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감사절(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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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감사절(살전 5:16-18)
우리 민족의 큰 축제인 추석명절입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해서 감사생활의 중요성을 몇 가지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우리 민족의 추석명절은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경희대학교의 서정범 교수가 쓴 ‘한가위’란 글에 보면, 우리 민족의 한가위는 하나님께 드려진 감사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추석명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보다 천육백 년 이상이나 오래 전인 신라 유리왕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9년(주후 32년)에 중앙을 육부로 나누고 이를 또 반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이 각각 자기편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밤늦게까지 길쌈시합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지고이긴 편을 갈라 진 편이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했습니다. 이 때에 여러 가지 노래와 춤과 놀이를 했는데 이를 ‘가배’라고 했습니다. ‘한가위’의 ‘가위’는 이 ‘가배’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써 ‘가운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이 두 패로 갈려 한 달 동안 길쌈대회를 했다는 사실인데 일종의 길쌈경진대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쌈을 한 달이나 해서 보름날 햇곡으로 빚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춤과 노래를 한 것은 이것이 다만 길쌈경진대회로써 끝나지 않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예배행위였던 것입니다. 씨 뿌린 것이 올해에도 이렇게 열매를 맺게 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햇곡식으로 빚은 음식과 새로 짠 옷감을 하늘에 바치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씨를 뿌린 후에 하늘에 제사 드리고, 씨를 거둔 후에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삼한 시대의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는 국가적인 예배로써 조상들의 하느님, 즉 시조신에게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였습니다.
‘보름달’의 ‘보름’의 뜻도 열매라고 합니다. 보름달은 초승달에서 점점 자라 완전한 열매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보름달을 하늘의 열매로 여긴 것입니다. 한가위에는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어 먹습니다. 이때 쌀로 빚은 송편은 보름달과 같이 둥글게 만들어 가지고 안에 고물을 넣어 반달로 접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둥근 달떡을 해먹는데 우리는 둥글게 만든 다음 다시 반달로 접어 먹습니다. 따져보면 우리 송편은 보름달과 반달을 함께 먹는 셈입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땀 흘려 가꾼 곡식과 과일 그리고 길쌈한 것을 하늘에 감사하는 뜻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계시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연계시를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석 명절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 민족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둘째, 우리 민족은 추석명절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을 섬겼다고 했는데, 이 때 하늘은 창조주 하나님,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늘의 신 또는 천주를 뜻합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을 글로 표기할 때에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눈에 보이는 하늘, 즉 영어로 sky를 의미할 때에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말합니다. 둘째,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즉 영어로 God을 의미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셋째, 운명이나 숙명과 같은 하늘의 뜻 또는 신의 섭리를 표시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넷째, 물질이나 물체가 아닌, 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어떤 본체의 근원을 말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만물의 근원이요 본질이십니다.
애국가의 가사에서처럼 우리 민족이 하늘을 ‘하느님’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섬겨왔던 하나님이 바로 ‘하느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님’자를 붙어 불려진 것입니다. 최근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이 문법상 옳지 않고, 수천 년 사용했던 우리 문화와 언어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만, 교회가 아직까지도 통일된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에서 하나는 서수이기 때문에 ‘님’자를 붙일 수 없고, ‘하나님’은 유일신 즉 ‘한 하나님’의 의미로 사용은 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님’ 즉 ‘한 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우리 민족이 섬겼던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표기할 때에 하늘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그 아름다운 신앙심을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신앙심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신제사로 변질되었습니다. 조상을 신처럼 모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죽은 부모님께 예를 갖추어 추모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조상을 신처럼 섬기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배는 조상신에게 드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곡식을 주신 분은 조상들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민족의 축제에 즈음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상들을 추모하고 그리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 사랑과 관심으로 무지를 일깨워 주시는 선생님들과 이웃들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이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가 감사할 줄 모르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국민에 대해서 지적하는 내용 중에 하나가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상점에 가도 물건을 파는 주인이 ‘감사하다’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사는 사람이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택시를 타고 내릴 때 잔돈을 팁으로 남기고 내려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해 동안 개척교회 후원회를 이끌어 오면서 느낀 점도 목회자들이 매월 선교비를 받고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사람 중에 겨우 두 사람 정도가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입니다. 돈을 받고도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일본 식당에서는 종업인들이 ‘아리갓다 고자이마스’를 처음부터 노래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감사를 잊어버린 것은 첫째가 잦은 외침 때문이었고, 둘째는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라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적선이나 보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알아서 ‘감사하다’는 말을 생략해 버렸고, 선을 베푸는 사람도 이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잦은 외침과 수난으로 인해서 이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왔고, 사소한 피해는 피해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점차 ‘감사하다’라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이 실종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비는 삼 년간 계속해서 같은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면 감사의 표시로 자기 집 속에 반혼석(返魂石)으로 불리는 좁쌀만 한 흰 돌을 놓고 간다고 합니다. 이 돌은 임산부가 애 낳을 때 입에 물면 순산을 돕고, 기절한 사람의 가슴에 넣어 두면 정신이 돌아오게 한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길러준 어미 새에게 반포(反哺)한다 하지 않습니까? 반포란 새끼 새가 자란 후에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뜻입니다. 승냥이는 조상에게 제사까지 지낸다고 합니다.
