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기53: 약함과 강함의 역설5(고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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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밀기53: 약함과 강함의 역설5(고후 13:1-13)
사도의 권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 번째 방문계획을 밝히면서,
다시 가면, 두 번째 방문 때 경고한바와 같이 두세 증인의 말을 근거로(신 19:5)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인지를 요구했던 것 같다. 평소 바울은 세움과
살림의 일을 위해서 약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상은 강한 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죗값을 짊어지시고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실상은 그분이 약한 분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능력을 떨치시는 분이셨던 것과 같다. 또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사랑의 주님으로 그려졌고, 순하고 약한 어린양으로 묘사되었지만, 계시록에서는 준엄한 심판의 주님으로 그려졌고, 일곱 뿔 일곱 눈의 어린양, 곧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묘사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이제 그분과 함께 강하여져서 그들에게 사도의 권세를
엄중히 행사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경고는 모두 성도들에게 회개할 마음을 갖게 하여 그들을 바로 세우고 회복시켜 살려내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경고대로 이뤄지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또 바랐다.
바울이 교인들에게 취할 수 있는 처벌에는 첫 번째로 공개비판, 두 번째로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금지령, 세 번째로 범죄자가 교회를 떠나도록 하는 권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교가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주교의 사도의 권세 행사는 주후 390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있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데살로니가의 주민 7천여 명이 살해된 책임을 물어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공개적인 참회를 요구하였고, 참회 때까지 예배참석을 금지시켰다. 이 사건은 황제가 맨머리에 베옷을 입고 참회함으로써 주교의 사도권의 승리로 끝났다.
바울의 권세는 사죄권이 있는 사도의 권세에서 나왔다. 사도들의 사죄권은 부활하신 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셨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가톨릭에서는 사제들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믿기 때문에 사죄권을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예배의식에서 사죄를 선언하거나 성도로부터 고해성사를 받는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사도직 계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죄권이 없어서 사죄선언도 고해성사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사도권의 목적을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데 두지 않고, “세우려는” 데 두었다는 점이다. 바울은 사도의 권세가 무너뜨릴수록 작아지고, 세울수록 커진다고 보았다.
세움과 살림을 위한 권세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세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데 있지 않고 세우려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신의 권한 또한 그와 같음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가
온전하게 되기를 바랐다(5-10절).
바울의 약함에 대한 역설은 바울이 체험한 두 번의 사건에서 엿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이었다. 다메섹에서 나바테아(요르단)의 왕 아레타스 4세의 총독이 체포하려고 하자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도망쳤다(11:32-33). 그의 도주는 적의 성벽을 최초로 넘은 로마군 병사나 성을 정복한 지휘관에게 훈장(corona muralis)이 수여됐던 것과 대조를 이뤘다. 바울은 개종직후 아라비아사막으로 내려가 일정기간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다메섹으로 되돌아와 복음전도에 힘썼다. 이를 지켜본 극우 유대교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고, 바울은 다메섹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자신의 개종사실을 알렸다(갈 1:17-18). 아레타스 4세는 예수님 시대의 인물로서 그의 딸이 갈릴리 지역을 통치한 헤롯 안디바의 부인이었다. 안디바가 자기 딸을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격분한 아레타스 4세는 주후 29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헤롯 안디바와 전쟁을 치렀다.
두 번째는 육체의 가시가 주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세 번 기도하였으나 거절당했던 경험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세운 파수꾼이라고 믿었고, 자신의 능력이 바로 그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는 사실과 자신이 가장 약한 그 때가 바로 가장 강한 때란 사실에 기뻐하였다. 이 역설적인 기쁨의 배경에는 주후 34년경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행 9:1-19)과 주후 43년경에 하나님의 성소인 셋째 하늘에 다녀온 사건이 있다(12:3-5).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누군가를 출교시키는 일이 실제로 발생할까봐서 몹시 걱정하였다. 바울은 모든 일의 목적을 세움과 살림에 두었다. 그것이 권면이든 징계이든, 칭찬이든 위로이든, 예언이든 방언이든, 강함이든 약함이든, 회개하여 회복되는 데 두었다. 그것이 어둠에서 빛을, 혼돈에서 질서를,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이 고린도 방문을 연기하면서까지 준엄한 편지를 써서 보낸 목적은 10절에 나타난바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 한 사람이라도 출교당하거나 책망당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7절)고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바울이 우려했던 일은 생기지 않았다. 바울은 그해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내면서 평온한 상태에서 불후의 명작인 로마서를 저술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성도들의 따뜻한 지원과 환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떠날 수 있었다.
평화의 인사
마지막으로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에 평강의 복을 기원하면서 편지를
끝냈다(11-13절). 이 마지막 구절들은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의 지적처럼, “서신의 말미를 장식하는 상투적인 방법이자,
한 예배 공동체가 다른 예배 공동체에 보내는 인사, 곧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 모인 교회들 간의 대화”로 볼 수 있다.
바울은 11-13절에서 일곱 가지로 고린도교회를 격려하고 강복하였다. 첫째, “기뻐하라.” 둘째, “온전하게 되어라.” 회개함으로 관계를 회복하라는 뜻이다. 셋째, “위로를 받으라.” 참회에 따라오는 위로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넷째, “마음을 같이 하라.” 파당과 분열은 조직을 허물어뜨리는 사단의 일이다. 세움과 살림의 일은 마음을 같이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째, “화평하게 지내라.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라고 하셨다. 여섯째,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 일곱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거룩한
입맞춤” 혹은 “평화의 입맞춤”은 초기 기독교의 인사법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전통교회들의 성만찬 예배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20세기가 될
때까지는 예배당에서 남녀가 동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입맞춤은 옆자리에 앉은 동성끼리 나누는 ‘용서와 평화의 표시’였다. 미국에 보존된
1800년대 예배당들을 보면, 남녀용의 출입문이 별도로 있었고, 1900년대 초까지도 남녀 사이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ㄱ’형태로 예배당을 짓거나 커튼을 드리웠었다. 오늘날에는 인사법이 각 나라의 문화와 예법에 따라 입맞춤, 포옹, 절,
상호 접촉, 악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바꿨다. 한국에서는 목례를 하면서 “평화를 빕니다.” 혹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길
빕니다.”라고 말한다. 이 인사는 주기도문 후, 주의 만찬을 받기 전에 한다. “거룩한 입맞춤” 혹은 “평화의 입맞춤”은 주기도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고”에 이어서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떡과 잔이 제물이고, 그것들이 놓이는 상이 제단이다. 반면에
제물이나 제단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에서는 예배 초입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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