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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3: 희망의 주인공(막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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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4,804 2016.01.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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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3: 희망의 주인공(막 1:9-15)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

Jesus-baptism.jpg 침례 요한의 침례는 그리스도인의 침례나 유대교의 개종침례와도 다르고, 유대인 쿰란공동체가 행한 정결의식하고도 달랐다.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새 언약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멤버로 가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교의 개종침례는 유대인과 혈통이 다른 남녀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할 때 받는 의식이며 유대인들은 받지 않는다. 남자 개종자는 할례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요한한테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 쿰란공동체는 개인이 자기 죄를 자백하고 정결의식을 행한 후에 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결의식은 단회(單回)의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의 침례는 단회의식이었고, 그 어떤 공동체에도 가입을 권유하지 않았으며, 그 누구를 믿거나 신앙을 고백하도록 권하지 않았고, 오로지 오실 메시아와 그의 시대를 준비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에 침례 요한을 추종하는 영지주의 만다야교인들은 일 년에 수차례 거듭 침례를 받는다.

예수님이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것은 죄를 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본래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죄가 없었으며, 회개가 필요치 아니한 분이셨다. 이뿐 아니라, 침례 요한의 침례가 예수님 자신의 임재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더더욱 불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것은 메시아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침례는 다르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그분의 소유와 증인이 되기 위해서 또 새 시대의 입문으로써 받지만, 그분은 그 누구를 믿거나 소유가 되실 수 없는 독생자 하나님이셨다. 게다가 요한과 예수님은 새 시대에 속하지 않고 옛 시대에 속한 분들이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지역을 바라만 보고 죽은 것과 같다.

예수님이 받으신 침례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의 실체였다. 사무엘은 요한의 그림자였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던 것처럼, 요한도 예수님께 침례로써 기름을 부어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 사실을 입증한 것이 “하늘로부터 소리”였다. 이 “하늘로부터 소리”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질적으로 뛰어났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후로 기독교에서는 침례가 성령님으로의 기름부음 또는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시간으로 믿게 되었고, 그 상징으로 침례직후에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인침(견진)과 주의 만찬 의식을 치렀다. 성령님으로의 기름부음은 구원의 보증을 의미한다(고후 1:22, 5:5). 이 기름부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광야로 상징되는 교회를 지나 저 천국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천국을 상속받을 자인 것을 보증하고 인치기 위한 것이다.

광야에서의 시험

wilderness.jpg 예수님은 침례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임직을 받으신 후 하나님의 뜻과 민중의 뜻 사이에서 번민하시며 여리고가 내려다보이는 시험산의 동굴에 들어가 40일간 기도하셨다. 이 산 절벽에 세워진 정교회 수도원교회에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안에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앉았던 바위가 있다. 예수님은 이 바위에 앉아서 유대인들이 6백년 넘게 절망 중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문제를 놓고 번민하고 계셨다. 그 희망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던 빵문제와 이스라엘의 명예와 주권회복이었다. 유대인들의 간절한 희망은 종교문제이기보다는 경제와 정치문제였다.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받으셨던 시험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유대인들의 요구들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민중이 희망하는 경제와 정치문제 해결을 위해서 손에 칼과 방패를 들어야할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하나님의 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야할지를 놓고 번민하고 계셨다. 사탄의 시험은 예수님이 결단을 내려야할 40일기도의 마지막 순간에 이뤄진 것이었다.

유대광야는 사해인근의 메마르고 건조한 산악지형의 황무지를 말한다. 이곳에 사슴, 사반, 표범, 늑대, 여우, 쥐, 독사와 같은 들짐승이 살았고, 행인을 노리는 강도와 도피자 및 수도자들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인근에 거대한 호수가 있지만,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이다. 빵과 물을 구하기 힘든 이런 곳을 걷는 ‘광야트래킹’이 요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거친 환경에 몸을 던져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로써 이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광야’(eremos)는 우리말로 ‘빈들’ 혹은 ‘한적한 곳’이란 뜻이다. 그래서 광야는 채우는 곳이 아니라 비우는 곳이다.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빵도 물도 없는 곳이니 뱃속까지 비워야하는 곳이다. 이 광야에서는 돈도 명예도 권세도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광야는, 비록 사탄이 출몰하고 시험하는 황량한 곳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자주 한적한 곳으로 가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한다(35절).

갈릴리에서 시작된 천국복음

galilee.JPG 갈릴리 지방은 이스라엘의 주변부이다. 해수면보다 210여 미터나 낮은 지역이지만, 요단강에 물을 보내는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서 활동을 시작하셨다. 요한의 퇴장은 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두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은 15절,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첫째, 예수님은 “때가 찼고”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임기가 다 찼다는 뜻이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개혁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개혁적이고 종말론적이란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옛 것이 끝나고 새 것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혁가들과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끌어들인다고 확신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라고 하셨다. 다윗왕국이란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을 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란 영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을 쓰셨다. 예수님은 실제로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다윗왕국을 회복하실 뜻이 없었다. 그것은 또 다시 깨어지고 낡아지며 무너지고 말 장막 집에 불과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깨어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으며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이다.

셋째, “가까이 왔으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임박해 있다는 뜻이지만, 이미 왔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주 선취적인 의미로 “이미”란 표현을 쓰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 첫 오순절 날에 성령님의 강림으로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넷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믿고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마음으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 네 가지 회심행위는 두 가지 행위, 곧 믿음과 회개로 압축된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이 네 가지를 압축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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