소련 과학 아카데미 식물학자들은 매우 중요한 실험 결과를 권위 있는 연구 잡지인 ꡔ나우카과치즌ꡕ에 실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한 그루의 제라늄을 수일간 괴롭히게 합니다. 줄기를 뒤틀고 잎을 찢으며 바늘로 쪼고 성냥불로 화상을 입히곤 합니다. 그 후 다른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제라늄 식물에 친절을 다하게 합니다. 물을 뿌려 주고, 거름을 주고, 화상을 낫게 해주고, 상처 입은 줄기에 받침대를 대주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전극장치로 이 식물의 바이오리듬을 기록계에 잡히도록 했습니다. 한데 이 식물을 괴롭힌 사람이 접근하면 들쭉날쭉 신경질적인 곡선이 나타나는데 보살핀 사람이 접근하면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에 전자를 증오곡선, 후자를 감사곡선이라고 부른답니다. 이는 한낱 식물도 감사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죄악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국에서는 어떤 말을 하건 말머리와 말끝에 ‘Excuse me.’ ‘I am sorry.’ ‘Thank you.’의 세 마디 말 가운데 꼭 한마디를 써야 중산층에 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에는 하루 감사라는 말을 백 번하지 않고는 저녁밥을 먹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나 아랍 사람들은 감사를 아는 민족으로 아이들이 놀다가 다쳤을 때에도 그 만큼만 다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도이치에 대기근이 있을 때었습니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이 기아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한 부자는 20명가량의 어린이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주머니 속에 너희 한 사람에게 한 개씩 줄 수 있는 빵이 들어 있다. 그것을 한 개씩 가져가거라. 그리고 기근이 끝날 때까지 매일 와서 가져가거라. 매일 하나씩은 계속해서 주기로 하겠다.”
어린이들은 매우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머니를 보기가 무섭게 서로 아우성을 치면서 큰 것을 가지려고 힘내기를 하여 힘센 아이가 큰 것을 차지하고는 주인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가버렸습니다. 이 싸움 틈에 들지 않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레첸이라는 소녀는 조용해지자 주머니 있는 곳으로 가 맨 작은 빵 하나를 집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주인을 찾아가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에, 어린이들은 또 모여 왔습니다. 전번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투어가며 빵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과 한가지로 다툼 속에 끼지 않은 그레첸은 다른 애들의 반도 못되는 어제 것과 같은 빵을 가지고 역시 감사를 드리고서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레첸은 그것을 어머니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누는데,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빵 속에 50센트 은화가 여섯 개나 빛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워 그레첸에게 “아무래도 네가 잘못 가져왔는 모양이다. 이런 돈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곧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돌려 드려라”고 했습니다. 그레첸이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 드리러 갔을 때 주인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틀림없이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착한 네게 상으로 주기 위해 빵 속에 넣고 굽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감사히 알고 감사를 잊지 않을 때, 더욱 크게 감사할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아주 맛좋은 음식을 잡수시고 요리사를 불러 크게 칭찬하시며 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리사는 상을 임금님에게 다시 돌려 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제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좋은 채소를 팔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맛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은 마땅히 생각하여 곧 채소장사를 불러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소장사는 깜짝 놀라며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좋은 채소를 가꾸는 농부가 없으면 어떻게 제가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님은 곧 농부를 불렀습니다. 농부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그 상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따름입니다. 아무리 제가 부지런해도 비를 오게 하거나 해를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봄이 오면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내리사 채소를 맛있게 길러 주십니다. 임금님께서 감사를 하시려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임금님은 그 말을 옳게 생각하여 예배당에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요리사와 채소장사와 농부에게도 따로 큰 상을 베풀었답니다.
