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08: 희망이 불러온 논쟁(1)(막 2:1-12)
본문
희망의 끈08: 희망이 불러온 논쟁(1)(막 2:1-12)
그리스도의 사죄권
마가복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에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펼친 다섯 개의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 논쟁기사들에 희망이 야기한 네 가지 논쟁들이 등장한다. 그 첫
번째 논쟁이 중풍병자 이야기 속에 담긴 예수님의 사죄 선포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논쟁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못하도록 랍비들이 계명들에 방어망을 둘러친 유대교의 울타리 법들 즉 규례, 장로들의
유전(전통), 미쉬나(Mishnah) 구전에 무슨 구속력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2장 13절부터 3장 6절까지에서 네 차례에 걸쳐 다뤄진
세 가지 논쟁들은 음식법(Kashrut), 금식일법(Taanis), 안식일법(Shabbat)이며, 이것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비난한 근거들이었다. 예수님은 랍비들이 만든 이들 울타리 법들을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과 참 뜻을
왜곡되게 해석한 것이라며 무시해버림으로써 사람들을 무시하고 죄인 취급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권위의식을 비판하셨다.
마가복음 1장 1-12절의 내용은 그리스도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6절에서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하였고,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10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하신 것에서 우리는 이 본문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사죄의 권세에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병 고침은 죄 사함과 동등한 의미를 지녔다. 질병을 죄의 결과로 믿었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병이 생겼다면, 병 고침은 병의 원인이었던 죄가 사라진 것이 된다. 이 점에서 병을 고치신 예수님은 죄가 사라지게 한 권세자임을 증명한 것이 된다. 죄를 사라지게 할 권세가 없었다면, 중풍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죄권이 하나님의 권세라 생각한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역으로 예수님이 신성을 가진 분이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사죄권의 문제
오늘날에도 사죄권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견해차가 크다. 요한복음
20장 19-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우리에게는 일요일 밤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월요일 밤, 곧
부활하신 둘째 날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집에 오셔서 평강을 기원하시고, 파송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긴박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마련된 사도 임직식이었다.
예수님 생전에 제자들이 받았던 단기선교훈련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임직식이었다. 이 임직식을 주도하신 분은 생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셨다. 이때 제자들이 받은 성령은 오순절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성령님, 곧 구원의 보증과 인침과 선취를 위해 선물로 받는 성령님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덧입히는 의식이었다. 이어서 예수님은 23절에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주셨다.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갈린다. 가톨릭은 사제들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믿기 때문에 사죄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만 계승되고, 그 직책은 계승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들에게 사죄권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교회시대 초기부터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리스도에게 사죄권이 있느냐 없느냐로 큰 견해차를 보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구세주도 아니고, 죄가 없으신 삼위일체의 신(神)도 아니었다. 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신성(神性)도 아니었다.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수난자 인자(人子)도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가나안땅을 되찾아줄 제2모세 또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 제2다윗과 같은 정치적 군사적 영웅으로서 따름과 실천의 대상이었지, 예배와 섬김과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정치적 영적 구원을 가져다 줄 자이며, 이스라엘에 한 정부를 세울 자이고,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전 세계 정부의 중심에 세울 자이며, 성전을 재건할 자이고, 성전예배를 다시 세울 자이며, 이스라엘의 종교법정 체계를 회복시킬 자이고, 나라법으로 유대법을 세울 자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심
2008년에
도올 김용옥은 중앙일보에 <도마복음이야기>를 연재한바가 있다. 그 연재에서 도울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골란고원의
카즈린(Katzrin)에 있는 탈무드 마을 유적지를 방문하여 주후 746년에 지진으로 무너져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82년부터 복원된 주택
옥상에 올라 앉아 일부 지붕이 거적으로 덮인 것을 보고, 이 마가복음 2장 1-12절에 기록된 중풍병자 치유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마가복음 2장에 재미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며칠 뒤 예수께서는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 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내려 보냈다”(막 2:1~4). 카즈린 마을의 가옥구조를 보면 이 장면이 실감나게 재현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옥상인데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내 앞에 거적이 덮인 곳이 있다. 그 거적만 벗기면 대들보가 쉽게 노출된다. 그 대들보에 줄을 감고 들것에 달아맨 사람을 내려 보내면 바로 그 아래 천장이 높은 거실로 내려가게 된다. 성서의 모든 장면은 이와 같이 현실적인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밖에도 중풍병자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우리에게 준다.
첫째, 희망이 간절하면 성취가능한 방법이 강구된다.
둘째, 희망은 갈등을 불러온다. 부모와 자식의 희망이 서로 다를 때 그들 사이에 갈등이 표출되듯이, 유대인과 예수님,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도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 하늘의 것과 땅의 것, 하나님의 뜻과 세속적인 욕망, 문자적인 것과 영적인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깨어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과 깨어지고 낡아지고 무너질 것 사이의 갈등이었다.
셋째, 육신의 질병은 타고난 약골과 유전에서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 잘못된 식생활과 환경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질병치유는 근본적이고 전인적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예수님의 사죄선언에 따른 중풍병자 치유는 근본적이고 전인적인 치유에 해당된다. 예수님의 사죄선언은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일 뿐 아니라, 질병의 뿌리까지 제거한 전인적이고 근본적인 치유였다.
넷째, 예수님은 사죄권을 가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다섯째, 살리는 일을 하는 이웃들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희망을 행동으로 옮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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