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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것15: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3)(히 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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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238 2018.03.1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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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것15: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3)(6:1-20)

성숙한 길로 나아가자.

히브리서 511절부터 6장까지는 두 번째 교훈으로써 큰 대제사장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기초교리에만 머물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숙한 길로 나아가자고 권면한다.

plato_cave3.jpg 여기서 기초교리란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초보적 가르침들을 말한다. 저자는 1-2절에서 그 같은 것들이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침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이라고 말한다. 기초교리는 초기 교회들에서 교리문답방식으로 교육되었다. 저자는 이 같은 기초교리학습을 또다시 받아야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이르는 성숙한 길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출발지점 주변에서 언제까지 머뭇거리고 있을 생각인가라고 묻는다. 또 저자는 4-6절에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강경한 어조로 경고한다. 그 이유는 타락한 자들은,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능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힘입어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둠의 세계를 탈출하여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삶을 동경하여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둠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노예로 붙잡아 인권과 자유를 박탈했던 바로의 노예로 되돌아가고자한 어리석은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이집트 세대 히브리인들은 불신과 불순종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었다. 골인지점을 향해서 힘껏 질주해야할 마라톤 선수가 경주를 위해서 훈련도 쌓지 않고,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면, 그리고 뒤만 돌아본다면, 그는 실패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떠나온 소돔에 미련을 갖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우리는 떠나온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한다.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들을 버려야한다. 우리가 집중해야할 일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보다 앞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좇는 일이다.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둠의 세계를 탈출한 빛의 사람이라는 긍지,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본 사람이란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anchor-fish.jpg 7-20절에는 소망, 믿음, 오래 참음, 약속, 기업, 보증, 맹세, 피난처, 안위, 영혼의 닻, 휘장 안과 같은 단어들이 나온다. 이들 가운데 먼저 생각해봐야할 단어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이다.

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운명을 갖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신실하실 뿐 아니라, 실수와 실패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실수와 오류투성이인 인간들의 행위처럼, 문자 그대로 맹세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그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한 맹세와 같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떤 맹세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보증이다.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할 단어는 11, 18절에 언급된 소망이다. 아브라함의 소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맹세한 약속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근거도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19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다고 했다. 닻은 배가 바다에 떠있을 때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는 육중한 쇠갈고리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18)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앞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큰 대제사장 예수님을 뒤따라 우리가 휘장 안곧 지성소 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소망의 성취 곧 영원한 하늘 피난처에 정착시켜줄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19-20).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 피난처 또는 안식처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 또는 안식처는 하늘 예루살렘성전의 지성소 안 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안식처에 머물며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영혼의 닻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신실한 믿음과 오래 참음

Stele_Licinia_Amias_Terme.jpg 이런 이유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신실한 믿음과 오래 참음을 요구한다(10-12).

성서의 핵심메시지는 판소리 춘향전에 비교된다. 춘향전 이야기는 성서 이야기를 그대로 베껴놓은 것과 같다. 성춘향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이도령을 기다린다. 이도령이 한양으로 떠난 사이에 성춘향은 고난을 겪는다. 사또에게 몸을 바쳐 시중을 들라는 명령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곤장을 맞은 후 목에 칼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힌 성춘향은 돌아오지 않는 이도령을 원망은 할망정 그에 대한 신의는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춘향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이도령이 지킬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도령에 대한 희망이 실망과 고통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춘향이 사또의 고문과 학대를 무릅쓰고 정절을 지킨 것은, 오히려, 이도령에게 마음을 줬던 자기 자신의 신의 때문이었다.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성춘향의 도의적 정절은 이도령의 약속 때문에 지킨 신의보다도 훨씬 자율적이고 도덕적이다.

하나님께 받았던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기까지 걸린 반천 년의 기간을 생각해볼 때, 또 주전 586년 바벨론 유배이후로 유대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메시아 도래에 대한 약속, 그 메시아가 회복시킬 다윗왕국과 예루살렘성전예배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성취에 대한 희망의 끈을 수천 년이 넘도록 붙잡고 있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믿음을 고려해볼 때, 그들의 희망은 아브라함이후 오늘날까지 집단무의식이 되고, 토라율법이라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그 희망”(Ha-Tikvah)을 노래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희망은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를 잡아야하고 정언명령이라는 규칙이 되어 행동으로까지 이어질 때 성취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성서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신실한 믿음과 오래 참음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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