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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0: 20년만의 형제 상봉(창 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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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102 2005.09.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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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0: 20년만의 형제 상봉(창 33:1-20)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득권층인 원로원은 주전 50년에 카이사르의 로마소환과 군대해산을 결의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주전 49년 1월 10일 원로원의 결의에 불복해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을 넘습니다. 그 국경에 놓인 강이 바로 루비콘인데, 이후로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을 건넌다는 것은 생사를 건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것이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서 이생과 저승 사이에 비통의 강인 아케론 강, 시름의 강인 코퀴토스 강, 불의 강인 플레게톤 강, 망각의 강인 레테 강, 그리고 증오의 강인 스튁스 강이 있다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곱이 얍복 강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의 천사와 생사를 건 씨름을 했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속이는 자요,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 자란 ‘야곱’ 대신에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는 형 에서와 20년만의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문제해결의 답을 얻게 되니까,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에서와의 상봉이 화해와 기쁨으로 매듭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분열이 변하여 일치가 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서의 칼날이었습니다. 에서는 용사나 다름없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에서의 장자권과 에서가 받아야할 축복까지 가로챈 야곱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인과응보였습니다.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이 야곱을 더욱 두렵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 ‘이스라엘’을 얻기 전까지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한”(32:7) 심정이었습니다. 노심초사(勞心魚思)하던 야곱이 생각해 낸 대응책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써 에서에게 풍성한 선물을 보내어 그의 들끓는 분노를 식히는 것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에게 줄 수많은 짐승들을 종류별로 구별해서 각각의 종들에게 맡겨서 에서를 향해서 가게 하였고, 가족들도 모두 강을 건너게 한 후에 두 패로 나눠서 서로 거리를 두고 이동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강가 높은 언덕(브니엘)에 올라 밤이 맞도록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천사를 붙잡고 씨름하며 간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듣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어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브니엘의 아침햇살을 맞으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행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다가 둔부의 힘줄이 끊어져 비록 다리를 절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날아갈듯이 가벼웠을 것입니다. 

야곱을 만나 주시고, 기도를 들어 주시고, 언약을 확약해 주시고, 새 이름까지 주신 하나님은 야곱의 꾀나 기지로써는 달랠 수 없는 에서의 분노를 이미 식혀 놓고 계셨습니다. 만일에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 않았다면, 그의 기지가 아무리 뛰어나고, 그의 선물이 아무리 풍성하였다 해도 20년을 하루같이 와신상담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에서의 마음을 삭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눈 녹듯이 풀어주니까 에서의 얼굴에 독기가 사라지고 그 마음이 천사처럼, 그 얼굴이 하나님처럼 밝은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를 극적으로 상봉한 후에 말하기를,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10절)라고 하였습니다. 위로와 사랑의 하나님이 에서에게 임하여 그의 얼굴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복수의 칼날로부터 야곱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 어떤 두려움과 그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하나님께서 그 큰 어려움을 힘들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시고 섭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는 환난 중에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롬 5:3).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환경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곧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장자의 축복권을 동생 야곱에게 강탈당했다고 생각한 에서는 야곱에 대해 미움의 감정이 분수처럼 폭발하였습니다. 야곱에게 이미 축복해 버려서 더 이상 축복할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말을 아버지 이삭에게 들었을 때, 에서는 방성대곡하면서(27:34) 야곱을 죽기기로 작정하였습니다(27:41). 그 이후로 에서의 삶은 복수를 절치부심(切觸鷹心)하는 삶이었습니다. 더욱이 근동지방 사람들의 복수의 일념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는 그를 에서의 칼에서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20년 동안이나 에서의 마음속에 쌓여 온 미움의 감정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하셨고, 그 자리에 대신 사랑이 들어차게 하셨습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일 2:9)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움은 성도의 영혼을 좀 먹는 것입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잠 15:17)고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하셨습니다(요일 3:15).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자기를 죽인 자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를 구한 스데반 집사나 아무 죄 없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성도들이 닮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한편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 또한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에서 미움을 걷어 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십시다.

셋째, 하나님께서 주변 환경을 바꿔 주시니까 분열이 변하여 일치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고, 에서의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자 몸과 마음이 서로 분열되어 있던 두 형제는 일치하고 화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제의 화해와 화합을 이끌어 낸 연출자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얍복 강가의 결사적 기도가 있기 전 선물을 보낸 것이 인간적인 술책이라면, 이제 하나님에 의해 바꾸어진 환경 아래 야곱이 에서를 ‘주’라 칭하며 예물을 주는 행위는 형에 대한 야곱의 진실한 사랑의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예물을 받는 에서도 물욕(物愁)이 아닌 진정한 형제 재회의 기쁨의 증거로 생각하며 받았던 것입니다. 바로 분열이 일치로 바뀌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뇌물이 변하여 선물이 되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가속화와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해 인간 상호간에 불신이 초래되는 가운데 빈익빈 부익부(賞益賞 富益富) 현상이 첨예화되고, 계층간에 반목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이 정치적, 종교적 분열 못지않게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이런 못된 요소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 요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를 회구하는 성도의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교회가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라고 고백했던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처럼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기도 서두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하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생활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을 의식하고 또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주변의 여건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면, 불가능할 것 같던 일도 척척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환경을 바꿔 주시면,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환경을 바꿔 주시면,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환경을 바꿔 주시면, 분열이 변하여 일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변의 환경을 바꿔 주시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야곱처럼 최후의 승자가 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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