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11: 희망이 불러온 논쟁(4)(막 2: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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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11: 희망이 불러온 논쟁(4)(막 2:23-3:6)
사람을 위한 안식일
마가복음 2장 22절부터 3장 5절까지는 희망이 불러온 네 번째 논쟁으로써 안식일 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죽임의 일을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런 죽임의 일들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뀔 때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다. 원래는 수단이었던 것이 나중에 목적이 되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뀔 때 많이 생긴다. 한 예로 법은 원래 삶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수단이지만, 법 그자체가 목적이 될 때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전 세계에서 유대교인들만큼 율법에 민감한 사람들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613개의 계명을 ‘미츠보트’(Mitzvot)라고 부른다. 이밖에도 랍비들이 만든 ‘게자이라’(gezeirah), ‘타카나’(takkanah), ‘민하그’(minhag)와 같은 전통 법들이 있다. 이들 랍비들의 전통 법들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안식일 법이다. 안식일 법은 광야에서 사용했던 성막 제조과정에서 나타난 39가지 범주의 창조의 일들에서 뽑아낸 수백수천가지의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이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새로운 생활환경에 따른 새로운 안식일 법들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안식일 법은 그 숫자를 가름하기 어렵다. 그래서 안식일 법은 수단이 목적으로 뒤바뀐 대표적 케이스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안식일 논쟁이 다수 실려 있다. 마가복음 2장 23-28절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세 번째 ‘추수하기’나 ‘자르기’(Kotzair) 금지법을 어긴 것이다. ‘자르기’ 금지법은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다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나눠준
사실을 언급하신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보다 우선된다는 법정신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정통주의 유대교인들조차도 위급상황에서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안식일 날에는 자동차의 시동을 켤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운전할 수 없고, 전화나 돈을 사용할 수가 없지만, 위급상황에서는 운전을 할 수 있고, 전화나 돈을 사용할 수도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당하고 옳았다는 증거이다.
살리는 일을 하는 안식일
손 마른 사람(막 3:1-5), 고창병자(눅
14:1-6), 눈먼 소경(요 9장),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사람(눅 13:10-17), 38년 된 병자(요 5:1-18) 등을 안식일에 고치신
것을 유대인들이 문제 삼았던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범주의 창조행위들 가운데 스물두 번째 ‘매듭풀기’(Matir) 금지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안식일 법에서는 ‘매듭매기’도 금지되지만, ‘매듭풀기’도 금지되고 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곳이 누가복음 13장
10-17절이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시고 나서, 분을 내며 책망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매인 것을 푸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식일에 마구에 묶어둔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인다는 것이다. 하물며 오랜 세월 질병에 시달리며 사단에게 매여 살아온 사람들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는
것이다.
위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 법에 우선되는 상위법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사람이나 짐승을 구해내는 행위나 안식일에 마구에 묶인 짐승을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행위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늘 법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셨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사단에 매인 자들로 보셨고, 따라서 한시라도 빨리 그 매임에서 풀어줘야 할 위급상황에 몰린 자들로 보셨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보다는 법을 우선시하였다. 그들은 병자들을 법을 어긴 죄인들로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고 오해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병자들을 죄인취급하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에서 자신이 바로 안식일 법 제정자라고 선포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고 바른 행위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낡은 전통의 개혁가로서의 예수님이 혼인잔치로 상징된 하나님의 나라의 행정권, 죄 사함으로 상징된 사법권, 안식일 법으로 상징된 입법권을 손에 쥔 최고수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상나라의 입법권자, 사법권자, 행정권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 죽음의 길을 걷게 되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안식일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안식일 법을 문제 삼으신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꿨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쉼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과 피조물의 쉼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에 있다. 쉼의 참된 의미는 매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과중한 업무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시간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육체의
고달픔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정신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사단의 매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을 옭아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살리는 일 곧 생명을 주는 일에 있다. 손 마른 것을 고쳐주고, 꼬부라진
것을 펴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데 있었다. 이런 면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살리는 일 곧 생명을 주는 일을 하는 자가 진정으로 안식일의 주인이 된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이런 점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일이 목적이었다. 자기들만 안식일 법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까지 안식일 법의 노예로 만들었다. 안식일 법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과 고침 받은 병자들을 책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죄인 취급하여 무시하였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설사 그 원인이 죄 때문이었을지라도, 그들을 부축해주고 살려줘야 하는 데, 오히려 그들이 당하는 질병의 고통과 가난의 시련을 당연히 받을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랍비들이 만든 구전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생활하셨다. 법 이전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실천하셨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의 문제점은 안식일 성수와 헌금 및 금식기도와 같은 신앙생활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생활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모범적이었다. 반면에 그들의 문제점은 사람을 우선시하는 따뜻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사람을 이용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와 같은 살리는 일 곧 생명을 주는 일이 없었다는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행위는 정의로운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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