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시고(요 19: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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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시고(요 19:17-37)
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조롱당하고 매 맞으며 재판받고 버림받아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비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가(王家)인 다윗가문에 태어났으나 가난했고 나사렛 시골 촌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성장배경으로 볼 때, 예수님이 왕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왕도 없던 로마제국의 속주에 태어났으므로 더더욱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길지 아니한 생애기간에 결코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그가 왕이란 칭호를 얻고, 비록 가시관을 쓰긴 했지만, 왕의 옷을 입고 왕의 신분으로 재판받았으며, 왕이란 명패를 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언뜻 보아서 이 사건은 비극 중의 비극이요, 수모 중의 수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승자요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과거 수십 세기에 걸쳐 전 세계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한 경배와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젊은 예언자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자신을 세상에 보낸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수모에도 아랑곳없이 믿었던 제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게 심문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러한 비참한 현실에 묶여 끌려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평강으로써 지배하였습니다. 이 엄청난 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한 열정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빌라도 총독이나 그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의 참소하는 외침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승리를 확신하였고, 결국 승자가 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자기 십자가가 있게 마련이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하나님도 자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눅 9:23)고 하셨는데, 이참에 제대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까지 모든 것을 박탈당하신채 알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지만, 그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상황에 지배받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은 고통대로 통증을 호소하셨고, 괴롬을 견디기 어려워하셨지만, 챙길 것을 챙기셨습니다. 자신을 결코 상황에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장남으로써의 자신의 책임을 챙기신 일입니다. 요한은 1장에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창조주로 소개하였지만, 이곳 19장에서는 철저하게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35)고 하신 말씀을 악용하여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이행치 않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순간까지 자식으로써의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시는 것은 극한의 현실에서도 그 현실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장악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28절)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써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추지 아니 하시고 호소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이 철저하게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밝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러운 육신을 입으실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 여호와증인들은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간의 아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신데, 어떻게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분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에는 신(神)적인 도움이 전혀 없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이런 처절한 순간에서조차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에 짓눌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상황을 내려다보는 장악력을 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심이 사단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는 점은 예수님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30절)는 말씀을 마치시고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군인이 찌른 창에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34절).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일찍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공생애시작부터 예수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짐이 있었는데, 이 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실질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어찌 잠시 짊어진 나무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ꡔ예수의 생애ꡕ를 쓴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7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30대의 예수를 보고 ‘50세가 되지도 않았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예수가 나이보다 늙어 보였는지 모른다. 나이보다 늙어 보인 것은 그 면모에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의 그림자가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며 피로에 지친 눈에는 괴로운 빛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자신의 사명이 인류를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피를 말리는 죽음의 나날이 다가올수록 삶에 대한 강한 욕구가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를 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셨고, 진정한 왕이 되셨으며, 최후의 승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구상>
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조롱당하고 매 맞으며 재판받고 버림받아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비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가(王家)인 다윗가문에 태어났으나 가난했고 나사렛 시골 촌에서 목수 일을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성장배경으로 볼 때, 예수님이 왕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왕도 없던 로마제국의 속주에 태어났으므로 더더욱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길지 아니한 생애기간에 결코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그가 왕이란 칭호를 얻고, 비록 가시관을 쓰긴 했지만, 왕의 옷을 입고 왕의 신분으로 재판받았으며, 왕이란 명패를 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언뜻 보아서 이 사건은 비극 중의 비극이요, 수모 중의 수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승자요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과거 수십 세기에 걸쳐 전 세계 수십억에 이르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한 경배와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젊은 예언자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자신을 세상에 보낸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수모에도 아랑곳없이 믿었던 제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게 심문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러한 비참한 현실에 묶여 끌려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평강으로써 지배하였습니다. 이 엄청난 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자한 열정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빌라도 총독이나 그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의 참소하는 외침에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승리를 확신하였고, 결국 승자가 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자기 십자가가 있게 마련이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하나님도 자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눅 9:23)고 하셨는데, 이참에 제대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까지 모든 것을 박탈당하신채 알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지만, 그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상황에 지배받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은 고통대로 통증을 호소하셨고, 괴롬을 견디기 어려워하셨지만, 챙길 것을 챙기셨습니다. 자신을 결코 상황에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장남으로써의 자신의 책임을 챙기신 일입니다. 요한은 1장에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창조주로 소개하였지만, 이곳 19장에서는 철저하게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35)고 하신 말씀을 악용하여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이행치 않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순간까지 자식으로써의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시는 것은 극한의 현실에서도 그 현실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장악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28절)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써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감추지 아니 하시고 호소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이 철저하게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밝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러운 육신을 입으실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 여호와증인들은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간의 아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신데, 어떻게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분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에는 신(神)적인 도움이 전혀 없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이런 처절한 순간에서조차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에 짓눌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상황을 내려다보는 장악력을 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심이 사단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는 점은 예수님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30절)는 말씀을 마치시고 운명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군인이 찌른 창에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34절).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일찍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공생애시작부터 예수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짐이 있었는데, 이 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실질적인 십자가였습니다. 이 십자가를 어찌 잠시 짊어진 나무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ꡔ예수의 생애ꡕ를 쓴 일본인 소설가 엔도 슈사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7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30대의 예수를 보고 ‘50세가 되지도 않았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예수가 나이보다 늙어 보였는지 모른다. 나이보다 늙어 보인 것은 그 면모에 뭐라 할 수 없는 고통의 그림자가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며 피로에 지친 눈에는 괴로운 빛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자신의 사명이 인류를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피를 말리는 죽음의 나날이 다가올수록 삶에 대한 강한 욕구가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를 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셨고, 진정한 왕이 되셨으며, 최후의 승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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