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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49: 약함과 강함의 역설1(고후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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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737 2015.08.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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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49: 약함과 강함의 역설1(고후 10:1-18)

바울이 쓴 ‘눈물의 편지’

sword_of_HS.jpg 일부 신약성서학자들은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까지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이 변경된 이유와 화해를 언급하였고(1:12-2:13), 바울 일행이 수행한 새 언약의 직분과 화해의 복음을 논술하였으며(2:14-7:16), 유대인의 믿음과 헬라인의 믿음이 하나 됨을 위해서 가난한 예루살렘교회에 보낼 부조금을 모아줄 것을 당부하였다(8-9장). 이어서 바울은 유대교 족쇄에 묶여, 율법(토라) 동굴과 폐쇄주의 배타주의 민족주의 세계관에 갇혀, 바울 자신과 새 언약의 교회를 대적해온 에비온파의 주장을 논박하였다(10:1-12:13). 그리고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을 밝힌 후 축도로 끝을 맺었다(12:14-13:10).

고린도후서는 1장부터 7장까지가 변증적인 글이고, 8-9장이 권고적인 글인 반면, 10장부터 13장까지는 논쟁적인 글이다. 일부 신약성서학자들은 이 마지막 부분 곧 10-13장의 논쟁적인 글이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추측이 옳다면, 이 글 곧 10장부터 13장까지는 1장부터 9장까지의 글보다 더 먼저 디도에 의해서 고린도교회에 전달된 편지가 된다. 그리고 디도의 성공적인 중재로 말미암아 고린도교회가 회개하고 바울에게로 마음을 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안도함에서 쓴 ‘화해의 편지’가 1장부터 7장까지의 변증적인 글이 된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다 옳다면, 바울이 1장에서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이 변경된 사유를 설명한 것은 13장에서 발표한 그 방문계획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고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설들은 고린도후서가 하나의 편지이기보다는 여러 개의 편지들을 하나로 엮은 것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주후 57년경에 선교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재구성해보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다 더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신약성서가 기록된 파피루스 조각 76개와 대문자 필사본(4-9세기) 250개 및 소문자 필사본(9-15세기) 2,800여개가 있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고대어로 번역된 개역판 및 성구집들도 많이 남아있어서 이들을 모두 합하면 5,000여개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설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고린도후서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 읽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의 목적

armor_of_God.jpg 바울은 사도권위의 목적 또는 새 언약의 일꾼의 목적이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8절). 이는 사도직분의 권위가 세움과 살림의 일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도권의 잣대 또는 사도권위의 표준이 비방과 비난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세움과 살림의 손 내밀기라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옛 언약의 일꾼들인 에비온주의자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헌신적으로 섬긴 새 언약의 일꾼들인 자신들 가운데 누가 참으로 사도직분을 가진 자들인가를 판단하도록 하였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공적 예배에서 하는 모든 순서의 목적과 신령함의 척도를 세움과 살림과 생명과 질서와 사랑과 섬김에 둔바 있다. 바울은 이 같은 것들이 빠진 행위를 모두 무익한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새 언약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처럼 간교하게 행동하거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하게 행하며, 진리를 밝히 드러낸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살림과 세움의 일을 하는 영으로 일하는 일꾼들이기 때문이고, 그 직분이 영과 의의 직분이기 때문이며, 그 바라는 바가 땅의 것, 일시적인 것, 깨지고 낡아지고 무너질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뿐 아니라,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바울은 성도를 섬기는 일인 부조금(헌금)을 세움과 살림의 일로 보았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세움과 살림을 위해서 전사처럼 투쟁하였고,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첫째, 바울에게 있어서 유순함이든 담대함이든, 그리스도의 온유함이든 관용이든 모든 행위는 세움과 살림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이런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고 호도하였다(1-2절).

둘째, 바울의 싸움은 “육신에 따라” 행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하늘의 것,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3-4절).

셋째, 바울은 이 무기,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신에 속한 모든 “견고한 진” 곧 “모든 이론”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자 하였다(4-5절). 반면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세움과 살림의 일을 하기보다는 비난과 비방의 일을 하였고,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에, 영원한 것보다는 일시적인 것에, 속사람보다는 겉사람에, 복음(심비)보다는 율법(육비)에 치중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1-2절) 혹은 “떠나 있으면 대담”(잘난 체)하지만, 대면하면 “약하고(겁쟁이이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1,8,10절)고 비난한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자랑의 범위

paul_caveofephesus.jpg 바울의 자랑은 사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세움과 살림을 위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것이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12-18절에서 자신의 자랑과 적대자들의 자랑이 어떻게 다른가를 폭로하였다.

첫째, 바울은 자화자찬하는 자들과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12절)고 말하였다. 적대자들은 고린도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스스로 사도인척 행동하고(11:13), 고린도교회를 지도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자화자찬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자랑이든 칭찬이든 그 잣대는 세움과 살림에 있다. 비난과 비방의 손가락질을 휘저으면서 어둠의 일을 행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며, 죽임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빛의 일을 행하고, 질서를 세우며, 살림의 일을 행하는 자들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12절).

둘째, 바울은 그리스의 소돔 고린도에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세운 참 사도요, 몸 바쳐 교회를 섬긴 새 언약의 일꾼이었다. 반면에 에비온주의자들은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를 전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허무는 거짓 사도들이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주후 51년경 예루살렘총회 때 결정된 사항(행 15장)을 준수하고, 그 정해진 범위의 한계를 따라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범위의 한계란 것은 자신의 선교지역과 그 대상이 이방지역과 이방인들이란 점과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3-16절의 말씀이 이 내용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반면에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들, 곧 안디옥, 갈라디아, 고린도 등지의 교회들을 떠돌아다니며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며 신약교회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7-18절)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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