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29: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2)(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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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29: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2)(막 9:14-29) 마가복음 후반부의 기록목적(1)
전반부에서 소경이 점차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말 벙어리의 혀가 풀려 만물을 밝히 보고, 말이 분명해졌을 때, 예수님을 오시기로 예언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믿고 그 믿음을 분명하게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고백은 절반의 고백에 불과하다. 거기서 끝날 신앙고백이었다면, 굳이 후반부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셨는데, 이 말씀의 후반부,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에 해당되는 나머지 절반에 대한 고백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마가복음 9-16장까지의 기록이다. 마가복음 8장에서 끝나버리면, 유대교인 또는 여호와증인에 머물지만, 9장에서 출발하여 16장까지 계속 진행하면, 더 깊은 경지의 영의 눈이 뜨이고, 영의 귀가 열리며, 영의 혀가 풀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나서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혀가 있어도 말하지 못한 더 깊은 경지의 세계가 있음을 9장에서부터 보여주기 시작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직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수난예고를 하셨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부활신앙에 기초한 기도
14절에서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제자들에게 아직은 유대교와 구약시대를 뛰어넘을만한 온전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18절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괴롭히는 귀신을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한” 것은 제자들에게 아직은 귀신들려 악하고 음란한 세상과 싸워 이길만한 온전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될 그 때에는, 예수님이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땅에 엎드러져 구르게 하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게 만들며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던져 넣는 더럽고 말 못하며 못 듣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신 것처럼,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게 된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지적하셨다. 첫 번째로 지적하신 것은 믿음의 약함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라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고 하셨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절)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믿음은 아이의 생명을 살렸다. 여기서 강조되어야할 것은 아이를 살린 믿음이 단순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이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지적하신 것은 기도였다.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절). 그러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급하신 기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당시의 기도는 ‘베라카’(Berakhah)라는 기도문들을 낭송하는 것으로써 대표적인 것이 하루 세 번 회당에 모여 낭송하는 18개의 기도문(Shemoneh Esrei)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기도가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활신앙에 기초한 믿음
귀신들린 아이는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의 대표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볼 때, 이 아이는 동굴에 갇힌 죄수에 해당된다. 귀신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듣고,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인간이다. 자신의 뜻을 결정하거나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자주 거꾸러지며, 입에 거품을 물거나 이를 갈아야하는 처참한 사람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을 어둠의 세계에서 이끌어내어 빛의 세계로 인도하겠는가? 등장인물들 가운데 서기관들은 철학자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 우상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족쇄에 묶인 채 동굴에 갇혀 빛의 세계를 보지 못한데서 생긴 편견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이고(동굴우상), 동굴벽면에 펼쳐진 그림자들처럼 왜곡된 논증과 학설에 의해 생긴 편견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이며(무대우상),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의 편견을 절대시하거나(종족우상) 동굴 속 죄수들의 다수여론과 편견에 끌러가는 사람들이다(시장우상). 그러므로 서기관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해방시킬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아이와 그 아이의 가족이 겪는 고통을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해 생긴 당연한 결과라며 고통을 가중시키는 자들이다. 군중은 구경꾼들이다. 군중은 예수님의 복음과 표적들에 놀라움과 박수를 보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배에 오르는 일을 주저하거나 유보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겉껍데기 인생, 구경꾼 인생, 자기가 없는 인생에 만족한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온전한 믿음에 이르렀거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자들은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눈을 떠가고 귀를 열려가며 혀를 풀어가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자들이다. 빵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는 세상일을 놓아가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하며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연마하는 수련생들이다. 그들도 아직은 귀신의 족쇄에 묶인 아이를 해방시켜줄 부활신앙에 기초한 큰 믿음에까지 성장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머지않아 세상을 바꿔놓을 큰 능력을 충전시켜가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과연 복음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옥토인가? 우리는 과연 세상을 살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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