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복음14: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5)(갈 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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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복음14: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5)(갈 3:6-1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하바드대학교 신학부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훌러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교수한 죠지 E. 라드(미주침례교 목사)가
‘역사적 전천년설’을 설명한 글에서 주장하기를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자주 구약성경의 문맥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였다<마
2:15(호 11:1); 마 8:17, 행 8:30-35(사 53장. 비교 사 11장)>고 했다. 그는 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자주 문자적으로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문제 삼는 이유이다<롬
9:25-26, 4:11-16, 2:28-29(호 1:9-10, 2:23); 히 8장(렘 31:3-34)>.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구조주의 모형과 영적으로 해석한 것은 율법과 유대교의 병든 상태 때문이었다. 율법과 유대교의 병든 상태 때문에,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건강한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 병든 상태에 있는 유대교인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듯이 문자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시대에
역사적으로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국가에 주어진 많은 예언의 말씀들을 그리스도교에 예표로 영적으로 적용하였다. 갈라디아 3장 6-14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8절이 그렇다.
바울은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다.”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최소 430년에서 645년 전 사람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유대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무엇이며, 셋째는 의롭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가슴에 품었던 희망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최초로 품었던 ‘그 희망’(Ha-Tikvah)을 지금까지 품고 있고, ‘그 희망’이란 뜻의 ‘Ha-Tikvah’는 시오니즘의 운동가이자 이스라엘의 애국가이기도 하다. ‘그 희망’이란 문자적으로 가나안땅에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희망에 복을 주시고 반드시 성취될 것을 약속하셨고,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다. 그러나 신약성경 저자들은 아브라함의 ‘그 희망’을 저 하늘 가나안땅으로 보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라.”
둘째,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은 가임기를 수십 년이나 넘긴 사라의 태(胎)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부활의 믿음을 의롭다고 간주하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부활을 믿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의롭다는 것은 유대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한 것만 먹고, 정한 것만 사용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불러주시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에 아무도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 그 자체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의존하여 의롭게 되려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폭 7미터의 깊은 계곡을 뛰어 넘어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8미터 정도까지 멀리 뛸 수 있어야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피조물이고 부족한 존재라서 그 같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멀리 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6미터를 뛰었다 해도 살아남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6미터를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6미터를 율법의 행위로 간주할 때, 그 율법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11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다.”고 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본래 이 말씀은 신실한 믿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한 믿음은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지상 가나안땅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지키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구원의 믿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구약성경의 문맥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거나 영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가 있었다. 그 같은 입장에서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할 때
믿음을 신실한 믿음에 적용하지 않고, 구원하는 믿음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히브리서 저자는 동일한 성구를 인용할 때 인내의 믿음에
적용하였다.
유대교는 실천종교이기 때문에 교리를 믿고 영적 또는 근본적 구원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실천하여 가나안땅과 이스라엘나라에 대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유지시키는 종교이다. 그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언급한 의인과 믿음은, 바울이 뜻한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계명들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의인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극한의 시련과 박해를 인내하며 성춘향처럼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정절을 변심치 않고 끝까지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이 같은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나라와 가나안땅의 시조로 삼고 있는 아브라함을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 가나안땅의 시조로 삼고 있다(7-9절).
둘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나라와 가나안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키는 율법과 규례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 가나안땅을 받는 데는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10-12절).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율법과 규례를 지킴으로써 얻을 수 없는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권과 땅을 그분을 믿음으로 받게 하셨다고 말한다. 성령님은 이 약속의 보증과 인침과 선취로써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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