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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34: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2(고후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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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6,132 2015.07.0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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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34: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2(고후 1:8-11)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1)

gladiator_fightingwithlion.jpg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서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 언급한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에베소 한 곳에서 바울이 당한 환난만으로도 그가 일생동안 받은 박해가 얼마나 위중했는가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일신상의 위험들과 가능성 있는 투옥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외상을 경험하였다. 바울은 이곳 에베소서에서 당한 환난이 견딜 수 없어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사망선고 즉 죽음에 거의 이른 지경이었다고 실토하였다.

gladiators_fighting.jpg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하였고, 15장 32절에서는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또 디모데후서 4장 17절에서는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들 말씀이 실제로 바울이 죄수로서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끌려가 맹수와 겨루는 검투경기에 투입되었다는 뜻인가를 놓고 학자들은 많은 말을 쏟아냈다. 검투경기는 고대 로마시대 때 사람과 사람 또는 사람과 맹수 간에 치러진 격투경기를 말한다. 검투사는 자원하여 된 자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노예들이거나 죄수들이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로서 주후 64년 7월 18일에 로마의 대경기장 일대에서 발화되어 9일간 로마시의 삼분의 일을 태운 대화재 때 간신 티게리누스의 계책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임을 당할 때 긴급히 체포되어 토굴감옥 맘머티메에 갇혔다가 네로의 치세말기인 주후 67년경에 참수된 것 말고는 단 한 번도 기결수였던 때가 없었기 때문에 맹수와 싸운 일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바울의 표현은 에베소에서의 환난이 에베소 또는 세상이란 원형극장에서 구경꾼들 앞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처럼 목숨을 걸만큼 힘겹고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2)

바울이 에베소에서 주후 55년부터 57년까지 체류한 2년 3개월 기간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네로가 주후 54년에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의 모친 아그리피나가 제국을 섭정할 욕심으로 친인척을 무론하고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이 때 네로의 인척으로서 소아시아의 총독이었던 시라누스(Silanus)가 독살되었다. 그리고 시라누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후임이 정해지지 못한 채 복수의 인물들이 공동으로 총독직을 대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시기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3차 선교를 시작하였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 혼란기를 틈타서 바울을 고소하였을 것이고, 뇌물을 받은 통치자들이 바울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gladiator_skulls.jpg고린도후서 11장 23-25절에 따르면, 바울이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또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 바울이 주후 57년 중반까지 유대인들에게 39대의 곤장을 맞은 것이 다섯 번이면, 그 가운데 적어도 한두 번은 에베소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 에베소에서 가장 길게 체류하였고,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이듬해 오순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을 붙잡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자 유대총독의 재가를 받아 사형에 처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자들이다. 그 같은 수법으로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아시아총독들의 재가를 받아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자 그를 유대교회당의 법정에 세워 40에서 하나를 뺀 곤장을 쳤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기독교가 로마관리들로부터 언제나 공정한 대우를 받았고, 그만큼 기독교는 무흠하고 합법적인 단체였음을 변증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제3차 선교 때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유일하게 보도한 은 세공업자 데메드리오와 그의 직공들의 소동 사건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의 무흠과 서기장의 공정성을 부각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9장 33절,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절,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그의 연설을 듣지 않았다는 말씀과 사도행전 20장 1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갔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에베소에서 발생한 이 소동을 기회로 삼아 바울과 그 일행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에베소 사람들이 유대인 알렉산더의 연설을 듣지 않았고, 서기장이 군중을 평화적으로 해산시킨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으나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바울은 시급히 에베소를 떠나야했다.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3)

ephesus_theater.jpg 바울은 ‘알렉산더’란 이름을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각각 한 번씩 언급하였다. 전서 1장 20절의 알렉산더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였고, 후서 4장 14절의 구리 세공사 알렉산더는 바울일행의 전도를 심히 대적하여 해를 많이 입힌 자였다. 이 알렉산더가 은 세공업자 데메드리오와 그의 직공들이 일으킨 소동 때 에베소 극장에 집결한 군중에게 바울을 제거하려는 속내를 드러내려했던 자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디모데전후서는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디모데에게 보내진 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장 8-10절의 말씀, 곧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한 말씀의 강도(强度)가 얼마나 센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 사도행전 21장부터 28장까지이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를 끝낸 이듬해인 주후 58년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서 아시아(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붙잡혀 뭇매를 맞고 재판도 없이 억울한 옥살이를 2년 넘게 하고 있었으나 풀려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바울은 네로에게 상소하였고, 네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끌러가던 중에 ‘유라굴로’(Euraquilo) 광풍을 만나 14일간이나 캄캄한 죽음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사일생한 바가 있다.

baptistery_ephesus.jpg이로써 우리는 왜 바울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다”(고전 16:9)고 했는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갈 6:17)고 했는지, 또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고 했는지를(롬 16:4) 가늠해 볼 수 있다. 바울의 생애는 한마디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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