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막 8: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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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막 8:14-25)
마태가 예수님을 권세 있는 말씀을 많이 하신 분으로 소개한 반면에 마가는 권세 있는 행동을 많이 하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기적이야기가 각각 20개씩 있고, 마가복음에 18개가 있지만, 이 18개가 마가복음 전체분량의 사분의 일을 차지할 만큼 많은 분량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들을 수집해서 처음으로 소개할 필요를 느낀 사람이 바로 마가입니다. 마태의 활동무대가 주로 헬라문화권이었다면, 마가의 활동무대는 라틴문화권이었던 것 같습니다. 헬라문화권의 특징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논쟁이 많고 말씀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에 라틴문화권의 특징은 예술과 문화활동이 많은 곳이어서 행동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따라서 헬라권의 유대인기독교회를 섬겼던 마태는 유대인들이 크게 관심하는 말씀 쪽에 초점을 맞춰서 예수님이 말씀에 권세가 있는 분으로 소개하였고, 라틴권의 이방인기독교회를 섬겼던 마가는 로마인들이 크게 관심하는 행동 쪽에 초점을 맞춰서 행동에 권세가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마가는 복음서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해놓고, 복음서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18개의 기적을 행하는 장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전반부의 내용만으로 보면, 예수님은 정녕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못 고칠 병이 없고 못하실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능력이 많고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구원의 팔을 펴기에 능하신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고통을 겪는 자들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지역이었습니다. 이곳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자, 제자들을 선택했던 장소이며,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성공을 거두게 해준 장소이며, 부활 후에 제일 먼저 찾으셨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가장 큰 이유는 민중을 불쌍히 여긴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장 2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갈릴리활동에서 성공한 진정한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적을 자유자재로 행하신데 있지 아니하고 민중을 불쌍히 여기신데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민중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시고, 민중의 배고픔에 함께 배고파하시고,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고, 민중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신 데에 성공의 비결이 있었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명예와 권세와 돈을 가지고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없습니다. 허리를 굽힐 때, 눈높이를 맞출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후반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권능을 행하고 못 고치는 병이 없으시며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은 겉보기에는 대단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보게 되면 큰 교훈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후반부의 무대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정치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시고 고문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십니다. 갈릴리에서는 소외된 민중을 대상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으시며 폭풍을 잔잔케 하시며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셨는데,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는 마치 머리털 잘린 삼손처럼 모든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맥없이 희생당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당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좌절과 절망이기보다는 오히려 고통당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었습니다. 전반부 기적이야기보다는 오히려 후반부 수난이야기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가운데 9-16장까지의 후반부 수난이야기를 마가복음의 본론이라고 부르고, 전반부 1-8장까지의 기적이야기를 마가복음의 긴 서론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복음의 핵심이 기적이야기에 있지 않고 수난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갈릴리지역 활동에서 나타난 기적이야기에 있지 않고 예루살렘지역 활동에서 나타난 수난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수난이야기를 본론이라 부르고 기적이야기를 서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서 전반부 기적이야기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말씀의 예배인 설교입니다. 그리고 후반부 수난이야기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성만찬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설교에 있지 않고 성만찬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예배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였습니다. 잘못된 가톨릭미사예배를 고친다는 것이 그만 예배에서 설교를 복구하는 대신에 성만찬예배를 제한시켜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예배가 빠진 예배는 잘못된 예배요 반쪽예배 곧 드리다만 예배란 것이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예수님이 배척당하시고 배신당하시고 고문당하시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절망의 배후에 승리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점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뿐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어린 기도로써 하나님의 일 곧 십자가의 길을 결심하셨고, 십자가상에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으며,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무덤에 묻히신 후에는 40여시간만에 무덤을 박차고 나와 사망권세 이기셨고, 승천하여 하나님우편에 앉아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란 고난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그 고난을 능히 극복하고 이길 뿐 아니라 그 고난을 딛고 일어서 결국 영광을 쟁취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수난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그분의 수난을 통해서 비슷한 고난을 겪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현재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죽음 너머에 기다리는 궁극적인 승리 곧 최후의 승리를 보게 하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전반부에 소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곧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며 벳새다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들을 통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입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폭풍 속에서 건져주실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눈이 뜨인 자가 되고 귀가 열린 자가 되고 혀가 풀린 자가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소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수난의 정점에서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죽게 된 것에서 우리를 살려주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눈이 뜨인 자가 되고 귀가 열린 자가 되고 혀가 풀린 자가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신비를 깨달아 아는 자만이 먹을 빵이 없는 절박한 순간에도 세상의 일에 억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 곧 복음의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1-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약 사천 명을 먹이신 표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표적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한 것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의 가루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게 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한 표적과 같은 하늘로써 내린 표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죽이기로 작정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여전히 하늘로써 내리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행해 보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하늘로써 내린 기적을 내게 보이라. 그러면 믿겠다.”식의 희롱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 말고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다른 어떤 표적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8장 14-38절을 보면, 대칭구조를 이루는 두 개씩의 이야기와 제자직에 관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봅니다.
14-21절을 보면, 빵이 없음을 의논하는 제자들의 무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31-33절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또 다른 무지와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이 둘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6절에 믿음이 없어 치유에 다소 시간이 걸린 벳새다소경이 눈을 뜨는 장면과 27-30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또 다른 하나의 대칭을 이룹니다.
그리고 34-38절에 제자직에 관한 말씀이 결론으로 나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장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라고 한 26절과 3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침묵에 대한 경고입니다(참고. 3:12, 7:36, 9:9).
마가복음 8장의 이야기를 좀더 풀어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빵의 없음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 즉 육신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요, 마음이 둔한 자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기억치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둡고 또 기억력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그 깊은 영적인 비밀을 간직하지 못한 자이며, 복음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다하더라도 벳새다소경이 서서히 눈을 뜨고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보고 또 그 신비한 비밀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로 보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며 그 신비한 비밀을 간직하고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귀가 먼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한 사형수에 불과하지만,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 그를 믿는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할 구세주란 사실이며, 그것을 깨닫고 그 신비한 영적 비밀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빵은 먹고도 죽는 빵이요(요 6:58),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은 먹고 죽지 않는 하늘로써 내려온 산 빵이라고 하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먹고 살 빵이 없음만을 걱정하고, 예수님께서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깨닫지 못한 자들이 아닌지 반성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믿음이 없어 눈을 뜨지 못한 소경이 아닌지, 믿음이 없어 귀가 먹고 혀가 어눌한 자가 아닌지 반성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복음의 일과 하나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아닌지 반성해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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