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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민중의 친구 사람의 아들(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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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255 2004.07.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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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민중의 친구 사람의 아들(눅 9:51-62)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말씀에 권세가 크신 분으로 소개하였고, 마가가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행동에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소개하였다면, 누가는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을 성도들의 모범자로 소개하려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방법에 차이점을 보이는 이유는 독자들이었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헬라인들의 관심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방법은 각기 달랐어도 그 목적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누가는 안디옥 출신의 의사로서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이자 선교사였습니다. 누가는 신약성서들 가운데서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는데, 주후 58년부터 60년까지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 유대지방에 거주하면서 착실하게 예수님과 초대교회설립에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이 자료들을 가지고 헬라시대의 전기방식으로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기록목적이 매우 다양하지만, 오늘은 대표적인 기록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나그네 민중의 친구 사람들의 아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누가복음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승천’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신 것을 말하는데 누가가 이 부분을 가장 먼저 큰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승천하실 기약”이란 말 대신에 “영광을 얻을 때”(요 12:23)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부활 후 40일과 승천에 대한 의미를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영적부활) 후에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40이란 고난의 숫자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승천 또는 영광을 얻는 때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에 사막에서 40년을 자기 집 없이 나그네 천막생활을 하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복지에 들어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후 40이란 숫자, 이 숫자를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에 사막에서 40년을 자기 집 없이 나그네 천막생활을 한 것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성도들의 삶은 그야말로 나그넷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승천 또는 영광의 때를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한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 곧 사실적 표현이지만,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의미 곧 예수님 믿고 거듭난 후에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다짐한 신앙생활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서론부분이고, 4장부터 9장까지는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 10장부터 19장까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넷길, 20장부터 24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부분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나그넷길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는 이 나그넷길을 9장 51절부터 19장 44절까지 전체 24장 가운데 42퍼센트를 차지하는 무려 10장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나그넷길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나그넷길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은 9장 52-56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나그넷길과 반복해서 배척당하시는 일들이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몇 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일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예언자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인 4장에서 갈릴리지역을 대표하는 고향 나사렛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실 뿐 아니라 살해위협까지 받고 계시고, 갈릴리지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시점인 9장에서 예루살렘에서 배척당하여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고,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인근마을 여리고에서의 일을 소개하는 19장에서 열 므나비유를 통해서 배척당하여 죽게 되실 것을 암시하셨고, 예루살렘입성 직후부터는 예수님체포에 대한 구체적인 음모가 진행되었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정치․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민중과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고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십니다. 로마제국 당시 이스라엘은 세 개의 행정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큰 호수를 끼고 있는 북쪽이 갈릴리지방이고, 가운데가 사마리아지방이고, 사해바다를 끼고 있고 메마른 남쪽이 유대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지방에 속한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가운데 지방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남쪽 유대지방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배척의 정도나 강도를 말해 주는 것으로써 땅도 예수님을 버렸고 하늘도 버렸기 때문에, 9장 58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의지할 곳 없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지해서 허공에 매달린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그 험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비참하게 죽는 것에서 끝장을 보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승천과 하늘의 영광을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아 영광과 찬양을 받고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는 다름 아닌 복음서 기록 당시에 성도들이 처했던 어려운 형편들을 말해주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순례를 대변하는 것이란 점을 이어지는 9장 57-62절의 제자직에 관한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57절의 “길 가실 때”란 말은 문자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하늘나라의 수도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이 좁은 길이요 순탄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인 것은 58절의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62절의 말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도들이 천성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복음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할 수도 있지만, 그 마지막은 부활이요 승천이요 그 최후는 영광이란 점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다 간 후에 해처럼 빛나는 부활의 영광이 있고 승천의 영광이 있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마라톤대회에 나선 주자처럼 그 길을 완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험한 길을 끝까지 완주하시고 상을 받으셨는가를 우리에게 두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천로역정 곧 천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그 길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쟁기 잡은 손을 중도에서 놓아버리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신약성경을 쓴 다른 어떤 저자들보다도 ‘성령’과 ‘성령충만,’ ‘기도’와 ‘기도하다’란 단어를 월등히 많이 사용한 저자입니다. 성령에 관한 단어가 마태복음에 17번, 마가복음에 23번, 요한복음에 21번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38번이나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쓰인 69번까지 합하면 무려 107번이나 됩니다. 기도에 관한 단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90번 사용되고 있는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그 절반이 넘는 47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누가는 성령충만함과 기도를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기도생활만이 성령충만할 수 있는 길이고 성령충만해야만 중도에서 포기치 않고 천성 예루살렘으로 가는 나그넷길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생활과 성령충만함을 성도들에게 모델로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어떤 체험을 하셨으며, 어떻게 기도하셨고, 또 어떤 때에 기도하셨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 신령한 체험들을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 문이 열렸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으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또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입은 옷에서 광채가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율법과 예언에 관한 신령한 담화를 나누셨습니다(눅 9:28-29). 둘째,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1장 5절부터 13절의 비유에서 ‘강청(强請)의 기도’를 강조하셨고, 18장 1절부터 8절의 두 번째 비유에서는 ‘끈질긴 기도’를 강조하셨고, 18장 9절부터 14절의 세 번째 비유에서는 ‘겸손의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강청의 기도를 강조하실 때에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까지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공직생애를 앞두고 40일간 금식기도로 준비하셨고(4:1),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에 피하셔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도를 하셨습니다(5:16). 제자선택을 앞두고 산에 올라가 철야기도 하셨고(6:12),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앞두고 홀로 외로이 기도하셨습니다(9:18).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11:1).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 하셨습니다(22:32).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기도하셨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누가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고 적었습니다.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드리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죽는 순간까지도 기도하셨습니다. 배척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 하셨습니다. 사단에게 강력한 도전을 세 차례에나 받고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사십일 금식기도 때문이었습니다(눅 4:1-13). 죽음을 말리는 베드로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도 기도였습니다(눅 9:18).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끊을 수 있었던 힘도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며 행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눅 22:41-44). 십자가에서조차 고고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기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아들 곧 인자로서 나그네의 삶을 사시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지 않은데 있었습니다.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예수님을 소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쪽보다는 오히려 인자 쪽에다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겸손을 나타내기도 하고 메시아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칭호는 제 삼자가 예수님을 호칭할 때 쓴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호칭하실 때 쓰신 표현이었습니다. 인자로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었고, 성령충만한 분이셨을 뿐 아니라, 민중의 친구로서 짧지만 아름다운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그네였지만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가난한 자와 여인, 세리와 죄인,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난한 자나 여인, 세리나 죄인,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고 또 그와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14개의 선교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강도만나 죽어가던 자를 살린 강도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근접할 수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다가오시기보다는 우리와 같이 낮은 신분의 사람의 아들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다가오십니다. 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이웃으로 또는 친구로 맞아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의 사람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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