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16: 만나와 메추라기(출 1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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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만나와 메추라기(출 16:1-36)
만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특색은
달콤하다는 것과 재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만나는 건조된 식물 수액이거나 수액을 먹은 벌레들이 분비한 단물이다. 위성류(tamarisk tree, 에쉘나무) 나뭇가지 끝에 기생하는 주머니깍지벌레과의 벌레들이 배설한 분비액이 출애굽기의 만나와 가장 근접하다. 이밖에도 딱정벌레류의 곤충이 분비하는 식용 꿀인 ‘트레할라’(Trehala) 만나, 석이(manna-lichen) 만나, 낙타가시나무의 마른 수액인 황기(Hedysarum) 만나, 코토네아스터 떨기나무의 마른 수액인 ‘쉬르 케시트’(Shir-Khesht, 페르시아어로 ‘마른 우유’란 뜻) 만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만나들은 매일 비 같이 내린 하늘양식(bread from heaven)(4절)에 대한 설명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에 메추라기가 많았다는 증거가 있다. 대영박물관 네바문 묘실(the tomb-chapel of Nebamun) 전시실에 11개의 벽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개는 <그물을 쳐서 메추라기를 잡는 사람들>을 그린 벽화이다. 이 묘실의 주인공은 네바문(Nebamun)이라 불린 이집트 관리로서 주전 1400-1300년경의 인물이었다.
출애굽기
16장에
실린 만나와 메추라기이야기는 애굽에서 나온 지 꼭 한 달이 지난 두 번째 달(Iyar) 십오일에 생긴 일이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첫 번째 달 니산 16일이었다.
여기서
16일은
음력 보름 다음 날을 말한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져 가던 때의 일로 생각이 된다.
먹을
양식이 떨어져 가면서 이스라엘 회중의 그 특유의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온 것 같다.
이스라엘
회중의 원망과 불평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이 광야에서 자유인생활보다 더 좋았다는 악의적인 내용이었다.
2-3절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식주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이다. 이 문제에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탓할 것이 못되지만, 믿음여부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자주 드러나는 곳이 의식주문제이다.
허름한
옷에 떠돌이 텐트생활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그렇다 쳐도,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없다면 불평과 원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아브라함이후
이미 최소 430년에서
최고 645년이나
오래된 피맺힌 한의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난 히브리인이라면 모진 모래바람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싸워야하지 않겠는가,
금양모피를
찾아 모험의 길을 떠난 이아손이라면 거친 풍랑과 금양모피를 지키고 있는 용과 싸워야하지 않겠는가,
반인반수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가기를 자청한 테세우스라면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의 끈,
희망의
끈,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좁은
길,
험한
길,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로 알려진 천로역정에 나선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심과 유혹의 마귀와 싸워야하지 않겠는가,
빛나는
월계관을 받아쓸 최후승리자(nikomen)가
되고자
한다면
신실한 믿음과 끈질긴 인내를 보여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난 용사에게 필요한 무기는 당장의 먹을 것과 마실 것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에 찬 믿음일 것이다. 만일 그에게 희망이 있고 믿음이 있다면 불평과 원망이 앞서기보다는 오히려 감사와 기쁨이 먼저 나올 것이다. 만일 그 반대로 불평과 원망이 언제나 감사와 기쁨을 지배하고 억누른다면 그의 희망과 믿음은 무디고 녹 쓴 칼처럼 쓸모가 없게 되고, 그의 피나는 노력은 허무하고 허탈한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희망을 성취하려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얻고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정당한 값을 치러야한다. 값을 치르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에는 선물로 받거나 강탈하거나 훔치는 방법밖에 없다. 선물로 받으려면 주는 사람의 마음을 살만한 응당한 행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얻고자 하는 것을 가장 손쉽게 아무 탈 없이 얻는 방법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얻고자 했는데, 진실로 그 희망은 4천년이나 오래된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지만, 그 대가가 3천년에 달하는 혹독한 광야생활이었고 떠돌이와 노예의 삶이었다. 가나안땅을 찾아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힘들어한 것이 바로 그 혹독한 떠돌이 광야생활이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결과가 믿음이 없고 참혹하고 원망이 가득한 배신행위였지만,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서 야훼 하나님께 울부짖기라도 했다.
용사를 무너뜨리는 적은 용사 안에 있다. 영광의 탈출을 감행한 히브리인들을 무너뜨린 적은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있었다. 외부의 적은 용사이신 야훼 하나님이 막아주고 계셨기 때문에 그 어떤 민족도 이스라엘 민족을 넘보지 못했다. 오히려 타민족들은 하나님이 히브리민족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로 인해서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란 책을 쓴 존 M. 오브라이언은 책의 부제로 ‘보이지 않는 적’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천하의 젊은 장수 알렉산더 대왕을 쓰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알렉산더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것이다. 외부의 칼날에 목숨을 잃지 않는 영웅은 반드시 '자기 안의 적'의 손에 쓰러지게 되어 있다. 알렉산더도 그랬다. 오브라이언은 알렉산더를 쓰러뜨린 내부의 적은 다름 아닌 미친 술 파티와 힌두교적 허무주의였다고 했다.
역사가 토인비도 지구상에서 한 때 찬란한 꽃을 피웠지만, 시들고 멸망해 버린 21개의 문명들을 연구한 끝에 결론내리기를, 21개의 문명들 가운데 19개 문명이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곧 내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멸망했다고 하였다. 이 ‘내부의 적’이 바로 ‘오만’이다. 토인비는 ‘오만’을 ‘자기우상’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인간의 문명이 쇠퇴되고 해체되는 것을 토인비는 ‘네메시스’ 곧 ‘응보’라고 불렀다. 그는 조직이 붕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이유를 그 조직이나 국가의 내부의 적인 사회적 병폐에서 찾았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힘센 사람에게 맞아 죽거나 차에 치어 죽기보다는 몸이 병들고 속이 썩어서 죽는 경우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오만하기 때문이고, 자기우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도 오만하기 때문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은 남이 나를 괴롭히거나 헐뜯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으면, 내 형편과 내 처지에 관계없이 언제나 행복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 믿음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만나와 메추라기는 어째도 주어지는 것이지만, 평강과 행복은 감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 배불리 먹고도 불평과 원망 속에 살 수 있고, 헐벗고 굶주리고도 평강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 몫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이다. 이스라엘 회중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배불리 먹고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그들 모두는 결국 불평과 원망 때문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음의 평강과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과 성공과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성령님의 동행에서 오는 것이다. 겸손하고 감사하는 사람만이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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