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이 변해야 산다[빌3:12-14]
본문
빌립보서 3장 12~21절의 말씀에는 세 가지 기독교인의 관점이 배어있습니다. 첫째는 12~14절의 말씀으로써 기독교인의 인생관이 배어 있고, 둘째는 18~19절로써 기독교인의 가치관이 배어있고, 마지막으로 20~21절에는 기독교인의 세계관이 배어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인생관이니, 가치관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기초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자주 거론하게 되는데,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과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방향과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인생관은 무엇이고, 가치관은 무엇이며, 또 세계관은 무엇일까요? 이들 단어들은 그 뜻에 있어서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비슷한말들이고, 또 실제로 이들 단어들은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어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관은 인간의 삶을 보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말하고, 가치관은 인간이 자기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가치기준을 말하고, 세계관은 인간이 우주와 역사를 이해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누가 "인생은 나그네길이다."라고 말하면, 이는 그의 인생관을 말한 것이고, "삶의 보람은 봉사에 있다."고 말하면, 이는 그의 가치관을 말한 것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면, 이는 그의 세계관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 세 단어들을 구별해서 한 주일에 한 단어씩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인생관이 변해야 산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빌립보서 3장 12~14절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생은 마라톤이다. 달려온 길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 목표점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는 마라톤이다. 그래서 인생은 '이미 얻었다'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또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생을 운동시합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인생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인생은 월계관을 얻기 위해서,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지옥훈련을 참아내야 하는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의 연속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다."고 말합니다.
흔히들 마라톤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운동시합에 비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기독교인의 삶을 자기부정과 십자가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와 같이 기독교인의 삶은 자기 부정의 삶입니다. 자기 부정의 삶이라고 해서 좌절의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기독교인의 인생은, 기독교 세계관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완전히 이룬 삶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믿고 침례 받은 사람을 일컬어 '구원받았다'고 하지, '구원받을 것이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와 성령의 씻음과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구원을 약속 받고, 확인(인침) 받고,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약속 받고, 확인 받고, 경험한다는 뜻은 기독교인의 삶이, 바울의 고백처럼, '이미 얻었다'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도 아닙니다. 오로지 목표점을 향해서 달려온 그 길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이요, 인생관입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할 줄 모르고, 자기가 이룬 쪼그만 것에 만족하고,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면,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인 자기 우상화에 빠져서 결국은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는 것입니다.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유대인들이 그랬고, 높은 철학사상에 도달한 그리스인들이 그랬고, 르네상스 문명을 이룬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정의 인생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을 쓴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말을 빌리면, 국민소득 만 달러에 도달한 한국도 자기 반성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모루는 "머리가 너무 좋아 탈이야"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의 소각장이 건설되어 제대로 가동하는 데에 1에서 10까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자. 한국 사람들은 처음에 열심히 기술을 배운다. 그러다가 대여섯 정도까지 알고 나면 서서히 태도가 달라진다. 이 정도면 배울 만치 배웠으니 나머지는 우리끼리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쇠퇴와 해체의 길을 재촉하는 자기 도취와 자기 우상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인생관이 변해야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의 인생관은 끊임없는 창조성을 요구합니다. 자기 부정과 창조성은 피차에 변증법적인 상관관계(相關關係)를 맺고 있습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을 만들고, 또 자기 긍정은 자기 부정을 만듭니다. 자기 긍정은 '이미 얻었다' 또는 '이미 이루었다'는 자긍심을 주고, 자기 부정은 '아직 얻지 못했다' 또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주지만, 자기 긍정의 자긍심은 결국 자기 부정의 좌절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자기 부정은 '이미'와 '아직 아니'의 갈등사이에서 변증법적인 창조를 빚어내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예'(yes)만 있고, '아니오'(no)가 없다든지, 또 긍정만 있고, 부정이 없다면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인 자기 우상화에 빠지기 쉽고, '아니오'(no)만 있고, '예'(yes)가 없다든지, 또 부정만 있고, 긍정이 없다면 좌절감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인생관은 '이미 얻었다'거나 '이미 이루었다'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거나 '아직 이루지 못했다'도 아닌 되어져 가는 삶이요, 만들어져 가는 삶인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는 "인생은 석재(石材)다. 