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27: 희망이신 예수님의 신분 공개(9)(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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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27: 희망이신 예수님의 신분 공개(9)(막 8:27-38)
빌립보 가이사랴(Caesarea Philippi)
빌립보 가이사랴는 판(Pan) 신전을
비롯한 다수의 신들을 위한 신당들이 세워졌던 고대 로마도시로써 골란고원 최북단, 갈릴리 호수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헐몬산 남서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분봉왕 빌립이 주전 3년에 이곳에 도시를 세웠고, 주후 14년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해 ‘가이사랴’라고 명명하였다.
주후 61년에는 아그립바 2세가 황제 네로를 기리기 위해 ‘네로니아스’(Neronias, AD 61-68)라고 명명하였다. 오늘날에는 아랍어로
‘바니아스’(Banias) 혹은 헬라어로 ‘파네아스’(Paneas)로 불리고 있는데, 깊은 연못을 가진 동굴에 잇대어 세워졌던 판(Pan)
신전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까지 신전 터와 아그립바 2세 왕의 궁전 터가 남아있다.
판(Pan)은 거친 자연, 목동, 양떼, 염소 떼의 신으로써 제우스가 님프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머리에 염소 뿔이 달린 모습이어서 잠든 사람에게 악몽을 불어넣고, 나그네에게 공포를 준다. 영어단어 panic(공황)이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판(Pan) 신전은 암반 산에 깊은 연못을 가진 동굴에 잇대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동굴 연못의 물은 요단강으로 흐른다. 이 동굴은 음부의 출입구로 여겨졌다고 하며, 암반 벽에는 판, 에코, 헤르메스 등의 신들을 부조한 다섯 개의 벽감(壁龕)이 있다. 예수님은 아마 이곳 암반 주변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gates)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선포하셨을 것이다.
헬라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음부의 세계로 옮겨가기 위해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주고 밑바닥이 없는 소가죽 배를 타고 통곡소리가 참혹하게 들려오는 비통의 강, 깊은 시름의 강, 분노의 불길이 치솟는 불의 강, 이생의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망각의 강을 차례대로 건너면 너른 벌판에 이르게 되고, 벌판 오른쪽에 낙원(엘뤼시온, Elusion), 왼쪽에 지옥(타르타로스, Tartaros)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
예수님이 먼 빌립보 가이사랴에까지
와서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헤롯 안티파스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갈릴리에 정보원이 파견된 상태였다. 또 예수님은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공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으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로 오름을 시작하셔야할 때까지는 아직 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민중의 추종과 바리새인들의 감시를 피하여 제자훈련에 적합한 장소인 골란고원 길을 따라 빌립보 가이사랴에까지 여행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로마의 황제들에게 바쳐진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제자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물어보셨다. 그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가이사랴냐? 혹은 그리스도냐?”라는 정치적 이슈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망의 복음은 로마인들의 귀에는 반역행위에 가까웠다. 로마제국의 명예와 합법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은 로마가 “평화를 가져오는 자”(peacemaker)란 것이었다. 로마는 신성인 황제의 후원 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神)으로 분향을 받았던 가이사랴의 공식 칭호들 가운데 하나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였다. 로마군대는 이 평화를 보장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속주민들은 기꺼이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는 전쟁과 살인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pax)는 세상 것과는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shalom)이었다. 이 샬롬은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의 말대로,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였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당하심으로써 얻어진 아가페오의 평화였다. 암반 산, 음부의 출입구로 여겨진 동굴 속 깊은 연못, 황제 가이사랴와 판(Pan)에게 헌정된 신전들이 있는 곳에 오셔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포하신 것은 의도된 것일 수 있다.
참 제자의 길
마가복음 8장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리에 끼지
아니한 채 비판하는 구경꾼들이었다. 그들은 족쇄에 묶여 지하 동굴에 갇힌 죄수의 삶을 즐기는 심미적 단계의 사람들이다.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한 표적은
민중이 원하는 생존의 빵인데, 그들은 이미 권세와 명예와 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한테서 처형꺼리를 찾기 위해서 파송된
기관원들이었다.
둘째는 목자 잃은 양들처럼 갈 길을 잃은 군중이었다. 족쇄를 풀고 어둠을 탈출하여 빛에로 오르고자 애쓰는 윤리적 실존단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목을 빼고 예수님만을 바라봤고,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본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주저하고 유보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예수님에게 등을 보일 자들이었다.
셋째는 제자들이었다. 족쇄에서 풀린 죄수가 동굴 입구 빛의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종교적 실존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탔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좇아 교회라는 배에 올랐지만, 아직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 자들이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강력하게 말렸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권세와 명예와 부를 얻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길가에서 서열을 놓고 다퉜고, 요한과 야고보는 직접 예수님께 고위직을 부탁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걷고 계신 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빵문제와 사람의 일만을 걱정하였다.
넷째는 참 제자의 길을 걷는 기독교적 실존단계에 도달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자들이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들이다. 이것이 빛과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이르는 참 제자의 길이다. 예수님을 빛과 자신 사이에 두고, 예수님을 통과한 아름다운 무지갯빛을 보기도 하고, 사계절의 각기 다른 일광을 즐기는 자들이다. 이 단계에 도달한 자는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가슴에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기댄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모든 절망을 극복한다. 이것이 발견한 것과 소유한 것의 차이요, 믿는 것과 누리는 것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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