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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4: 희망의 등장(막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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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065 2016.01.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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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4: 희망의 등장(막 1:14-15)

“때가 찼고”

“때”(dispensation)란 하나님의 경륜(administration)의 때를 말한다. 하나님이 오랜 자비로 시기를 특정해 놓은 섭리(providence)의 때를 말한다. 인간의 오랜 희망이 숙성되어 하나님의 오랜 자비가 임하는 때를 말한다. 예언자들의 글대로 인간의 오랜 희망이 성취되는 구원의 때를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의 때를 대표하는 모형과 그림자가 출애굽사건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때가 찼고”는 제2출애굽사건의 때가 임박했다는 말씀이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기 민족만을 위한 문자적 사건으로 이해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열방을 위한 영적 사건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 분명한 괴리가 있었고, 충돌이 생겼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있게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의 오랜 희망은 많이 아쉽게도 하나님의 뜻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욕심에 맞춰진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오랜 희망과 하나님의 오랜 자비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유대들의 희망은 땅에 것,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 물질적인 것, 깨어질 것, 낡아질 것, 무너질 것, 지상 가나안땅의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경제와 명예와 주권회복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랜 자비는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영원한 것, 영적인 것, 깨지지 않을 것, 낡아지지 않을 것, 무너지지 않을 것, 하늘 가나안땅의 것이었다. 오랜 외로움, 오랜 출렁임, 오랜 헛수고, 오랜 배고픔, 오랜 병듦에서 방황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과 영생을 주려는 것이었다.

jerash_ruins.jpg 이런 이유 때문에 “때가 찼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왜곡된 희망을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구약시대와 로마시대가 퇴역할 때가 되었다; 신약시대와 교회시대가 출범할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개혁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개혁적이고 종말론적이란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옛 것이 끝나고 새 것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혁가들과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역사에 끌어들인다고 확신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때”를 고토회복과 주권회복의 때, 단절되었던 다윗왕국시대의 회복과 구약시대의 지속으로 이해하였다. 이사야는 이 “때”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잡힌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 하는”(사 61:1-2) 때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유대인들은 고토회복과 다윗왕국회복으로 이해하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인류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1)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첫 일성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다윗왕국이란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을 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란 영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을 쓰셨다. 예수님은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다윗왕국을 회복하실 뜻이 없었다. 그것은 다시 깨어지고 낡아지며 무너지고 말 장막 집에 불과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깨어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으며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뜻이지, 이미 왔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주 현재완료의 의미로 “이미”란 표현을 쓰셨지만, 실제로 그분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주후 30년 5월 28일에 성령강림으로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이 날로부터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고, 율법시대가 끝나고 복음시대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신 때는 로마제국이 천하를 호령하던 때였고, 로마의 속주였던 이스라엘이 종말을 향해 내달리던 때였다. 이 시기에 천하를 호령했던 사람은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예수님의 출생전후 시기의 로마제국의 역사적 정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Julius_Divus_Star.jpg 첫째, 율리우스 카이사르이후 공화정이 몰락하고, 황제시대가 도래하였다.

둘째, 정치적으로는 이해득실에 따라 '합종연행'(合縱連橫)과 줄 갈아타기가 성행했고, 속임수와 중상과 모략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유포하는 ‘네거티브 전략’이 효과를 보던 때였다. 당대에는 신문이나 방송 대신에 벽에 그리는 그림낙서를 통해서 비방선전이 이뤄졌고, 정적을 제거하는 청부암살도 많았다.

셋째, 성적인 타락이 극에 달하였다. 근친상간, 동성애, 매춘이 성행했고, 여성들도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서라면 남편이나 연인 갈아타기를 서슴지 않았다.

넷째, 끊임없는 전쟁으로 서민들의 삶이 피폐하였다. 민중의 삶이 고단하고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의 부산물인 수많은 노예들이 시장에서 짐승처럼 매매되었고, 주인들에게 학대를 받았으며, 투기장에 끌려 나가 많은 사람들의 오락꺼리가 되기도 했다. 사람의 목숨이 그야말로 파리 목숨만도 못하던 때였다.

다섯째, 종교적으로는 신화에 바탕을 두고 3만이 넘는 잡신들을 섬겼다. 사실 이들 신들은 모두가 명사 단어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2)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유대 땅은 이미 600년 넘게 강대국들에 유린을 당하고 있었다. 헬라로부터 부분적으로 독립하여 100년간 유대인 하스몬왕가가 통치했었지만, 그마저도 주전 64년에 로마제국의 손에 넘어가 로마가 임명한 왕이나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성전세와 인두세가 버거운 짐이었고, 세리들의 착취와 부패도 심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고 했듯이 서민들의 삶은 심히 고단하였다. 비록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율법(토라)을 소유한 심히 종교적인 민족이었다 할지라도, 그들 상당수는 율법의 본질에서 벗어나 외식에 치우쳤고, 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과 민족주의가 그들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주후 66-70년 유대-로마 전쟁에서 처참하게 망가졌다.

titus_arch_relief.jpg 유대인들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었으나 그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특별히 택하셨고, 조상대대로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믿었다. 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이 여기서 나왔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되셨으므로 타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열방의 하나님을 유대민족의 하나님으로 제한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신이시다. 이 하나님의 독점 사상이 유대인들의 종말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은 성전에 가둬두고 독점하였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을 예루살렘 성전 한곳에 제한시킨 것은 일종의 통치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있는 법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소를 담과 뜰로 막아놓고 민족과 성별과 계급에 따라 접근을 제한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보좌(법궤)가 놓인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의 영역이었고, 성소는 당번 제사장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성소를 둘러싼 제사장의 뜰에는 제사장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그 바깥 이스라엘의 뜰에는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뜰로 통하는 여성의 뜰에는 남녀노소불문하고 모든 유대인들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여성의 뜰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 한곳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 신성하게 여겨지는 성소의 뜰에, 설사 그곳이 여성의 뜰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목숨을 내놓아야했다. 이런 점에서 성전의 뜰들을 구별하는 담들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차단막, 곧 휘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 차단막을 없애버릴 때가 차서 그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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