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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52: 약함과 강함의 역설4(고후 1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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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4,947 2015.09.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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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52: 약함과 강함의 역설4(고후 12:1-21)

셋째 하늘

third-heaven_paul.jpg 바울이 언급한 “셋째 하늘”(2절)은 하나님의 성소를 뜻한다. 탈무드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하가다’(혹은 아가다)에는 일곱째 하늘까지 나오고, 위경인 <에녹서>에는 열째 하늘까지 나오지만, 바울은 첫째 하늘인 대기, 둘째 하늘인 우주, 셋째 하늘인 하나님의 성소까지만 언급하였다. 탈무드의 ‘하가다’에서 셋째 하늘은 만나를 만드는 곳이고, 위경인 <에녹서>에서 셋째 하늘은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지만, 이 글들에서 말하는 하늘의 층(層)이란 것이 구별된 공간들을 뜻하는 것이어서 바울이 말한 삼층천의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주후 43년경에 어떤 성도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과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듣고 왔다고 했다(4절)고 했지만, 학자들은 바울 자신의 체험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지상의 에덴동산을 낙원으로 보았고, 플라톤은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세계 너머에 실재세계인 이상(idea)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신화에서는 깊은 지하세계에 낙원인 샹젤리제(엘리시온)가 있다고 보았다. 중국인들은 복사꽃이 핀 무릉도원의 봄을 유토피아로 보았고, 유럽인들은 농경신 사투르누스의 영원한 봄의 정원인 아르카디아를 유토피아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하나님의 성소를 낙원으로 보았다.

Ecstasy_Paul_Poussin.jpg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음성, 문자, 형상(이미지), 꿈, 환상, 기이한 현상(기적), 성육신과 같은 모든 형태의 하나님의 현현을 말하고, 환상은 계시의 이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한 가지로 볼 수 있다. 환상이든 계시든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서 회개(권면)와 회복(희망과 위로)으로써 성도를 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조차도 교회를 세우고 살리는 것이 아니면, 그 자랑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이 본 환상과 계시를 언급하고,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을 말한 것은, 적대자들이 “사도의 표된 것”(12절)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적대자들의 자랑을 꺾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자랑이 무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육체의 가시

nurenberg_chronicle.jpg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기 자신이 14년 전 즉 주후 43년경에 체험한 사실을 제3자의 체험인 것처럼 우회적으로 자랑하였고, 5절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도 “사탄의 사자” 혹은 “육체의 가시”라는 신체적 약함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안질이나 간질로 추정된다. 7절에서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는데, “나를 쳐서”를 간질환자들이 갑자기 땅바닥에 넘어지는 모습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니발, 율리우스 시저,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영웅들이 간질 환자였다. 그래서 생긴 말이 “신(神)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간질병을 준다.”였다. 바울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또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할 수만 있었다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썼기 때문에 안질이 의심되곤 한다. 바울은 자주 대필을 통해서 글을 썼는데, 그 이유가 안질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바울은 제 몸의 가시, 그것이 비록 선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첫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세운 파수꾼이라고 믿었고, 둘째는 세 번이나 제 몸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곡히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을 때,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족하다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셋째는 자신의 능력이 바로 그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사실과 자신이 가장 약한 그 때가 바로 가장 강한 때란 사실에 기뻐한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몸에 혹은 마음에 가시를 갖고 있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고질병일 수도 있고, 장애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거의 다 크고 작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장미꽃처럼, 향기 짙은 아카시아 꽃처럼,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처럼 제 몸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는 힘이다. 화려한 장미꽃과 향기 짙은 아카시아 꽃과 빛나는 별빛에만 가치가 있고, 줄기의 가시와 밤하늘의 어둠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장미꽃과 아카시아 꽃은 가시가 있기 때문에 그 화려함과 향기를 자랑할 수 있고, 밤하늘의 별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더욱 밝은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가시나 어둠도 화려함과 향기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꽃에 못지않게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강요된 사랑

revelation_paul.jpg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사랑은 좋든 싫든, 이익을 보든 손해를 입든, 합당하든 부당하든, 그 어떤 조건도 이유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운명에 매인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부담이 큰 사랑이다. 그러나 이 부담은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기에 ‘거룩한 부담’ 혹은 ‘신령한 부담’으로 불린다. 이 무조건적이고 운명적이며 부담이 큰 신령한 사랑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계시되어 있다.

십자가는 헌신적인 사랑의 표시지만, 동시에 강요된 희생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속에 아픔이 있고, 남의 희생에 굶주린 자들의 원망과 비난이 섞여있다. 이런 원망과 비난의 실체가 실상은 우리 자신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만약에 하나님의 오랜 자비를 입고 산 자로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원망의 화살을 쏴 부친 적이 있다면, 또 부모의 희생을 먹고 자란 자식 된 자로서 부모를 배신하는 원망의 화살을 쏴 부친 적이 있다면, 가장 헌신적인 사랑에조차 강요된 부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본능(욕심)에 지배받고, 죄와 허물을 피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강요하게 된다. 특히 죄와 허물은 하나님께 사랑을 강요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물론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강요당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자율적이고 솔선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인간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본받는 자이므로 하나님처럼 누군가에게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 붓고서도 당신의 자녀들로부터 원망과 비난을 듣고 계시듯이, 또 “하나님을 본받으라.” 혹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가르치며 자신의 온 몸을 던져 뜨겁게 교회를 사랑했던 바울이 성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듯이, 사랑에는 희생을 감수하고 비난도 받아야하는 ‘이중 부담’(double burden)이 따른다. 이 부담이 커질수록 사랑과 신령함이 커지지만, 동시에 아픔과 실망도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참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반드시 이기듯이, 인간의 참 사랑도 결국 이기고 승리한다. 같은 맥락에서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한 부모는 그 어떤 경우에도 실패자가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자들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자가 아닌 것도 같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또한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헌신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결코 실패자가 아니다. 사랑의 목적이 이익과 착취에 있지 않고, 세움과 살림에 있다면, 바울이 적대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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