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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3: 모세의 소명과 사명(출 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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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870 2006.05.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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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세의 소명과 사명(3:1-22)

buriningbush_torah.jpg 출애굽기 3장은 모세의 소명과 사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시내산과 호렙산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시내산은 수풀 산이라는 뜻이고 호렙산은 건조한 산이란 의미로 서로 상반된 개념을 갖는다. 이 산은 이집트 땅인 시나이반도 남단에 위치한 예벨 무사’(Jebel Musa)곧 전통적으로 모세의 산으로 알려진 산이란 설과 아라비아의 땅인 미디안 광야에 위치한 -라오즈’(Al-Lawz) 산이라는 새로운 설로 나뉘어있다. 미디안 광야는 모세가 40년간 짐승을 유목하였던 곳으로써 지형지물에 익숙한 곳이다. 미디안 광야와 시나이반도 사이를 아카바만이라 불리는 홍해가 갈라놓고 있어서 모세가 짐승 떼를 몰고 건너갈 수 없는 곳이다. 아무튼 이 논쟁의 중심에는 정확한 시내산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서 엄청난 관광수입을 빼앗기느냐 빼앗아오느냐의 문제, 곧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권다툼이 있다.

시내산과 호렙산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산을 부를 때는 호렙이라 하지만, 정상을 가리킬 때는 시내라고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산 정상에 있는 두 봉우리 중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라는 것이다. 셋째는 두 산이 같은 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호렙은 양떼를 몰고 올라갈 수 있는 곳이고, ‘시내는 지형이 험악해서 노약자나 짐승의 떼가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호렙시내는 같은 산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아무튼 이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는 사명을 띠고, 40년 전 도망 나온 애굽으로 들어갔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후에는 이 산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토라, 곧 십계명과 율법을 받는다(20:1-17). 그러니까 시내산 혹은 호렙산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가 소명과 사명을 받은 곳이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언약식을 가졌던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내산 언약만큼 중요한 것이 없고, 시내산 언약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에 대한 이해도 없다.

st_catherine_monastery.jpg 하나님께서 이곳 산에서 모세에게 떨기나무에 핀 불꽃으로 나타나셨다. 모세가 이 떨기나무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불꽃이 피어오르는데도 나무는 타지 않는 신기한 현상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불꽃을 하나님의 계시라 부를 수 있다. 피조물은 인간이든 천사든 마귀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는 언제나 이 나무를 태우지 않는 불꽃처럼 어떤 변신의 모습뿐이다. 그리고 이 변신의 모습은 얼마든지 그 모습이 다양할 수 있다.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그 어느 것도 참 하나님의 모습이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이때의 계시는 예수라 불리던 한 인간의 모습이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 곧 사랑과 희생과 자비와 긍휼과 가르침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는 불꽃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본 것이고, 만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듣는 하나님, 곧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감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귀로 듣는 하나님이란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꽃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세미한 음성으로 모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토라 두루마리를 담아두는 법궤를 하나님의 보좌로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면 어디나 다 거룩한 곳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의 신, 허물의 신, 가식의 신, 허영의 신, 불신의 신, 의심의 신, 패배의 신, 절망의 신, 좌절의 신을 벗어던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몸으로 서야하는 것이다. 그분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모세가 신고 있던 샌들이 바로 죄악의 신, 허물의 신, 가식의 신, 허영의 신, 불신의 신, 의심의 신, 패배의 신, 절망의 신, 좌절의 신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도록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러한 신들을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sinai_mt.jpg80년 세월을 무상한 인생살이와 패배의식에 지치고 좌절감을 느끼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그때에 비로소 모세는 과거의 절망의 신을 벗어버리고, 희망의 새신으로 갈아 신고, 새롭고 의미 있는 일에 뛰어들 수가 있었다.

야곱과 요셉이후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 민족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결코 죽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결코 자기 백성을 잊고 지내는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단련하시고 키우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이제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 나온 후 40년 동안을 말 못하는 짐승을 먹이는 목자로서 훈련을 쌓았다. 그가 무지한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지도력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바로 이 40년 세월을 광야에서 말 못하는 짐승을 먹인데서 나왔다고 본다. 비록 우리가 보고 느끼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고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보내는 이 인고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복주시기 위해서 섭리하시고 경륜하고 계시는 분이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15절에 따르면,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이는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었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영존하는 분이시요, 이전 세대에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시오, 지금 여기서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며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임재 하시어 모세를 부르셨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다. 모세를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어 도망쳐 나온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셨다. 그러자 모세는 13절에서 하나님께 이름은 물었고, 그 물음에 하나님은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을 신원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내시기를 원하셨다. 빈손으로 이끌어내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이집트인들로부터 은혜를 입게 하여 은금의 패물들과 의복을 지니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과 섭리와 경륜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주시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금은패물과 의복까지 넉넉하게 지참하여 떠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결코 궁색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을 깨닫고 사명을 알고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나게 하시고, 신앙생활의 광야에서 고통스런 나날들이 지속된다할지라도 언젠가는 우리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여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없음을 있음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힘이다. 희미한 것을 분명하게,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아득한 것은 가깝게, 안 보이던 것을 보이게, 안 들리던 것을 들리게, 빈 것을 가득 차게, 꿈을 현실로 바꾸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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