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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 사랑과 정의(롬 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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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8,313 2002.08.09 00:38

본문

2000년 6월 18일 에스더회 헌신예배 때에 히브리서 11장 1-12절을 본문으로 "믿음, 그 신뢰와 신실함"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신뢰와 신실함으로 구성되는데, 신뢰가 꽃이라면, 신실함은 열매입니다. 신뢰가 바늘이라면, 신실함은 실입니다. 신뢰가 믿음이라면, 신실함은 순종입니다. 신뢰 없이 신실함 없고, 신실함 없이 신뢰가 없습니다. 신뢰 없는 신실함이란 있을 수 없고, 신실함이 없는 신뢰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믿어주는 신뢰와 함께 서로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 가는 신실함에 있습니다. 이 둘이 함께 갈 때, 하나님과 가정과 더 나아가서는 교회와 사회에 믿음의 관계를 쌓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마치 보는 것처럼 분명한 그림을 그려나갈 때 신실함이 커지고, 신실함이 커지면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지면,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지면, 부부관계가 회복되고, 부모와 자녀관계가 회복되고,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고,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신실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리아회 헌신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만, 지난번에 이어서 로마서 3장 21-26절을 중심으로 "복음, 그 사랑과 정의"에 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은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가설 때 극대화되고, 신뢰도 커집니다. 신뢰가 커지면 믿음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그 사랑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요? 그런 사랑을 '불나비 사랑'이라고 부르면 어쩔까요? 정의가 없는 사랑이 불로 뛰어드는 나방에 비유될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죽임의 사랑일 것이고, 그런 사랑의 방식은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 정의를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그런 정의를 율법이라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바리새인들과 끊임없이 부딪혔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는다든지, 십일조나 금식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행위들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라면 남보다 월등하게 잘했습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관심 혹은 긍휼과 같은 사랑의 행위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행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운 행위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혹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도와서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숨통을 조여 죽이는 행위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법을 범하면서까지 안식일에 병자들을 돌보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봅니다. 언젠가 대학생이 자신의 부모를 죽여 토막내 버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패륜아를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그 젊은이를 그렇게 만든 데에는 죽은 부모가 자식에게 평소 정의만 부르짖었지, 사랑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는 그런 삶의 방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살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으면 그 둘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을 살리는 기쁜 소식인데, 그 기쁜 소식이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고민 끝에 찾아낸 절묘한 방식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의 성품을 함께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사랑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어서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살면, 정의가 죽고, 정의가 살면, 사랑이 죽기 쉽습니다. 사형제도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죄 범한 인간을 살려주자니, 정의가 희생되고, 죄를 벌하고 징계하자니, 사랑이 희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범한 인간들을 용서하면서 또한 그들의 죄를 벌할 수는 없는가를 놓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취한 하나님의 처방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벌했다는 측면에서 정의를 살리고, 인간을 용서했다는 측면에서 사랑을 살리며 또 그들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더하기 표식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속에는 하나님을 닮는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면, 무엇을 어떤 점을 닮아야 할까요?

