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기44: 화해의 복음8(고후 6: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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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44: 화해의 복음8(고후 6:15-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고린도후서 6장 11-13절에서 화해를 권한 바울은 14-18절에서 분리를 권하였다. 바울은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세상 속에 하늘의 보화를 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바울이 헌신한 일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민족성별 빈부귀천에 차별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된다는 은혜의 복음을 만방에 전파하여 이 세상이란 질그릇과 겉사람 안에 하늘의 영원한 보화를 담고자 하였고, 종국에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덧입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품행이나 인격 때문에 방해받고 트집잡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고, 자신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3절),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4-5절)을 참아냈으며, 그런 중에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의의 무기로 무장하였다(6-7절). 그렇다고 바울이 세상을 인정하거나 세상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헌신하였다.
14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권하였다. 멍에는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나귀 등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를 말한다. 또 멍에는 두 마리의 동물이 짝을
이루어 보조를 맞춰 조화롭게 일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도구를 말한다. 모세 율법은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힘의 차이가 있는
동물들이 한 멍에를 메는 것을 금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신 22:9-10)고도 하였다.
멍에란 말은 그 속성 때문에 대개는 속박과 예속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유대왕국이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멍에로 생각하여 그 결박을 끊고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질렀다. 이 점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참으로 너는 옛적부터, 너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너를 묶은 줄을 모두 끊어 버리면서 ‘나는 신을 섬기지 않겠다’ 하고 큰소리를 치더니, 오히려 높은 언덕마다 찾아다니며 음행을 하고, 또 푸른 나무 밑에서마다 너의 몸을 눕히고, 음행을 하면서 신들을 섬겼다”(렘 2:20). 베드로도 율법을 멍에로 언급하면서 이르기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복음을 멍에로 언급하시면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고 하셨다. 바울은 죄의 속박을 일컬어 “종의 멍에”(갈 5:1)라고 하였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바울이 14절에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한 말씀의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떨어져 살거나 그들과 관계도 맺지 말고, 생활도 함께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결혼이든, 무슨 사업이든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3절에서 자신과 함께 복음사역에 힘쓰는 자들을 일컬어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하였다.
둘째, 신자와 불신자가 같이 멍에를 메는 것은 마치 소와 나귀가 같이 멍에를 메는 것과 같아서, 윤리도덕과 영적 기준에서 조화롭지 못하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서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며,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기 어렵다.
셋째, 멍에는 고정된 틀이어서 약자에게 불리하고, 약자가 끌려가는 양상을 만든다. 신자가 고정된 틀, 즉 기준과 잣대가 다르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른 불신자들과 어울리게 되면, 신자가 약하고 불신자가 강한 경우, 고귀한 믿음의 기준과 가치를 잃게 될 수 있다.
넷째, 불법이 의가 되게 하고, 어둠이 빛이 되게 하는 생명의 일, 살림의 일, 빛의 일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멜 경우, 믿는 않는 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거나 덕을 끼치지 못하거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거나 하면, 공격과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서 전도의 문이 막힐 수 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말하면서 다섯 가지 수사학적 표현을 동원하였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14-15절). 여기서 바울은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의 신전은 함께 할 수 없고, 사귈 수 없으며, 조화되지 않고, 관계가 없으며, 일치되지 않는다고
수사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의 관계는 화목과 평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반되어 밀어내는 관계, 빛과 어둠처럼, 볕이 들면, 어둠이
물러가고, 땅거미가 지면 볕이 물러가듯이, 한쪽이 다른 쪽을 몰아내야하는 관계이므로 함께 할 수 없고, 조화될 수 없다. 법과 불법 또는 전쟁과
평화가 조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서 이미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는 말로
이들이 조화될 수 없음을 밝힌바 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벨리알(Belial)은
루시퍼(Lucifer) 다음으로 창조된 두 번째로 높은 천사였으나 루시퍼와 함께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키는 일에 가담한 타락한 천사였다고 전한다.
이 벨리알은 기독교시대 이전부터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악마로서 구약성서에서는 가치 없는 자, 불량배, 야비한 자, 사악한 자 등을 일컬을 때
사용되었다(삿 19:22, 삼하 20:1). 벨리알은 <열두 족장들의 유언>과 <쥬빌리>(희년)와 사해문서와 같은
유대문헌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쥬빌리>에서는 하나님께 반항한 자로,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벨리알의 아들들”로 기술하였다.
사해문서(1QM)에서는 벨리알이 빛의 아들들의 지도자인 미카엘의 맞수인 암흑의 아들들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5절에서는 벨리알이 그리스도에
상반되는 마귀로 언급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미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유대인들에게만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성전 돌담에는 “이방인은 담
넘어 성전영내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다가 체포되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쓰인 경고석이
세워져있었다. 미문의 출입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허용되었지만, 여성들과 13세 이하의 아이들은 미문 안쪽 공간인 ‘여성의 뜰’까지만 허용되었다.
그리고 계명의 아들들로 일컬어지는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들은 열다섯 개의 돌계단 위에 세워진 니카르노 문 안쪽 공간인 ‘이스라엘의 뜰’까지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더 안쪽 공간, 즉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인 ‘제사장의 뜰’과 메노라와 떡상과 향제단이 놓인 성소는 당번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법궤가
놓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하루 대속죄일 때 들어갈 있었다.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었던 유일무이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은 이처럼
명확한 경계선에 따라 출입이 제한되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바울의 언급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졌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해서 성전에 존재했던 차별의 경계선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요구되는 윤리도덕과 영적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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