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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수고05: 사랑의 수고(2)(살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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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440 2017.01.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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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수고05: 사랑의 수고(2)(살전 1:3)

믿음의 역사

Veria_Paul_Monument.jpg 3,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에서 역사, 수고, 인내는 믿음농사, 사랑농사, 소망농사를 말한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물이 있듯이, 믿음농사에도 수확물이 있다. 따라서 믿음의 역사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1)는 말이고, 믿음농사를 잘 지었다는 칭찬이다.

믿음의 내용에는 신뢰, 지식, 행위, 은사가 포함된다.

첫째, 신뢰는 말 그대로,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찰싹 달라붙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지식은 머리로 동의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교리를 말한다.

셋째, 행위는 실천적 믿음으로써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증거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회개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마음으로 믿고 회개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믿음농사를 포함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로마서 1010절이 이를 두고 한 말씀이다. 믿음과 회개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행위이고, 신앙고백과 침례는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행위이다. 신앙고백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여러 증인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이고, 침례는 회개한 자가 여러 증인들 앞에서 물로 씻음으로써 하나님가족의 식구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이다.

넷째, 은사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써 선포된 복음을 보강하고 입증시키는 능력을 수반하는 증거적인 믿음을 말한다.

이것들 가운데서 믿음의 역사는 수확물이 따라오는 믿음농사, 소득이 따라붙는 믿음실천, 증거가 나타나는 믿음생활을 말한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물이 있듯이 진실로 믿고 실천하면 열매를 거둔다. 바울이 볼 때, 데살로니가인들은 믿음농사를 잘 짓고 있었다. 우상을 버렸고(9),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본받았으며(6),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다(7). 그로 인한 소득이 많았다. 빛 질서 생명의 열매, 세상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수확이 많았다.

사랑의 수고

ancient_roman_forum_thessaloniki.jpg 사랑의 수고는 사랑농사, 사랑이 촉발시킨 수고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labor of love”가 출산을 말할 때 자주 쓰인다. 사랑농사의 결과가 자녀출산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이 성육신, 자기 제한동일시로 나타났듯이, 바울은 사랑을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신령한 것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유와 권한까지도 제한하는 것이라고 고린도전서에서 기술하였다.

도덕적으로 볼 때 사랑의 수고는 의무적이어야 하는가, 자발적이어야 하는가? 18세기 말에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마음의 끌림(감동) 때문에, 은혜를 받아서, 고마워서 하는 행동보다는 의무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기술하였다. 칸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과 그 목적을 실행에 옮기는 사랑의 수고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그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자율에 의한 자유로운 행동으로 보았다. 감동이나 끌림에 의한 행동, 곧 계산적으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실천하는 행동은 타율에 의한 것이고 결과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반대로 싫고 좋고를 떠나서, 마음에 내키든지 내키지 않든지,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를 떠나서, 그 행동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의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행동하는 것이 자율에 의한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이용수단으로 삼거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가 비도덕적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동기나 목적이 순수하지 못한 자유지상주의와 결과중심주의를 철저히 반대하였다. 동기가 순수하면 자율적인 것이고, 동기가 불순하면 타율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래적 신앙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따라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에 있어서 자율적으로 자유와 권한까지도 제한하는 사랑농사를 잘 짓고 있었던 것이다.

소망의 인내

thessaloniki_paul_church.jpg 소망의 인내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믿고, 여러 가지 환난들을 견디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바라면 인내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불가사의한 소망의 인내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멸망이후 지금까지 2,600년 넘게 희망(Ha-Tikvah)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의 인내이다. 그리고 그 희망의 핵심은 제2모세를 기다리는 재림신앙이다. 유대인들의 소망의 인내는 바울 당시 이미 6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던 것이어서 데살로니가인들이 카비루스를 기다렸던 소망의 인내를 월등히 능가하는 것이었다.

현실에 좌절한 민중은 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도 다르지 않다. 데살로니가인들이 카비루스를, 유대인들이 제2모세를 희망해왔다면, 우리 선조들은 미륵을 희망해왔다. 그러나 도솔천주로 있다가 재림한다는 미륵신앙은 기독교의 재림신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았다가 재림하신다는 사상은 기독교신앙이 인류최초이다. 더욱이 낙원과 지옥이 모두 지하 깊은 곳에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로마세계에서 하늘의 하나님, 하늘나라, 하늘 가나안땅, 하늘낙원과 같은 기독교신앙은 당대의 헬라인들은 물론이고 유대들에게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바울의 복음전파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기대는 카비루스에서 예수님에게로, 2모세에서 예수님에게로, 미륵에서 예수님에게로 바꿨고, 데살로니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후 그분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린 인내농사는 칭찬받을만한 것이었다.

소망의 인내가 절실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아 구원을 약속 받고 성령님의 보증과 인침과 인도하심을 받으며 소망 중에 살지만, 주의 재림 때까지 여러 가지 환난들을 겪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서의 메시지를 잘 담아낸 것이 판소리 춘향전이다. 춘향이는 이도령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한양으로 떠난 이후 변사또로부터 큰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춘향이는 이도령의 약속을 믿고 환난을 견딘다. 변사또의 회유와 고문과 투옥에도 불구하고 이도령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고는 마침내 소망을 성취한다. 천한 기생신분의 여성이 암행어사로 출세한 남성과 혼인을 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춘향이가 보였던 인내를 요구한다. 인내농사에는 반드시 수확이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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