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49: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창 3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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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49: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창 32:21-32)
이름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그리고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구소련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구소련의 도시 이름은 세상이 바뀔 때마다 바뀌곤 했는데, 이를테면 옛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10년 후에 레닌그라드로 다시 바꿨으며, 구소련 붕괴 후에는 다시 페테르스부르크로 바꿨습니다. 쯔아리쯔인이란 인구 50만의 도시는 스탈린 집권 후 스탈린그라드로 바꿨는데, 스탈린 격하운동 때 볼고그라드로 다시 바꿨습니다. 구소련 사람들은 그 아름답던 세르게이, 이반, 에프게니, 소냐, 나타샤 같은 이름을 스탈린 시대에는 트락토르(트랙터), 일렉트리체스토프(電氣), 콜호즈(馬團農場), 오블리가치야와 같은 괴상망측한 이념적 이름으로 바꿨고, 구소련 붕괴 후에는 다시 예전의 이름으로 환원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신성불가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악마에 손상 입지 않으려고 어릴 때는 아명으로 부르고,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자(字)로 부르고, 호(號)로 호칭했을 뿐, 본명은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은 윗사람이나 부를 수 있는 존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편지 겉봉투에도 '사동 김대감댁(寺洞金大監宅)'이니 하여 이름을 써서는 안 되었고, 문패도 '참의 윤댁(參議尹宅)'이니 하여 벼슬과 성만을 썼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이름을 바꿀 때는 임금의 결재를 받아서 할 만큼 중대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근대에 와서는 식모(食母)를 가정부(家政婦)로, 다시 가사 보조원(家事補助員)으로 바꿨고,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우체부를 우편배달부 등으로 바꿨습니다.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창세기 32장 28절에서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해 이겼던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는 ‘씨름하다’, ‘싸우다’. ‘투쟁하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남을 속이기에 능숙하고 남의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28절)란 뜻인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그의 열두 아들과 후손들, 더 나아가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고 있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더 포괄적이고 영적인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민족의 모든 이방인까지도 포괄하는 이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영세 전부터 감춰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했고, 자신은 그 비밀을 맡은 일군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사건은 야곱 개인의 구원사건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의 구원사건이요, 더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구원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얍복 강가에서의 개명사건은 흑암에 살던 온 인류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문자 그대로 브니엘의 축복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로 이 사건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속이는 자’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인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고대근동지방 사람들도 이름을 중시했습니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고 정체성을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한 개인의 상황과 배경과 성격은 물론이고 장차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인생행로까지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름대로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과연 야곱은 이름대로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실제로 그가 태어난 상황을 묘사한 것이고(25:19-26), 간교하고 속이기 잘하는 성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27:11-24).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던 것입니다. 이 이름이 가지는 뜻은 야곱이 더 이상 간교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장자권자란 사실을 인정한 것이며,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자로 거듭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야곱은 형을 속인 일로 인해서 20년간을 타향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에서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로인한 두려움이 야곱을 놓아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왕 앞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내었노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을 때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기 이전에는 여러 면에서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았으나 이제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2장 2절에 보면,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으로 정한 새 이름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를 일컬어 우리는 ‘크리스천 처치’(Christian Church) 곧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갖는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갖는 공동체는 투쟁적으로 살아야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붙잡고 씨름을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천사를 놓아준,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받은 이름입니다. 누구하고든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야곱, 에서하고도 싸워야 했고, 이삭과도 싸워야 했고, 라반과도 싸워야 했고, 심지어 하나님과도 싸워야 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싸우지 않고서는 제몫을 차지할 수 없었던 야곱은 오늘날까지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란 이름아래서의 싸움은 제몫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남들의 눈에는 속임수로 비쳐졌지만, 브니엘에서 겪었던 사건이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은 이후의 투쟁은 항상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불의를 겪는 입장에서 정의를, 흑암 속에서 빛을, 혼돈 속에서 질서를, 죽음 속에서 생명을 쟁취하기 위한 선의의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 이스라엘, 곧 새 언약공동체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과거 2천년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코자 투쟁해 왔던 것입니다. 이 투쟁을, 곧 야곱의 불굴의 정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어가야할 것입니다. 악과 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는 하나님의 용맹한 전사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이전에 인간의 생각과 사단의 유혹 속에서 살았던 삶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어 그들을 보호하고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나아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통치자가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 없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자라잡고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이름,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새 이름을 받은 만큼 이름값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분께만 순종하며,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야곱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야곱에게 복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야곱처럼 그 어떤 난관이라도 기도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름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그리고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구소련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구소련의 도시 이름은 세상이 바뀔 때마다 바뀌곤 했는데, 이를테면 옛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는 1914년에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10년 후에 레닌그라드로 다시 바꿨으며, 구소련 붕괴 후에는 다시 페테르스부르크로 바꿨습니다. 