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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1: 희망의 시작(막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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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1,637 2016.01.2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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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01: 희망의 시작(막 1:1)

유대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희망

ariadne's_thread1.jpg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장 1절의 이 짧은 구절에는 “유대인들의 두 번째 희망이 이미 성취되었다. 그것을 성취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구약성서에 오실 자로 예언된 그리스도이셨고, ‘예수’라는 보통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분은 수백 년간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 속에 있었던 그 어떤 뛰어난 영웅호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떠돌이와 노예였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후 지금까지 3,800여 년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고, 동일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부르는 애국가 제목과 내용이 ‘하티크바’(Ha-Tikvah)라 불리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예루살렘과 시온이 포함된 가나안 영토와 다윗왕권을 되찾는 것이다. 그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 구약성서이다. 모세오경(토라)은 첫 번째 희망의 성취와 유지에 관한 내용이고, 예언서들은 첫 번째 희망의 유지 또는 멸망 후 또다시 떠돌이와 노예가 된 후에 두 번째 희망의 성취를 전제로 회개를 촉구한 글들이다.

마태복음 1장 17절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출범과 발전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희망의 성취였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다윗왕국의 쇠퇴기와 멸망을 말한다. 솔로몬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망한 후 136년 만에 남왕국 유다도 망하였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는, 아브라함이후 모세 때까지 품었던 첫 번째 희망처럼, 포로기시대의 예언자들은 두 번째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이 모세였다면, 두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울 분은 헬라세계에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알려진 ‘메시아’였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아직 오실 자’이지 ‘이미 오신 자’가 아니다. 구약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에 관한 말씀은 아직도 성취되지 못한 장차 성취될 희망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전히 두 번째 희망에 머물고 있고, 구약성서만이 그들의 정경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유대인(히브리인)들의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희망에 관한 경전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두 번째와 세 번째 희망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에 관한 말씀, 곧 두 번째 희망이 이미 성취되었고, 이 두 번째 성취가 더 완벽하고 완전한 성취, 곧 깨지거나 낡아지거나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미리 맛보고 누리게 한다고 믿는다. 이 새롭고 영원한 세계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는 세 번째 희망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두 번째 희망의 성취와 그리스도인들의 세 번째 희망에 관한 경전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그 담고 있는 내용이 해석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한분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지만, 그밖에 것들, 예를 들어서, 영토, 국가, 메시아, 구원, 선민 등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다. 양자 사이에 이런 큰 차이점을 만드는 요인은 구약성서를 유대인들이 철저히 문자적으로 이해하는데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자기 민족, 곧 유대인들의 생존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생존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또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이 세상에서의 삶에 국한하는데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깨지고 낡아지고 무너질 장막 곧 임시적인 떠돌이 삶에 불과하므로, 깨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처소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두 번째 희망, 곧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 희망의 성취를 믿고, 세 번째 희망에로 전진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 희망 곧 깨지고 낡아지고 무너질 이 세상에 삶에만 매달려 바동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한 거름 더 전진하여 세 번째 희망, 곧 깨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삶에 뜻을 두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종교 개혁가들의 특징은 그들이 자청하여 이 세 번째 희망을 선포하는 선구자 또는 전령이 되고자한 것이었다. 1800년대 초 미국에서 일어난 신약성서기독교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의 배경을 보면, 세 번째 희망인 새천년시대의 도래를 확신하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을 젊어서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펼쳤던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은 새천년시대에는 모든 교파명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이름아래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였다. 그의 이런 희망 때문에 1804년 6월 28일 스프링필드 장로회가 <유언서>를 남기고 해체되었다. 교파들이 해체될 때, 계시록 20장에 예언된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스톤은 노예해방운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천년왕국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톤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운동, 교회연합운동, 노예해방운동을 <그리스도인 전령>(Christian Messenger)이란 월간지를 통해서 펼쳤는데, ‘그리스도인 전령’이란 이 세 번째 희망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뜻이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도 7년간 지속됐던 월간지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를 폐간하고, 그 대신 1830년부터 <새천년시대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란 이름의 월간지를 사후 4년까지 40년간 발행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기독교 본래의 순수성과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새 천년시대를 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신약성서기독교 운동을 선구자로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처럼 스톤과 캠벨은 자기들 시대에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 새천년시대의 전령 또는 선구자를 자임하면서 개혁운동, 곧 신약성서기독교에로의 회복운동을 펼쳤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거룩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희망의 시작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복음이란 기쁨의 소식을 말한다. 왜 기쁨의 소식인가? 다윗왕국이 멸망하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 출범 때까지 612년간이나 묵은 두 번째 희망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시작이란 희망성취의 시작, 구원역사의 시작,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작, 교회시대의 시작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노예와 떠돌이로서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자기 백성을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시겠다고 선포한 소식과 같고,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시대를 활짝 연 것과 같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탄생하신) 시점은 다윗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의 희망이 처참하게 짓밟힌 지 580여년 만이었다. 모세가 이집트에 등장한 시기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시기는 흑암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모세 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였던 것처럼,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이 압제는 바벨론제국,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에로 6백년이 넘도록 대물림되어 온 것이었다. 실로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마 4:16). 또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이었다(마 9:36). 특히나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시기는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붕괴된 후에 왕과 백성이 유배지로 끌려갔듯이, 그로부터 656년만인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던 시기였고, 동시에 로마에서는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네로에 의해서 저질러지던 시기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의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과 혼란과 가난과 전쟁노예들로 인해서 가정이 붕괴되고 도덕과 윤리와 기강이 무너진 시기였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마가는 로마의 기독교박해 현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고,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이 예수님의 오심은 실로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희망의 빛이었고, 복음의 시작이었다.

인간의 오랜 희망 속엔 인간의 오랜 외로움, 오랜 출렁임, 오랜 헛수고, 오랜 배고픔, 오랜 병듦과 하나님의 오랜 자비가 녹아있다. 인간의 오랜 희망과 하나님의 오랜 자비가 만나는 시점과 지점이 구원이 일어나는 시점과 지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입기까지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이, 탈출이 불가능한 미로에 갇혔을지라도, 그 끈의 끝에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반면에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은, 그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가 아무리 컸을지라도, 가장 가련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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