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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교훈(요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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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046 2004.01.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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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는 교훈(요 20:1-10)

[오후 성경공부 내용]
무덤은 사단의 부정의 결과, 예수님의 빈 무덤은 하나님의 긍정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사단의 ‘No'의 결과,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Yes'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을 사단의 ‘No’에 대한 하나님의 ‘Yes’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무덤에 갇힌 자는 영원히 그 무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무덤을 박차고 밝은 세계로 나올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낮은 자는 높아질 수 없고 높은 자만이 영원히 높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높은 자는 낮아 질 것이요 낮은 자는 높아진다고 긍정합니다. 가난한 자는 무시당하고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먼저 된 자는 영원히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는 영원히 꼴찌가 된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긍정합니다. 높은 산은 항상 높고 낮은 골짜기는 항상 낮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가 높아지는 메시아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긍정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이 부정에 빠져들면 그 자체가 죽음이요 무덤이지만, 하나님의 긍정에 뛰어들면 그 자체가 생명이요 부활입니다.
사단은 인간을 끝없이 무덤에 가두려고 합니다. 우리의 사상과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썩고 냄새나고 눅눅하고 어두운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인간의 사상과 정신과 영혼까지도 썩고 냄새나는 어두운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우리 인간을 부정과 비관과 허무와 죽음과 나태함과 게으름과 시기와 질투와 중상과 모략과 사치와 낭비와 교만과 허세에 빠뜨려 폐쇄된 공간인 무덤에 가두는 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들면, 겉모습은 화려할는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썩고 병들어 냄새가 진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고 했습니다.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해도 그 속에는 썩고 냄새나는 시체뿐인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겉모습이 좋고 훌륭해 보여도 그 속에 있는 것이 썩고 냄새나고 폐쇄적이고 율법적인 것이면 무덤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학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고, 민중을 위함이 없고, 하나님을 위함이 없고, 공평함이 없고, 구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을 갖췄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딤후 3:5). 그들은 율법이란 폐쇄된 무덤에 갇힌 자들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지도급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서 무덤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자유롭고 복음적인 정신과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사상마저도 썩고 냄새나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무덤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세마포로 꽁꽁 싸고 묶어서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며,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온유한 자들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과 긍휼히 여기는 자들과 마음이 청결한 자들과 화평케 하는 자들을 편들며, 그들에게 복을 비는 예수님을 폐쇄되고 생명이 없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세리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며, 폐쇄적이고 편협한 율법풀이로 불쌍한 민중을 옭아매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며, 성전 뜰을 강도의 소굴로 바꿔놓은 사두개파들에게 도전하며, 진정으로 인간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 줄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무덤에 가두고 장정 20명이라도 굴릴 수 없는 무게가 무려 1.5~2톤이나 되는 큰 돌로 입구를 차단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대 최고였던 로마군인들로 하여금 보초까지 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육중한 돌문을 열어젖히고 육신을 옭아맸던 세마포를 벗어 던진 채 그 냄새나고 폐쇄된 죽음의 공간을 벗어나 생명에로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이 그분을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세마포가 그분을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그분을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의가 그분을 지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빈 무덤만을 남긴 채 무덤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몸을 꽁꽁 묶었던 죽음의 오랏줄 세마포를 풀어 던진 채 무덤을 탈출하여 밝은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술수와 비방과 비교가 난무하는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을 떠나 민중의 삶의 터전이자 새 출발의 장소인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셨습니다. 그곳은 비록 가난과 억압에 시달린 민중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천국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무덤에서 빼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수많은 빈 무덤의 출발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의 새아침은 수많은 새아침의 출발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의 새 출발은 수많은 새 출발의 시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은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더럽고 냄새나는 무덤을 벗어나와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도 죽음과 죄악과 구습의 세마포를 풀어버리고 하늘에 오른 예수님처럼 하늘에 오르는 변화된 사람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사단은 인간들을 회칠한 무덤에 가두려고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조차 썩고 냄새나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사단은 이 목적을 위해서 지식인들을 동원합니다. 사단에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타락한 자연법칙을 수호하며, 인간의 죽음을 자연법칙의 하나로 수용합니다.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물론에 기초한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힘의 논리를 신봉하며,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우주가 폐쇄된 인과법칙의 사슬에 매어 숙명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며, 하나님은 이 우주 어느 구석에도 없고, 인간사(人間事)에 개입할 수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또 그들은 인간을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며, 죽음은 자연스런 것이어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폐쇄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을 무덤에 가두는 사람들은 결단코 빈 무덤을 남길 수 없으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옭아매는 세마포를 풀어버리고 썩고 냄새나고 어두운 무덤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 사는 창조주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단의 부정(No)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긍정(Yes)을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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