이와 같이 항상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민족은 감사할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항상 감사하되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부모님에게 또 선생님에게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또는 친구에게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마치 은행에 적금을 붓는 것과 같아서 적금이 쌓이면 목돈이 되듯이 감사가 쌓여 여러분의 앞날에 큰 축복으로 보상될 것을 믿습니다. 감사의 생활을 통해서 축복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민족의 큰 축제인 추석명절입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해서 감사생활의 중요성을 몇 가지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우리 민족의 추석명절은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경희대학교의 서정범 교수가 쓴 ‘한가위’란 글에 보면, 우리 민족의 한가위는 하나님께 드려진 감사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추석명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보다 천육백 년 이상이나 오래 전인 신라 유리왕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9년(주후 32년)에 중앙을 육부로 나누고 이를 또 반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이 각각 자기편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밤늦게까지 길쌈시합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지고이긴 편을 갈라 진 편이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했습니다. 이 때에 여러 가지 노래와 춤과 놀이를 했는데 이를 ‘가배’라고 했습니다. ‘한가위’의 ‘가위’는 이 ‘가배’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써 ‘가운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이 두 패로 갈려 한 달 동안 길쌈대회를 했다는 사실인데 일종의 길쌈경진대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길쌈을 한 달이나 해서 보름날 햇곡으로 빚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춤과 노래를 한 것은 이것이 다만 길쌈경진대회로써 끝나지 않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예배행위였던 것입니다. 씨 뿌린 것이 올해에도 이렇게 열매를 맺게 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햇곡식으로 빚은 음식과 새로 짠 옷감을 하늘에 바치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씨를 뿌린 후에 하늘에 제사 드리고, 씨를 거둔 후에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삼한 시대의 영고(迎鼓), 무천(舞天), 동맹(東盟)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은 국왕이 직접 주관하는 국가적인 예배로써 조상들의 하느님, 즉 시조신에게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였습니다.
‘보름달’의 ‘보름’의 뜻도 열매라고 합니다. 보름달은 초승달에서 점점 자라 완전한 열매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보름달을 하늘의 열매로 여긴 것입니다. 한가위에는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어 먹습니다. 이때 쌀로 빚은 송편은 보름달과 같이 둥글게 만들어 가지고 안에 고물을 넣어 반달로 접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둥근 달떡을 해먹는데 우리는 둥글게 만든 다음 다시 반달로 접어 먹습니다. 따져보면 우리 송편은 보름달과 반달을 함께 먹는 셈입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땀 흘려 가꾼 곡식과 과일 그리고 길쌈한 것을 하늘에 감사하는 뜻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계시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연계시를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석 명절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 민족의 추수 감사절입니다.
둘째, 우리 민족은 추석명절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을 섬겼다고 했는데, 이 때 하늘은 창조주 하나님,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늘의 신 또는 천주를 뜻합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을 글로 표기할 때에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눈에 보이는 하늘, 즉 영어로 sky를 의미할 때에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말합니다. 둘째,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즉 영어로 God을 의미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셋째, 운명이나 숙명과 같은 하늘의 뜻 또는 신의 섭리를 표시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했습니다. 넷째, 물질이나 물체가 아닌, 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어떤 본체의 근원을 말할 때 하늘 天자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만물의 근원이요 본질이십니다.
애국가의 가사에서처럼 우리 민족이 하늘을 ‘하느님’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섬겨왔던 하나님이 바로 ‘하느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님’자를 붙어 불려진 것입니다. 최근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이 문법상 옳지 않고, 수천 년 사용했던 우리 문화와 언어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만, 교회가 아직까지도 통일된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에서 하나는 서수이기 때문에 ‘님’자를 붙일 수 없고, ‘하나님’은 유일신 즉 ‘한 하나님’의 의미로 사용은 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님’ 즉 ‘한 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우리 민족이 섬겼던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표기할 때에 하늘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그 아름다운 신앙심을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신앙심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신제사로 변질되었습니다. 조상을 신처럼 모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죽은 부모님께 예를 갖추어 추모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조상을 신처럼 섬기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배는 조상신에게 드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곡식을 주신 분은 조상들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민족의 축제에 즈음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상들을 추모하고 그리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 사랑과 관심으로 무지를 일깨워 주시는 선생님들과 이웃들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복이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길이 열립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동방예의지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가 감사할 줄 모르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국민에 대해서 지적하는 내용 중에 하나가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상점에 가도 물건을 파는 주인이 ‘감사하다’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사는 사람이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택시를 타고 내릴 때 잔돈을 팁으로 남기고 내려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해 동안 개척교회 후원회를 이끌어 오면서 느낀 점도 목회자들이 매월 선교비를 받고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사람 중에 겨우 두 사람 정도가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입니다. 돈을 받고도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일본 식당에서는 종업인들이 ‘아리갓다 고자이마스’를 처음부터 노래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감사를 잊어버린 것은 첫째가 잦은 외침 때문이었고, 둘째는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라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적선이나 보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알아서 ‘감사하다’는 말을 생략해 버렸고, 선을 베푸는 사람도 이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잦은 외침과 수난으로 인해서 이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왔고, 사소한 피해는 피해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서는 점차 ‘감사하다’라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이 실종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비는 삼 년간 계속해서 같은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면 감사의 표시로 자기 집 속에 반혼석(返魂石)으로 불리는 좁쌀만 한 흰 돌을 놓고 간다고 합니다. 이 돌은 임산부가 애 낳을 때 입에 물면 순산을 돕고, 기절한 사람의 가슴에 넣어 두면 정신이 돌아오게 한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길러준 어미 새에게 반포(反哺)한다 하지 않습니까? 반포란 새끼 새가 자란 후에 어미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뜻입니다. 승냥이는 조상에게 제사까지 지낸다고 합니다.