여기에 신의 모습을 조각하느냐, 악마의 모습을 조각하느냐는 개인의 자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칫 사람의 삶이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서 바뀔 수 없다는 절대예정론에 치우치기 쉬운데,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삶의 조각가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로봇 같은 기계나 짐승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미 주신 것에다 우리 인간이 보태야할 자기노력의 몫을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께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고, 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도 때가 이르기 이전까지는 자기를 부정하시며 부지런히 창조의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문제로 싸움도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고,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서 예수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때가 이르자, 십자가를 지셨고,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처럼 임종을 앞두고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을 보내신 자의 뜻에 따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실하게 믿음으로 산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사람답게 살 때 주어집니다.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삶은 가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삶은 사람답게 사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짐승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삽니다. 계획도 없고, 목표도 없고, 반성도 없고, 창조도 없습니다. 오로지 먹기 위해서 또는 먹히기 위해서 먹이사슬에 묶여 살아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짐승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에 자기 부정이란 게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우상숭배를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만든 형상에 절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큰 우상숭배는 다름 아닌 자기 우상화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자신이 누구인줄을 아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유명한 델포이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 입구에 새겨진 글이 바로 그토록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글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알 때, 자기를 부인하거나 반성할 수 있고, 자기 우상화나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IMF이후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형국에 놓여있습니다. 살아남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실력을 키워 몸값을 올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회사 일에 하루하루 안주하거나 자리보전에 급급하기보다는 틈틈히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컴퓨터를 배우고 있고,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자기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3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의 저자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10년 뒤 자기를 위해 느긋하지만 쉬지 않고 준비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번개 배달로 유명한 조태훈씨가 자장면 배달부에서 일약 중국집 사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은, 10년 뒤 사장이 되어 있는 자신을 그려보며, 현재의 자장면 배달부에 만족치 않고, 현재의 자장면 배달부의 입장에서 생각지 않고, 10년 뒤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달부이기를 부정하고 주인이기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을 쓴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체험기를 보면, 한국이 일본에 100년은 뒤졌다는 것이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그 격차가 날이 갈수록 점점 좁아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00년이라는 격차도 지금부터라도 한국 사람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달린다는 전제 아래에서 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까지 한국을 악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밑바닥까지 추락한 한국의 도덕과 질서의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에게 도덕과 질서가 없다는 것은 올바른 인생관이 없다는 것이고, 올바른 인생관이 없다는 것은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이 없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관이 변해야 삽니다. 인생관이 변하지 않으면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바탕을 둔 인생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정의 인생관입니다. 끊임없는 창조적 자기 부정의 삶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인생관이니, 가치관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기초한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자주 거론하게 되는데,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과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방향과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인생관은 무엇이고, 가치관은 무엇이며, 또 세계관은 무엇일까요? 이들 단어들은 그 뜻에 있어서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비슷한말들이고, 또 실제로 이들 단어들은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어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관은 인간의 삶을 보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을 말하고, 가치관은 인간이 자기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가치기준을 말하고, 세계관은 인간이 우주와 역사를 이해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누가 "인생은 나그네길이다."라고 말하면, 이는 그의 인생관을 말한 것이고, "삶의 보람은 봉사에 있다."고 말하면, 이는 그의 가치관을 말한 것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면, 이는 그의 세계관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 세 단어들을 구별해서 한 주일에 한 단어씩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인생관이 변해야 산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빌립보서 3장 12~14절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생은 마라톤이다. 달려온 길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 목표점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는 마라톤이다. 그래서 인생은 '이미 얻었다'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또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인생을 운동시합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인생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인생은 월계관을 얻기 위해서,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지옥훈련을 참아내야 하는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의 연속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다."고 말합니다.
