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06: 희망의 무대(2)(막 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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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6: 희망의 무대(2)(막 1:21-28)
가버나움(Capernaum)
가버나움이란 나훔의
동네란 뜻이다. 갈릴리 호수 북서쪽 해안에 있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고향(마 4:13)이자 활동무대였고, 성공한 장소였다. 멀지 아니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지만, 활동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셨다. 헤롯 안디바가 통치한 갈릴리지방의 행정수도 티베리우스를 거점으로 삼거나 전혀 가시지 않고, 서민의 삶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을 전진기지로 삼으시고 선교활동을 하셨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선교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 당시 나사렛의 인구가 400명 정도였는데, 가버나움의 인구는 1,500명가량 되었다.
둘째, 시리아(북)와 이집트(남)를 연결하는 하이웨이 곧 ‘해변의 길’(Via Maris)이 가버나움을 통과하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국경에 가까워서 세관이 있었다. 군사와 경제에도 매우 중요한 마을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였고, 세관원들이 있었으며, 유대교 랍비와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은 물론이고, 상인과 농부와 어부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셋째, 5천만평 크기의 넓은 갈릴리 호수 인근에 산재한 해수면 아래의 마을들을 배를 이용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잘 닦여진 군사도로들을 이용하여 고원지대의 마을들을 여행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예수님은 공적인 활동을 사실상 이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고, 갈릴리지역에서의 총 활동의 67퍼센트 가량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5명을 가장 먼저 이 가버나움에서 부르셨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리고 세관원이었던 마태였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베드로의 장모, 백부장의 종,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 야이로 회당장의 딸,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성, 귀신들린 자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가버나움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유대교 회당과 베드로의 생가 터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갈릴리 북서쪽 폐허에서 1905년에 고대 회당이 발굴되었고, 회당 근처에서 5세기경의 교회 터가 발굴되었는데 그 교회 터가 바로 베드로의 생가 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유대교 회당(Synagogue)
유대교 회당은 매일 오전과 오후 그리고 해진
후 하루 세 번씩 ‘쉐모네 에스레이’라 불리는 기도문(베라코트)을 낭송하는 기도회 장소이자 율법을 배우는 학교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을
징계하는 율법재판소였다.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은 계명의 아들로서 “계명과 규례”(눅 1:6), 곧 토라와 울타리 법들을 지켜야할
의무자들이었다. 그러나 회당에는 목회자나 설교자가 따로 없었다. 급여를 받는 사람은 잡무를 처리하는 집사뿐이었다. 대신에 회당장이라 불리는 세
명의 장로들이 토라와 울타리 법들에 따라 지역공동체의 신앙과 생활 또는 믿음과 실천의 모든 것을 관장하였다. 이들은 유대교 공동체의 원로이자
재판관들이었다.
설교자가 따로 없었던 유대교 회당은 예수님이 그 주간에 읽힌 성구의 의미를 풀어주신 기도회 장소이자, 유대교 지도자들과는 첨예하게 대립하셨지만, 대중으로부터는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으셨던 곳이다. 유대교 회당은 곧 도래할 그리스도의 교회와 유대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미리 보여준 무대이자, 주후 30-70년 사이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았던 장소였다.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유대교 회당의 단점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해 볼 수 있다.
첫째, 회당에 이방인 개종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회당은 엄격히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민사상에 뿌리를 둔 근본주의 민족사관과 절대적 배타주의가 지배하는 장소였다.
둘째, 살리는 영이 아닌, 죽이는 율법 조문이 보통사람들을 억누르는 곳이었다(고후 3:6). 살림과 세움이 신령한 것이고 권위가 서는 것인데, 회당은 정반대였다.
셋째, 율법의, 율법에 의한, 율법을 위한 지도자들의 외식과 불법이 넘쳐나는 장소였다(마 23:28). 그들은 규례(울타리 법들)의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계명(토라)의 본질과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넷째,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지도자들이 보통 사람들을 멸시하는 장소였다(눅 18:9). 하나님과 이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 거들먹거리는 장소였다.
다섯째, 죄인, 가난한 자, 병자, 이방인을 죄인 취급하는 장소였다. 감당하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없는 장소였다(마 23:4, 23).
여섯째, 회당 기도회는 같은 기도를 매일 세 번씩 반복하는 형식과 전통에 매인 것이었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요 4:23).
예수님의 권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8절에서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세움과 살림의 일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다. 권위는 비방과 비난의 손가락질에서 나오지 않고, 세움과 살림의 손 내밀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신령함의 척도를 세움과 살림과 생명과 질서와 사랑과 섬김에 두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것들이 빠진 행위를 바울은 모두 무익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라고, 권위 있는 자로 본 것은 다름 아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한테서 찾아보기 힘든 예수님의 세움과 살림의 말씀과 도움의 손 내밀기 때문이었다.
23절에서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씀은 회당의 병든 상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를 암시한다. 그 상태가 귀신들린 사람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병든 상태가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리는 요인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 병든 상태를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잘 말해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토회복과 민족해방이 오랜 희망이고 꼭 이뤄야할 혁명과업이긴 했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내적치유 곧 그들 안에서 그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귀신부터 몰아내는 종교개혁, 곧 병든 상태를 치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24절) 오실 자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전쟁에 의한 피 흘림과 권력의 횡포에 무슨 권위나 신령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움과 살림과 빛과 생명에 권세가 있고 신령함이 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와 같은 그리스도는 죽이는 영웅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살리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책이 마가복음서이다.
예수님의 치유의 특징은 손 내밀기에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도움의 손을 내밀기보다는 비난과 비방의 손가락질을 일삼던 지도자들이었다면, 또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운 자들이었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며 귀신을 내쫓아주신 분이셨다. 죽이는 율법과 규례를 엄수하기보다는 살리는 일의 실천을 더 중히 여기신 분이셨다. 권위란 억압하고 누르는 데서 세워지지 않고, 사랑과 자비와 위로와 나눔으로써 세워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리더십은 빛과 생명을 주는 살리는 일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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