 아니라, 영혼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소의 신성을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비록 피조물이지만 영존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교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시시의 수도승 프랜시스(Francis of Assisi/1182-1226)처럼 영성을 높여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영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쌓아갔으면 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7절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살펴봤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첫째로 만들어진 존재 곧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러나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된 만물의 영장이란 것을 알 수 있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육과 영으로 된 특별한 존재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한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부족한 존재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는 뜻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인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神)이 아닙니다.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류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란 필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 가운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특별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한분 하나님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밖에 것들은 다 만들어진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합니다. 인간의 위에는 하나님만이 계십니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분 말고는 어느 곳에도 신성(神聖)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한분만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어떠한 우상숭배도 거부하게 됩니다. 마귀나 그 세력들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습니다. 마귀도 귀신도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神)인 것을 알게 되면 마귀나 귀신들에게 제사를 바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의 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란 말은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예배와 신뢰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와 섬김의 의무를 가집니다. 인간끼리의 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들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신뢰와 책임입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적인 요소들은 책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이 약속과 책임을 다 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그는 자신이 부족한 존재요 죄인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겸손할줄 알아야 하고, 용서할줄 알아야 하고, 인내할줄 알아야 하며, 사랑할줄 알아야 하고, 노력할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부족함을 채워가는 존재이지 이미 채워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고 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성서이외의 평가를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동물’로,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로, 호머는 ‘최약(最弱)의 존재’로, 세네카는 ‘사회적 동물’ 또는 ‘이성적 동물’로, 소포클레스는 ‘신기한 존재’로, 셰익스피어는 ‘만물의 영장’으로, 파스칼은 ‘신과 동물의 중간적 존재’ 또는 ‘생각하는 갈대’로, 엥겔스는 ‘관념의 생산자’로, 사르트르는 ‘자유의지의 행동인’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동’으로, 오펜라이머는 ‘우주의 불량소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특성에 따라서 ‘웃는 동물’, ‘옷을 입는 동물’, ‘말을 하는 동물’, ‘불을 이용하는 동물’, ‘문자가 있는 동물’, ‘세금을 내는 동물’ 등등으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또 인간에게 붙여진 학명(學名)도 다양합니다. 최초로 붙여진 학명은 잘 알려진 대로 ‘호모 사피언스’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영적인 지혜를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로 경제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에코노미쿠스’, 공작인이란 뜻으로 ‘호모 파베르’, 기능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하빌리스’, 형이상학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메타피시쿠스’, 광포한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데멘스’, 상징적인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심볼리쿰’,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루덴스’, 야만적 인간이란 뜻으로 ‘호모 바르바리타스’ 등으로 불렸습니다. 최근에는 ‘호모 노에티쿠스’라는 학명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정신적 충동에 의해서 자신의 의식이 우주 전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존재란 뜻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모든 평가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과 공통으로 갖고 있는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 코 입 귀 팔 다리와 같은 육체의 형상이나 모양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자연(對自然)과의 관계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어떤 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이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말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것의 형태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것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을 인간본성의 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으로 소유한 특성은 인성과 영성이외에 달리 없습니다. 인성이란 지성(혹은 이성), 감성, 의지, 그리고 관계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성이란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를 부여받은 것을 말합니다. 동물에게서 영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보고요, 다소의 지능과 감정과 의지와 관계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처럼 그 지성으로 학문을 창출할 수 없고, 그 감성을 문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으며, 본능 말고는 의지적 결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관계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들도 사회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인간들처럼 복잡한 형태의 사회구조나 관계형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인성의 요소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예배자로서, 만물에게는 청지기로서, 예배와 찬양, 관리와 보전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인간이 관심하는 신학과 신앙은 지성과 감성적 활동보다는 결단과 관계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예배와 신뢰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와 섬김의 의무를 가집니다. 인간끼리의 관계는 사랑과 섬김의 관계입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관리와 보전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자연만물에 대해서 청지기의 사명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관계는 신뢰와 책임이 우선되어야 할 계약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신뢰와 책임입니다.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책임적 존재인 인간이 이 계약을 파기할 때에 발생되는 불편한 관계에서 파생되고, 죄악은 이 악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과 만물 앞에서 신실한 책임적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형상과 모양의 형태 즉 인성만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습니다(엡 4:24; 골3:9-10).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실질적인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죄로 가려졌습니다. 따라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갈 5: 19-21)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 5:22-23)와 같은 것들입니다.
셋째,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호흡을 뜻하고, ‘생령’은 짐승 곧 살아 있는 존재란 뜻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생기’는 단순한 호흡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생령’은 단순한 짐승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한 가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이며, 본문에서 ‘생기’는 하나님의 ‘기운’ 혹은 ‘숨’ 혹은 ‘호흡’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분출 또는 하나님의 영의 파생 곧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 뿌리를 둔 유한한 영의 파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를 받고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단지 인성만이 아니라, 영혼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영적인 존재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소의 신성을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비록 피조물이지만 영존하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교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시시의 수도승 프랜시스(Francis of Assisi/1182-1226)처럼 영성을 높여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영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쌓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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