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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쁨12: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교회(3)(빌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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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819 2017.05.0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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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기쁨12: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교회(3)(3:17-19)

나를 본받으라

Paul_Palatina_Chapel.jpg 빌립보서 3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믿음과 실천의 구체적인 모델이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은 서신들에서 본받았다본받으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완료형 본받았다는 데살로니가인들과 자신에게만 사용했고, 명령형 본받으라는 고린도, 빌립보, 에베소, 로마 등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하였다. 주후 52년경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살전 1:6) 되었고,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살전 2:14)되었으며,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안다”(살후 3:7)고 칭찬하였다. 수년 후인 주후 57년경에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4:16)고 권하였다. 그리고 주후 57-58년 사이 겨울에 쓴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15:5)라고 간구하였다. 그리고 수년 후에 다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5:1)고 권하였다. 그리고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내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고 하였고,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3:10-11, 17)고 권하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신 하나님의 섬김(목회)을 본받고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며, 바울을 본받는 것은 권리와 자유를 제한한 사도의 섬김(목회)과 전통 곧 믿음과 실천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택하여 부르신 목적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함이다(8:29)고 하였고, 또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을 보이는 목적을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다”(살후 3:9, 3:17)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본문 17,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너희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는 뜻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섬김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되, 그분의 섬김을 본받고 교훈을 실천했던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 그리스도를 본받고 교훈을 실천했던 사도들의 믿음과 실천을 본받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1)

Basilica_B_Philippi_crosses.jpg 18-19절에서 바울이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경고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누구였는가? 19절에 그 답이 나와 있다. 그들은 ”(물욕)를 신()으로 삼고, “부끄러움”(정욕)을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뜻은 복음의 일, 하나님의 일, 곧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일, 육신의 일, 곧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는 일만 생각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은 물욕과 정욕을 채우는 탐욕에 빠진 자들로서 물욕 채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정욕 채우는 일을 영광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바울시대에 이런 자들은 누구였는가? 사도행전 17-18절에 보면,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주전 4세기 초반에 제논과 에피쿠로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스토아학파가 이성을 중시하여 자기부정의 금욕주의를 통한 초연한 마음의 경지아파테이아’(apatheia)를 추구한 반면, 에피쿠로스학파는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쾌락, 아타락시아’(ataraxia)를 선()으로 추구하였다. ‘에피큐어’(epicure)란 말은 식도락가란 뜻이다. 이런 점에서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 영지주의자들의 원조가 되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향락주의 영지주의자들의 원조가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긴 유대인 에비온파들과 미련한 것으로 여긴 영지주의자들을 언급한바가 있다. 유대인 에비온파들은 이미 2절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무시하고 율법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에비온파에서 에비온’(ebion)가난을 뜻하기 때문에 배(물욕)를 신()으로 삼거나 부끄러움(정욕)을 영광으로 삼거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로 보기가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스토아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보기가 어렵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제자였던 클레안테스(Cleanthes)가 제우스에게 바친 송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 우둔한 자들이여! ... 비천한 물욕을 채워 줄 소득에만 눈이 어두워 버린 채, 마침내 명성과 감미로운 욕정의 씨앗만을 탐내는가 하면, 또한 하찮은 욕망만을 충족시키려고 애태울 뿐이라네.” 이로보건데 물욕과 정욕을 멀리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스토아철학자들은 ”(물욕)를 신()으로 삼고, “부끄러움”(정욕)을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로 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2)

baptistery_philippi2.jpg 그렇다면 빌립보서 318-19절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누구였는가? 그들은 초기 영지주의에 편향된 헬라인들, 곧 자유지상주의 또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영지주의자들이었거나 정원(Garden)공동체였던 에피쿠로스학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가 강조한 쾌락 곧 아타락시아는 물욕과 정욕을 극복한 평정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어서 빌립보서 318-19절의 뜻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물욕)를 신()으로 삼고, “부끄러움”(정욕)을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로 추정되는 그룹은 자유지상주의 또는 쾌락주의에 경도된 영지주의자들이다.

자유지상주의 또는 쾌락주의에 경도된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전 6:12)며 육체를 남용한 자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내 몸의 결정권은 내게 있다며, 자살을 하든, 안락사를 하든, 낙태를 하든, 마약을 하든, 매춘을 하든, 동성애를 하든, 장기를 떼어 팔든, 대리모를 사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게다가 영지주의자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죄악에 물든 유한한 현상으로 여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무한하고 신령한 본질로 여겼다. 이로 인해서 세상과 육체를 죄악시하였고, 그것들이 영적이고 참된 본질을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성육신사상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각 지역교회들에 침투한 떠돌이 거짓 교사들 또는 떠돌이 거짓 선지자들로서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심대하게 훼손하였고, 교회를 바울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빌립보서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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