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위한 해원병(요 6:41-71)
본문
새 시대를 위한 해원병(요 6:41-71)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떡, 하늘로써 내려온 떡,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우리가 요셉의 아들 예수인 것을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써 내려왔다 하느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42-43절).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이 유대주의적 배경을 가진 에비온파(Ebionites)가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유일신사상을 지나치게 옹호하려한 나머지 단일신론(Monarchianism)이 나왔는가하면, 양자설(養子說)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여호와증인들이 이들 이단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절)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47-4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역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자라야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육신의 양식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못 박히시고, 창 찔리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당신의 육체의 살과 피를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빈들에서 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 표적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양으로 죽고 그분을 믿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분이심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13세 이상의 남성만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뿐이었지만, 유월절 어린양처럼 희생되어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세시민속(歲時民俗) 가운데 대보름 민속으로 해원병(解怨餠/원한을 푸는 떡)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해를 살다 보면 이해(利害)에 얽히건 오해에 얽히건 간에 누군가와의 사이에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 마을에 살면서 불편한 관계를 갖는다면 피차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보름 명절에 그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씻기 위해서 해원떡을 만들었는데, 원한이 클수록 크게 만들고, 작으면 작게 만들어서 산사(山寺)의 스님을 통해서 전달함으로써 지난해의 불편했던 관계를 깨끗이 씻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떡을 통해서 원수 된 관계를 풀고 서로 화목 하는 해원상생(解怨相生)의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고,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친히 해원떡이 되셨고, 이 떡을 나누어먹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고,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는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어느 집안에서나 제사를 지내면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주(祭酒)와 제사 음식을 나눠 먹고 마시며, 마을제사 때도 소나 돼지와 같은 희생물을 제사 후에 반드시 한 점씩이라도 나눠 먹습니다. 제사 후에 음식을 나눠먹고 마시는 것은 제사가 끝났으니 나눠먹자는 뜻이 아니라, 그 제사음식에 신(神)의 축복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을 나눠 갖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가 끝나면 분량의 크고 작음이나 질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떡 한 조각, 밤 한 톨이라도 나눠 먹어야 했으며, 그것을 먹으면 병에 안 걸리고, 액(厄)도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구원의 복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친 제물에도 구원의 복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으로 준비하신 화목제물 속에야 얼마나 큰 영생의 복이 담겨져 있겠습니까?
우리말에 선물(膳物)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뜻합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친 하찮은 제물에도 구원의 복이 담긴 신의 선물이라고 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하신 대속의 제물이야말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겠습니까? 이 선물이 바로 생명의 떡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시대를 위한 우리의 영생의 떡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참 떡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49-51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 다투며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는가?”(52절)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심이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고 하신 말씀을 무시한 채 성만찬예식을 자주 거행하지 않게 만들고, 오히려 자주 행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 .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3-58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노예 값에 팔아넘기는 비극적인 일을 범하고 말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조차도 열두 사람만 남고 모두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66절). 그 때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7-69절).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원수된 대신(對神)관계 및 대인(對人)관계를 화목관계로 바꿔놓으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해원떡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떡을 먹지 않고서는 해원상생과 영생의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떡, 하늘로써 내려온 떡,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우리가 요셉의 아들 예수인 것을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써 내려왔다 하느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42-43절).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이 유대주의적 배경을 가진 에비온파(Ebionites)가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유일신사상을 지나치게 옹호하려한 나머지 단일신론(Monarchianism)이 나왔는가하면, 양자설(養子說)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여호와증인들이 이들 이단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절)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47-4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역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자라야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육신의 양식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못 박히시고, 창 찔리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당신의 육체의 살과 피를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빈들에서 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 표적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양으로 죽고 그분을 믿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분이심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13세 이상의 남성만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뿐이었지만, 유월절 어린양처럼 희생되어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세시민속(歲時民俗) 가운데 대보름 민속으로 해원병(解怨餠/원한을 푸는 떡)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해를 살다 보면 이해(利害)에 얽히건 오해에 얽히건 간에 누군가와의 사이에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 마을에 살면서 불편한 관계를 갖는다면 피차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보름 명절에 그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씻기 위해서 해원떡을 만들었는데, 원한이 클수록 크게 만들고, 작으면 작게 만들어서 산사(山寺)의 스님을 통해서 전달함으로써 지난해의 불편했던 관계를 깨끗이 씻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떡을 통해서 원수 된 관계를 풀고 서로 화목 하는 해원상생(解怨相生)의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고,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친히 해원떡이 되셨고, 이 떡을 나누어먹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고,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는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어느 집안에서나 제사를 지내면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주(祭酒)와 제사 음식을 나눠 먹고 마시며, 마을제사 때도 소나 돼지와 같은 희생물을 제사 후에 반드시 한 점씩이라도 나눠 먹습니다. 제사 후에 음식을 나눠먹고 마시는 것은 제사가 끝났으니 나눠먹자는 뜻이 아니라, 그 제사음식에 신(神)의 축복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을 나눠 갖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가 끝나면 분량의 크고 작음이나 질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떡 한 조각, 밤 한 톨이라도 나눠 먹어야 했으며, 그것을 먹으면 병에 안 걸리고, 액(厄)도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구원의 복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친 제물에도 구원의 복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으로 준비하신 화목제물 속에야 얼마나 큰 영생의 복이 담겨져 있겠습니까?
우리말에 선물(膳物)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뜻합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친 하찮은 제물에도 구원의 복이 담긴 신의 선물이라고 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하신 대속의 제물이야말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겠습니까? 이 선물이 바로 생명의 떡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시대를 위한 우리의 영생의 떡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참 떡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49-51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 다투며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는가?”(52절)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심이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고 하신 말씀을 무시한 채 성만찬예식을 자주 거행하지 않게 만들고, 오히려 자주 행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 .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3-58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충격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노예 값에 팔아넘기는 비극적인 일을 범하고 말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조차도 열두 사람만 남고 모두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66절). 그 때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7-69절).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원수된 대신(對神)관계 및 대인(對人)관계를 화목관계로 바꿔놓으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해원떡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떡을 먹지 않고서는 해원상생과 영생의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 이전글 하나님의 일(요 6:22-40) 03.07.05
- 다음글 왜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 했는가(요 7:1, 25-36) 03.07.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