흔히들 마라톤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운동시합에 비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기독교인의 삶을 자기부정과 십자가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와 같이 기독교인의 삶은 자기 부정의 삶입니다. 자기 부정의 삶이라고 해서 좌절의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기독교인의 인생은, 기독교 세계관과 연결해서 생각할 때, 완전히 이룬 삶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삶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믿고 침례 받은 사람을 일컬어 '구원받았다'고 하지, '구원받을 것이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와 성령의 씻음과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구원을 약속 받고, 확인(인침) 받고,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약속 받고, 확인 받고, 경험한다는 뜻은 기독교인의 삶이, 바울의 고백처럼, '이미 얻었다'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도 아닙니다. 오로지 목표점을 향해서 달려온 그 길은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이요, 인생관입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할 줄 모르고, 자기가 이룬 쪼그만 것에 만족하고,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면,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인 자기 우상화에 빠져서 결국은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는 것입니다. 유일신 사상에 도달한 유대인들이 그랬고, 높은 철학사상에 도달한 그리스인들이 그랬고, 르네상스 문명을 이룬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정의 인생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을 쓴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말을 빌리면, 국민소득 만 달러에 도달한 한국도 자기 반성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모루는 "머리가 너무 좋아 탈이야"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의 소각장이 건설되어 제대로 가동하는 데에 1에서 10까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자. 한국 사람들은 처음에 열심히 기술을 배운다. 그러다가 대여섯 정도까지 알고 나면 서서히 태도가 달라진다. 이 정도면 배울 만치 배웠으니 나머지는 우리끼리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쇠퇴와 해체의 길을 재촉하는 자기 도취와 자기 우상화의 길입니다. 그래서 인생관이 변해야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의 인생관은 끊임없는 창조성을 요구합니다. 자기 부정과 창조성은 피차에 변증법적인 상관관계(相關關係)를 맺고 있습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긍정을 만들고, 또 자기 긍정은 자기 부정을 만듭니다. 자기 긍정은 '이미 얻었다' 또는 '이미 이루었다'는 자긍심을 주고, 자기 부정은 '아직 얻지 못했다' 또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주지만, 자기 긍정의 자긍심은 결국 자기 부정의 좌절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자기 부정은 '이미'와 '아직 아니'의 갈등사이에서 변증법적인 창조를 빚어내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예'(yes)만 있고, '아니오'(no)가 없다든지, 또 긍정만 있고, 부정이 없다면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인 자기 우상화에 빠지기 쉽고, '아니오'(no)만 있고, '예'(yes)가 없다든지, 또 부정만 있고, 긍정이 없다면 좌절감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인생관은 '이미 얻었다'거나 '이미 이루었다'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거나 '아직 이루지 못했다'도 아닌 되어져 가는 삶이요, 만들어져 가는 삶인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는 "인생은 석재(石材)다. 여기에 신의 모습을 조각하느냐, 악마의 모습을 조각하느냐는 개인의 자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칫 사람의 삶이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서 바뀔 수 없다는 절대예정론에 치우치기 쉬운데,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삶의 조각가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과 자유의지를 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로봇 같은 기계나 짐승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미 주신 것에다 우리 인간이 보태야할 자기노력의 몫을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께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고, 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도 때가 이르기 이전까지는 자기를 부정하시며 부지런히 창조의 일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문제로 싸움도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고,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서 예수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때가 이르자, 십자가를 지셨고,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처럼 임종을 앞두고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을 보내신 자의 뜻에 따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실하게 믿음으로 산 사람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사람답게 살 때 주어집니다.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삶은 가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삶은 사람답게 사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짐승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삽니다. 계획도 없고, 목표도 없고, 반성도 없고, 창조도 없습니다. 오로지 먹기 위해서 또는 먹히기 위해서 먹이사슬에 묶여 살아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짐승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에 자기 부정이란 게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우상화해서는 안됩니다. 우상숭배를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만든 형상에 절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장 큰 우상숭배는 다름 아닌 자기 우상화란 점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자신이 누구인줄을 아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유명한 델포이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 입구에 새겨진 글이 바로 그토록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글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알 때, 자기를 부인하거나 반성할 수 있고, 자기 우상화나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IMF이후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형국에 놓여있습니다. 살아남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실력을 키워 몸값을 올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회사 일에 하루하루 안주하거나 자리보전에 급급하기보다는 틈틈히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컴퓨터를 배우고 있고,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자기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3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의 저자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10년 뒤 자기를 위해 느긋하지만 쉬지 않고 준비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번개 배달로 유명한 조태훈씨가 자장면 배달부에서 일약 중국집 사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은, 10년 뒤 사장이 되어 있는 자신을 그려보며, 현재의 자장면 배달부에 만족치 않고, 현재의 자장면 배달부의 입장에서 생각지 않고, 10년 뒤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달부이기를 부정하고 주인이기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을 쓴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의 체험기를 보면, 한국이 일본에 100년은 뒤졌다는 것이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그 격차가 날이 갈수록 점점 좁아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00년이라는 격차도 지금부터라도 한국 사람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달린다는 전제 아래에서 하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까지 한국을 악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밑바닥까지 추락한 한국의 도덕과 질서의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에게 도덕과 질서가 없다는 것은 올바른 인생관이 없다는 것이고, 올바른 인생관이 없다는 것은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반성이 없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관이 변해야 삽니다. 인생관이 변하지 않으면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바탕을 둔 인생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정의 인생관입니다. 끊임없는 창조적 자기 부정의 삶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이전글 가치관이 변해야 산다[빌3:18-19] 02.08.09
- 다음글 신앙관이 변해야 산다[빌1:27-30] 02.08.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