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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4: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1)(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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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6,134 2016.07.1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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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4: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1)(막 11:1-10)

예루살렘으로의 오름

jericho_road_to_jerusalem.jpg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모든 활동은 예루살렘으로의 오름에 맞춰져 있었다. 이 오름은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오름, 곧 인류의 희망을 성취시키는 오름이었다. 예수님은 이 오름의 때가 찰 때까지 갈릴리지역에 계시면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으며 손을 내밀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친히 모범을 보이셨다. 때가 임박하자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유대지경에 인접한 요단강 동편에 도착하셨고, 여리고성에 이르러 맹인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셨다. 여기서 눈을 뜬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른다는 뜻이다. 그 길이 험한 가시밭길 혹은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빵보다는 하늘양식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과 제자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세속도시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고, 진리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늘 예루살렘으로 오른다는 뜻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깨지고 낡아지고 무너질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고, 깨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오아시스인 여리고성에서 돌산인 예루살렘까지는 약 30킬로미터이고 힘겨운 오르막이며 강도가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60미터 낮은 곳에 있고, 예루살렘은 해수면보다 760미터 높은 곳에 있어서 고도차가 1,020미터에 이른다. 예수님처럼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를 도보로 오른다면, 제주공항에서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를 도보로 오르는 것과 같다.

예수님 일행은 춘분이 막 지난 주후 30년 3월 31일 금요일 오후에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엄숙한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이 날은 예배와 안식으로 여독을 푸셨다. 벳바게는 ‘설익은 풋무화과의 집’이란 뜻을 갖고 있던 마을이다. 베다니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남매가 살았던 곳으로써 여리고성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마지막 마을이었다. 예수님으로서는 베다니가 여독을 풀고 예루살렘 입성(행진)을 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십자가를 지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

jericho_road_to_jerusalem2.jpg 안식 후 첫날인 4월 2일 일요일이 되자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고,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2절)를 타셨다. 희망성취, 곧 세상이 살고, 생명이 살고, 사람이 사는 일은 백마 탄 전쟁영웅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귀새끼를 탄 평화의 왕이라야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개선행진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였다. 그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다윗왕국의 영광이 재현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10절)를 외쳤다. ‘호산나’는 ‘호쉬아 나’로 발음되는 히브리어로써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다윗왕국의 영광을 재현시킬 그리스도를 지칭한 말이다. 추측컨대 민중의 백태 낀 눈에는 나귀새끼 탄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오랜 기간 머릿속에 그려왔던 백마 탄 전쟁영웅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막힌 장면의 연출이었다.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과 그분을 맞이하는 민중의 환호성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마 탄 개선장군의 행렬과 겹쳐있었다. 벳새다의 맹인처럼, 여리고성의 맹인처럼 눈을 뜨지 않고서는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그래서 민중 대다수가 보지 못한 기막힌 장면의 연출이었다. 피를 부른 전쟁으로 얻은 일시적 승리, 폭력으로 얻은 잠정적 평화, 역대 전쟁영웅들의 개선행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된 의미의 승리, 영원한 샬롬의 평화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기막힌 장면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기막힌 장면을 분명히 보았더라면, 불과 수일 후 그들이 빌라도법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라고 외쳤겠는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셔서 자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려는 것이었다. 또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출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를 통해서 더 나은 안식과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자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성취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

mt_olive.jpg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사건의 예표는 출애굽사건에 있다. 종려주일은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에, 부활주일은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가나안땅을 차지한 사건에 예표를 두고 있다. 또 종려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구원에, 부활주일은 육체구원에 관련되어있다. 영혼구원에는 지상과 천상으로 나뉜다. 지상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물가에서의 기쁨이고, 천상에서는 이 세상을 하직한 직후, 곧 죽음의 요단강을 건넌 후 낙원의 해변(계 15:1-4, 붉은 유리바닷가)에서 맛보는 구원의 기쁨이다. 육체구원은 죽음의 강을 건넌 자들이 예수님 재림 때 육체부활로써 이뤄질 구원의 완성이다.

종려주일사건의 예표는 홍해사건이다.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넌 후 해변에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춤추며 목청껏 외친 함성이 종려주일사건의 모형이다. 홍해를 건넌 직후 시작된 40년 광야순례는 예루살렘 입성 직후 시작된 고난주간의 예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 홍해도하를 침례 받음으로, 광야생활을 교회생활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주의 만찬으로, 구름기둥의 인도를 성령님의 인도하심의 예표로 설명하였다.

지상의 종려주일사건은 낙원에서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계시록 15장 2-3절을 보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천국에 오른 성도들이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홍해를 연상시킨다. 히브리민족이 홍해를 건넌 직후 해변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듯이, 환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구원의 해변에 서서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의 노래를 큰 소리로 외쳐 부르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려주일사건은 예수님 재림 때 백마 타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심판 주 그리스도를 백마 타고 뒤따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큰 소리로 연호하며, 구원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찬양할 할렐루야성가대원들의 환호성이다. 이 재림사건은 구원의 최종적 완성을 뜻한다. 그날의 영광을 의심 없이 바라보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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