한 가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부성입니까, 아니면 모성입니까? 여성신학자들 가운데는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어버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아버지의 성품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어머니의 성품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중성 또는 복합적인 성품을 가졌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아버지를 정의와 연관시키고 있고, 어머니를 사랑에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성품은 부성적인 정의와 모성적인 사랑의 성품을 함께 가지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 둘을 모두 고루 갖춘 사람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복음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기가 쉬울 듯 싶습니까? 정의하기가 쉬울 듯 쉽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랑하기란 "사랑해"라고 고백을 한다든지, 육체적인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하기란 벌받을 사람 벌주고 상 받을 사람 상주고, 번 것에 대한 분배를 아주 고르게 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사실 사랑하기나 평화하기는 정의하기보다 훨씬 쉽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사랑이나 평화야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어도 모른척하고 넘겨버리면 되지만, 정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의는 상대방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쳐야 되기 때문에 잘잘못을 떠나서 분란이 생기고 원한이 생기고 사랑이 깨지고 평화가 깨집니다. 따라서 사랑이나 평화만을 원한다면, 정의를 포기해버리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없는 곳엔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정의롭게 살고 정의롭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정에서 정의롭게 처신하고 있다면, 상당부분 가정문제의 양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평화만 있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많은 가정에서 누리는 평화는 대개가 가식적인 평화 또는 휴전에 의한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부인과 자식간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다운 사랑과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 아들에게 살해된 부모가 그 둘째 아들에게 첫째 아들에게 했던 만큼의 동일한 몫의 관심과 사랑과 배려를 정의롭게 베풀었다면, 적어도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아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말로만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가사를 분담한다든지, 일의 결정을 함께 의논한다든지, 필요한 부분에서 수입의 분배를 고르게 한다든지 하면, 부부간의 문제들을 상당부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부인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피차에 정의롭지 못하면, 싸움이 없다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실시한 설문조사결과(97년)를 보면, 아버지 중엔 자신이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2%나 됩니다. 그러나 자녀들 중에 의논상대로 아버지를 꼽은 사람은 불과 4.6%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듯이 아버지들은 아들놈들이 자기를 먼 친척 대하듯이 한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현실입니다.

미국의 남성학 전문가인 낸시 메이어는 저서 {아버지 마인드 스토리}에서 "아이만 사춘기를 겪는 게 아니다. 아이가 그 연령 대에 있을 때, 그 아버지 역시 사춘기 못지 않게 고민이 큰 인생의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다"며 "부자 또는 부녀간의 상호관계가 단절될 때 겪는 고통은 아이들보다 아버지 쪽이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 .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고 '아버지의 마음'에서 노래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영수는 어머니에게 한 장의 청구서를 제시했습니다. 청구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된 값 2천원, 집에서 심부름 한 값 1천원, 엄마가 음악공부 하라고 하여 피아노 공부한 값 5백원, 집에서 청소한 값 1천원, 기타 동생을 돌본 값 1천원, 계 5천 5백원."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저녁식탁 위에 5천 5백원과 함께 한 장의 편지를 놓았습니다. "엄마가 매일 밥지어 준 값 3천원, 매일 세탁해 준 값 3천원, 잠재워 준 값 4천원, 기타 바느질해 주고 돌봐준 값 3천원, 계 1만 3천원. 그러나 엄마는 영수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 무료." 여러분, 어느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수의 청구가 정의로운 것입니까? 엄마의 무보수 사랑의 봉사가 정의로운 것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 권위와 주권을 쥔 천상 천하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천지만물을 지으셨을까요? 하나님 이외의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특히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고등동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큰 위협이 되고 훼손이 되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천사의 반역과 인간의 반역이 바로 그것을 입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감행하신 것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각오하고 수용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과 자기 낮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역을 줄여 남을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자신의 권한을 줄여 남이 그 권한을 나누어 받게 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자신의 신분을 낮춰 남과 동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홀로 존재하기를 거부하시고, 남과 함께 사귀고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입고, 피해를 볼망정, 피조물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천사와 인간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귐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을 만들어 자유로운 사귐과 공존을 원하셨던 하나님은 인간의 배반으로 분노와 굴욕감을 느끼셨지만, 인간을 무작정 벌하기보다는 한층 더 자신을 낮춰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후에는 지체 높은 사람과 돈 많은 사람들과 사귀지 아니하시고, 더 한층 자신을 낮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은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간들을 벌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과 진정한 사귐과 자유로운 공존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히 자신의 권한과 권리를 제한하시고 친히 그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는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과 화목하셨고 또 화목하는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행동이 바로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믿음은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는 곳에서 싹이 틉니다. 하나님께서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을 때에 우리 안에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삶에 더하기 표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먼 이웃에게까지 다가갈 때에 인간관계에 믿음이 생깁니다. 신뢰가 생깁니다.

믿음은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가설 때 극대화되고, 신뢰도 커집니다. 신뢰가 커지면 믿음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로마서 3장 21-26절을 다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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