소련 과학 아카데미 식물학자들은 매우 중요한 실험 결과를 권위 있는 연구 잡지인 ꡔ나우카과치즌ꡕ에 실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한 그루의 제라늄을 수일간 괴롭히게 합니다. 줄기를 뒤틀고 잎을 찢으며 바늘로 쪼고 성냥불로 화상을 입히곤 합니다. 그 후 다른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제라늄 식물에 친절을 다하게 합니다. 물을 뿌려 주고, 거름을 주고, 화상을 낫게 해주고, 상처 입은 줄기에 받침대를 대주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전극장치로 이 식물의 바이오리듬을 기록계에 잡히도록 했습니다. 한데 이 식물을 괴롭힌 사람이 접근하면 들쭉날쭉 신경질적인 곡선이 나타나는데 보살핀 사람이 접근하면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에 전자를 증오곡선, 후자를 감사곡선이라고 부른답니다. 이는 한낱 식물도 감사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죄악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국에서는 어떤 말을 하건 말머리와 말끝에 ‘Excuse me.’ ‘I am sorry.’ ‘Thank you.’의 세 마디 말 가운데 꼭 한마디를 써야 중산층에 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에는 하루 감사라는 말을 백 번하지 않고는 저녁밥을 먹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나 아랍 사람들은 감사를 아는 민족으로 아이들이 놀다가 다쳤을 때에도 그 만큼만 다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도이치에 대기근이 있을 때었습니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이 기아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한 부자는 20명가량의 어린이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주머니 속에 너희 한 사람에게 한 개씩 줄 수 있는 빵이 들어 있다. 그것을 한 개씩 가져가거라. 그리고 기근이 끝날 때까지 매일 와서 가져가거라. 매일 하나씩은 계속해서 주기로 하겠다.”
어린이들은 매우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머니를 보기가 무섭게 서로 아우성을 치면서 큰 것을 가지려고 힘내기를 하여 힘센 아이가 큰 것을 차지하고는 주인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가버렸습니다. 이 싸움 틈에 들지 않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레첸이라는 소녀는 조용해지자 주머니 있는 곳으로 가 맨 작은 빵 하나를 집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주인을 찾아가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에, 어린이들은 또 모여 왔습니다. 전번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투어가며 빵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과 한가지로 다툼 속에 끼지 않은 그레첸은 다른 애들의 반도 못되는 어제 것과 같은 빵을 가지고 역시 감사를 드리고서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레첸은 그것을 어머니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나누는데,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빵 속에 50센트 은화가 여섯 개나 빛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워 그레첸에게 “아무래도 네가 잘못 가져왔는 모양이다. 이런 돈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곧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돌려 드려라”고 했습니다. 그레첸이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 드리러 갔을 때 주인 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틀림없이 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착한 네게 상으로 주기 위해 빵 속에 넣고 굽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감사히 알고 감사를 잊지 않을 때, 더욱 크게 감사할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아주 맛좋은 음식을 잡수시고 요리사를 불러 크게 칭찬하시며 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리사는 상을 임금님에게 다시 돌려 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 제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좋은 채소를 팔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맛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은 마땅히 생각하여 곧 채소장사를 불러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소장사는 깜짝 놀라며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좋은 채소를 가꾸는 농부가 없으면 어떻게 제가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님은 곧 농부를 불렀습니다. 농부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그 상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따름입니다. 아무리 제가 부지런해도 비를 오게 하거나 해를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봄이 오면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내리사 채소를 맛있게 길러 주십니다. 임금님께서 감사를 하시려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임금님은 그 말을 옳게 생각하여 예배당에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요리사와 채소장사와 농부에게도 따로 큰 상을 베풀었답니다.
이와 같이 항상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민족은 감사할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많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항상 감사하되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부모님에게 또 선생님에게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또는 친구에게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는 마치 은행에 적금을 붓는 것과 같아서 적금이 쌓이면 목돈이 되듯이 감사가 쌓여 여러분의 앞날에 큰 축복으로 보상될 것을 믿습니다. 감사의 생활을 통해서 축복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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