쯔아리쯔인이란 인구 50만의 도시는 스탈린 집권 후 스탈린그라드로 바꿨는데, 스탈린 격하운동 때 볼고그라드로 다시 바꿨습니다. 구소련 사람들은 그 아름답던 세르게이, 이반, 에프게니, 소냐, 나타샤 같은 이름을 스탈린 시대에는 트락토르(트랙터), 일렉트리체스토프(電氣), 콜호즈(馬團農場), 오블리가치야와 같은 괴상망측한 이념적 이름으로 바꿨고, 구소련 붕괴 후에는 다시 예전의 이름으로 환원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신성불가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악마에 손상 입지 않으려고 어릴 때는 아명으로 부르고,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자(字)로 부르고, 호(號)로 호칭했을 뿐, 본명은 임금이나 아버지와 같은 윗사람이나 부를 수 있는 존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편지 겉봉투에도 '사동 김대감댁(寺洞金大監宅)'이니 하여 이름을 써서는 안 되었고, 문패도 '참의 윤댁(參議尹宅)'이니 하여 벼슬과 성만을 썼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이름을 바꿀 때는 임금의 결재를 받아서 할 만큼 중대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근대에 와서는 식모(食母)를 가정부(家政婦)로, 다시 가사 보조원(家事補助員)으로 바꿨고,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우체부를 우편배달부 등으로 바꿨습니다.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창세기 32장 28절에서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해 이겼던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는 ‘씨름하다’, ‘싸우다’. ‘투쟁하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남을 속이기에 능숙하고 남의 ‘발꿈치를 잡는다’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28절)란 뜻인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그의 열두 아들과 후손들, 더 나아가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고 있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더 포괄적이고 영적인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민족의 모든 이방인까지도 포괄하는 이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영세 전부터 감춰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했고, 자신은 그 비밀을 맡은 일군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사건은 야곱 개인의 구원사건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의 구원사건이요, 더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구원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얍복 강가에서의 개명사건은 흑암에 살던 온 인류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문자 그대로 브니엘의 축복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로 이 사건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속이는 자’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인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고대근동지방 사람들도 이름을 중시했습니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고 정체성을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한 개인의 상황과 배경과 성격은 물론이고 장차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인생행로까지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름대로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과연 야곱은 이름대로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실제로 그가 태어난 상황을 묘사한 것이고(25:19-26), 간교하고 속이기 잘하는 성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27:11-24).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던 것입니다. 이 이름이 가지는 뜻은 야곱이 더 이상 간교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장자권자란 사실을 인정한 것이며,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자로 거듭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야곱은 형을 속인 일로 인해서 20년간을 타향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에서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로인한 두려움이 야곱을 놓아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왕 앞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내었노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을 때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기 이전에는 여러 면에서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았으나 이제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62장 2절에 보면,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으로 정한 새 이름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를 일컬어 우리는 ‘크리스천 처치’(Christian Church) 곧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갖는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갖는 공동체는 투쟁적으로 살아야할 운명이었다는 것을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붙잡고 씨름을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천사를 놓아준, 그러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받은 이름입니다. 누구하고든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야곱, 에서하고도 싸워야 했고, 이삭과도 싸워야 했고, 라반과도 싸워야 했고, 심지어 하나님과도 싸워야 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싸우지 않고서는 제몫을 차지할 수 없었던 야곱은 오늘날까지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란 이름아래서의 싸움은 제몫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남들의 눈에는 속임수로 비쳐졌지만, 브니엘에서 겪었던 사건이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은 이후의 투쟁은 항상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불의를 겪는 입장에서 정의를, 흑암 속에서 빛을, 혼돈 속에서 질서를, 죽음 속에서 생명을 쟁취하기 위한 선의의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 이스라엘, 곧 새 언약공동체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과거 2천년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코자 투쟁해 왔던 것입니다. 이 투쟁을, 곧 야곱의 불굴의 정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어가야할 것입니다. 악과 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하는 하나님의 용맹한 전사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이전에 인간의 생각과 사단의 유혹 속에서 살았던 삶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동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어 그들을 보호하고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나아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통치자가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 없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중심에도 하나님께서 자라잡고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 이름,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이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새 이름을 받은 만큼 이름값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분께만 순종하며,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야곱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야곱에게 복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야곱처럼 그 어떤 난관이라도 기도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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