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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3002: 속전과 물두멍(출 3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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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47 2007.03.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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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2. 속전과 물두멍(출 30:11-21)

shekel_tyroy.jpg본문의 생명의 속전은 온역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온역이 돌면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온역을 면한다는 의미는 죽음을 면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속전은 출애굽기 13장 13-15절에 나타난 대속의 원리와 같은 맥락이다. 계수에 포함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령한 특권은 그러나 먼저 생명의 속전을 지불하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고전 11:27-29).

생명의 속전은 누구나 막론하고 반 세겔이었다. 부자도 반 세겔, 가난한 자도 반 세겔이었다. 모두가 같은 값의 속전을 치른다는 것은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데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무게나 생명의 가치는 다 동일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뚱뚱한 사람이든, 깡마른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생명의 무게나 가치는 하나님 앞에서 다 동일하다.

세겔은 금은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로써 성소 세겔, 왕실 세겔, 일반 세겔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성소 세겔은 일반 세겔보다 적게 나가고 왕실 세겔은 일반 세겔의 두 배에 해당되었다. 왕실에서 쓰는 세겔의 저울추가 일반이나 성소에서보다 더 무거운 것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일반 세겔의 중량은 대략 11.4그램이었고, 성소 세겔은 이보다 가벼운 9.7그램, 왕실 세겔은 일반 세겔의 두 배 무게였다.

여기서 우리는 성소 세겔이 일반 세겔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겔의 중량을 가볍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쳐진 반 세겔 4.85그램은 은이었을 것이다. 바쳐진 반 세겔 은은 성막건축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것은 매년 바치는 성전세로 발전되었다(마 17:24-27). 이스라엘에서 반 세겔은 노동자 이틀 치 품삯에 해당되었다. 예수님께서 은 30개에 팔리신 것은 120데나리온에 팔리신 것이고, 120일 노동자 품삯에 해당되는 가격이었다. 노예의 몸값이 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 당시 로마당국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성전세를 허용하였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은 어디에서 살든, 살고 있는 나라에 상관없이 성전세를 예루살렘에 내야했다. 예수님 당시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인구가 대략 45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5분의 1만 성전세 납부자로 본다 해도 일 년이면 45만 세겔이 걷히는 셈이다. 은 4365킬로그램에 해당된다.

광야에서의 인구조사에서는 여자와 아이와 노인을 뺀 나머지 20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을 계수했다. 인구조사의 목적은, 먼저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민 1:2,46, 26:2-51, 삼하 24장, 대상 21장)를 세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로 제의적인 목적으로 레위인들이 20세에 성막에 들어가 봉사하는 법을 배우고, 25-50세까지 성막에서 봉사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구조사의 목적은 성막건축에 필요한 비용을 징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6절, 민 1:2).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죄의 속박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신 생명의 속전이었다. 마땅히 우리 자신들이 치러야할 값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치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친히 그 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살고 영생할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속전은 우리 예수님의 구속을 위한 영원한 속전의 예표요 모형이었던 것이다.

bronze_basin.jpg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성소의 뜰, 곧 성소 바깥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놓였다.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고,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하나님 앞에 사를 때에도 수족을 씻어야 했다(20절).

이 명령은 성막 내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씻음은 단지 의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위생에도 아주 중요했다. 광야는 사막이다. 먼지가 많은 곳이다. 또 제단에서 발생하는 도살로 인해서 손발이 짐승의 피나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었을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먼지나 피와 같은 더러움을 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결의식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다.

성막에 쓰인 놋은 그것이 기둥을 받치는데 쓰인 놋이든, 놋그릇이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그리고 물은 침례나 세례를 예표한다. 따라서 놋으로 만든 물두멍의 물로 수족을 씻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와 침례 또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씻고 사함을 받은 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또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예배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물두멍의 물로 씻어 죽음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침례나 세례를 행위로 간주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을 말씀으로 해석한다. 물두멍의 물이 인류의 죄를 속하기에 넉넉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결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표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긴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보혈로 씻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물두멍에 자신을 비춰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을 말씀으로 해석할만한 나름의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행위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목적을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행위를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고 바르게살기를 원하신다.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로 말이다.

침례나 세례를 행위로 볼 필요가 없다. 침례나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의 서약이요 고백인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백과 서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없다. 혼인식에서 서약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서약이 없이는 성혼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시내산에서 맺은 서약 때문이었다. 침례식이나 세례식이 갖는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기 위한 서약식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침례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서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제단과 성소에 나아갈 자격을 얻지 못한다. 시내산언약을 ‘구약’이라고 말하고 침례식과 세례식 때의 언약을 ‘신약’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격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침례나 세례인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침례식 때의 설교, 곧 침례식 때의 서약을 상기시키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다. 고난을 받아 믿음을 버릴 수도 있는 성도들에게 처음 믿고 침례 받을 때의 감격을 회상시키는 말씀인 것이다. 베드로는 3장 21절에서 침례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신구약성서 모두에서 예언자들과 주의 종들이 펼친 활동은 회개운동과 회복운동 두 가지였다. 이 두 운동의 정점이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초림으로써 이스라엘과 성전예배의 문자적 회복의 시점이고,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재림으로써 몸의 부활과 우주회복의 시점이다. 따라서 유대교이든 기독교이든 선교는 이 두 가지 운동 곧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고, 선교의 완성은 만유회복(apokatastasis panton, 고전 15:27-28)이다.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영혼부활이고, 둘째는 육체부활이다. 영혼부활은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교회회복을 말하고, 육체부활은 성도 개개인의 몸의 회복과 우주회복을 말한다. 영혼회복과 교회회복은 회개에서 비롯되고, 몸의 회복과 우주회복은 주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강조하는 다섯 손가락 실천(Five Fingers Exercise), 곧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가족의 식구가 되며, 천국에 들어가 시민권을 받고 월계관을 받아쓰기까지 성령님의 인침과 보증과 인도함을 받는다는 주장도 회개와 회복이 핵심내용이다. 믿음과 신앙고백이 같고, 회개와 침례가 같다. 신앙고백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증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침례는 마음으로 회개한 것을 증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같은 행위의 최종적 목적은 회복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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