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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9: 희망이 불러온 논쟁(2)(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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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842 2016.02.0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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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9: 희망이 불러온 논쟁(2)(막 2:13-17)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심

tax_collector_matthew.jpg 유대교의 울타리 법들, 즉 규례, 장로들의 유전(전통), 미쉬나(Mishnah) 구전은 희망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보실 때 개혁의 대상이었다. 이 개혁의 대상들 가운데 희망이 불러온 두 번째 논쟁은 죄인과의 식사문제였다. 이 논쟁은 유대교의 음식법(Kashrut)에 관련되어 있다.

랍비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한(treyf) 것, 정한(kosher) 것, 거룩한(kadosh) 것으로 나눠놓고 부정(不淨)한 것을 멀리하고 정(淨)한 것을 가까이 하여 정한 것만 먹고 정한 것만 사용하면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쳐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기제품을 우유제품과 함께 먹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기제품에 접촉된 그릇은 우유제품에 쓸 수 없고, 반대로 우유제품에 접촉된 그릇은 고기제품에 쓰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까다로운 그릇 씻기 법과 손 씻기 법까지 있어서 이래저래 죄인들이 양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교인들은 카샤룻 음식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곧 이방인들, 이방인(로마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세리들, 몸을 파는 창기들, 빈곤층의 사람들과는 식탁교제를 극도로 피해왔다. 생계 때문에 이방인과의 접촉이 잦았던 사람들과 빈곤층의 사람들은 카샤룻 음식법을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유대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부정한 죄인들로 간주하여 멀리하고 교제하기를 꺼려하였다.

kosher-kadosh.jpg 그러나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은 규례 혹은 장로들의 유전(전통)으로 일컬어지는 유대교의 울타리 법들을 잘 지키지 않으셨다. 그것들의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형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경건함이나 거룩함하고도 무관하였고, 살리는 일이기보다는 죽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엇이 살리는 일이고 무엇이 죽이는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관에서 업무를 보던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고, 마태의 집에 초청을 받아 그의 동료 세리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셨다.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부정한 자들로 멸시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뿐 아니라 죄인들과도 거리낌 없이 교제를 나누셨다.

 




죄인들과의 식탁교제

treyf_cheezmeatballz.jpg 예수님 당시에 세리공무원은 월급을 받지 않는 도급제였다. 세리는 세금을 거둬들여 할당된 금액을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 제몫을 챙겼다. 할당액보다 많이 거둘수록 세리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는 구조였다. 침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할당된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거둬 착복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로마시대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내는 반 세겔(이틀 치 노동자 품삯)의 세금과 십일조 이외에 로마가 물리는 각종 세금들을 내야했다. 그 가운데 인두세가 있었는데, 여성은 12세부터, 남성은 14세부터 65세 때까지 한 데나리온씩(하루치 노동품삯) 바쳐야 했다. 유대인에게 로마에 인두세를 바치는 행위는 이방인에게 맹종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스런 일이었다. 따라서 세리들은 경멸의 대상이었다.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지켜본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16절)고 힐난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심으로써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무엇이 병든 것이고, 무엇이 건강한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병든 사람들, 세리들, 창기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정반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였으며, 혀가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 영적 귀머거리, 영적 말 벙어리들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눈뜨기를 바라고, 어떻게 귀가 뚫리기를 바라며, 어떻게 혀가 풀리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깨끗하다할지라도,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마음의 악을 제거하는 것이지, 특정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

kosher-clipart.jpg 유대인들의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을 특정인들의 하나님으로 생각한데 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 거룩한 자들의 하나님, 깨끗한 자들의 하나님, 건강한 자들의 하나님, 잘난 자들의 하나님이란 생각을 한 데 있었다. 그래서 계명과 울타리 법들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건강한 자들과 잘난 자들은 죄가 없어 복 받은 자들, 반대로 이방인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은 죄가 있어서 벌을 받은 자들이란 잘못된 생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세속적으로 형통한 것이 영적으로도 형통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된 판단을 바꿔놓은 인물들이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되지 않으시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순종적인 자의 하나님만 되지 않으시고 방탕한 자의 하나님도 되신다. 거룩한 자의 하나님만 되지 않으시고 죄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병든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사람은 죄인들이다.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미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소외당하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누가 하나님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는가? 누가 하나님을 가진 자와 건강한 자들만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는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과 자비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가는 복된 자들에게보다는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국가가 주는 지원금을 받으려고 가난해지기를 원하거나 의료보험혜택을 누리려고 병들기를 원하거나 공짜 숙식을 제공받으려고 교도소에 들어가기를 원하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갖지 못한 자들, 죄인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된다고 해서 죄인이 되기를 원하거나 병들기를 원하거나 가난해지기를 원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리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고 복 주기를 원하신다. 생수를 받아 가두고 썩히는 사해가 아니라, 생수를 받아 강으로 흘러 보내 생명체를 살리는 갈릴리 호수처럼 복을 받아 가두고 썩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을 받아 이웃들에게 흘러 보내 생명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 빛과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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