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32: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5)(막 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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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2: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5)(막 10:1-31)
제자의 길: 여성 보호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를 떠나 감람산 아래 벳바게에 도착하신 날짜는 유월절(주후
30년 4월 7일)을 꼭 일주일 앞둔 주후 30년 3월 31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리를 떠나 여리고 인근의 요단강 동편에 도착하신 때는
3월 하순경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추정하는 사람들은 이 무렵에 이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것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
일행이 유대지경 가까운 요단강 동편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갔다.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높은 예수님에게 올무를
놓아 그를 제거할 구실을 찾으라는 밀명을 받고 파견된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그들이 놓은 첫 번째 올무는 율법문제 가운데 이혼에 관한 것이었다. 물음의 핵심은 이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겠느냐,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이혼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마가는 이 물음을 통해서 여성보호가 제자의 책무임을 강조하였다.
모세가 명한 이혼증서는 가부장사회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함부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유대사회에서 이혼은 대부분 아내가 남편한테서 버림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특히 그것이 간음으로 인한 것일 때는 여성이 돌에 맞았을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혼녀가 이혼증서를 지참하고 있다면, 그녀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줄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혼도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도록 한 것은 이혼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명기 24장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들이 열거된 곳인데, 그것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이혼법이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여성들의 기본권이 보장되지만, 아직도 근동의 아랍권에서는 여성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 하물며 모세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이혼증서도 없이 버림당하는 여성들이 다반사였을 당시에 이혼증서를 주라는 모세의 율법은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기본권을 인정한 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마치 이혼을 허용하는 것처럼 악용되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랑의 언약이 깨지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제자의 길: 어린이 보호
희망의 나라는 남편으로부터 부당하게
버림당하여 상처 입는 여성들이 없는 곳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은 남녀가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7-8절).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9절).
하나님은 언약으로 맺어진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신다. 우상숭배와 간음을 몹시 싫어하시는 만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신다. 하나님의 사전에 이혼이란 단어는 없다. 운명적으로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편을 드시며,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 여성과 어린이와 같은 약자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동일한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고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한평생 죽을 때까지 배우자만 사랑하고 헌신하겠다고 결혼서약을 했으면서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마음을 줄 수가 있다. 심지어 결혼서약을 파기하고 이혼도 불사한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전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그가 원했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혹은 뭔가가 탐나서 거짓으로 서약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시면, 한번 마음을 주시면, 한번 선택하시면, 한번 서약하시면, 결코 번복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본받는 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제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는 것처럼, 여성과 어린아이와 같은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은 제자의 책무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13세 이하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가부장이 사거나 팔수 있는 소유물에 불과하였다. 또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은 13세 이상의 남성만을 이스라엘로 보았다. 그런 이유로 13세 이하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은 그들의 계수에서도 빠졌다. 그들에게는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뜰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회당에서는 본당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 기도모임의 최소인원인 ‘민얀’(minyan)의 수에도 들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개방하신 희망의 시대는 이런 차별의 담들이 모두 허물어진 곳이다. 남녀의 차별과 연소의 차별뿐만 아니라, 민족의 차별, 신분의 차별, 계급의 차별까지 모두 헐어버린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14절)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16절).
제자의 길: 가난한 자를 돌봄
17-22절에 등장하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정형적인 유대인들의 대표이다. 탕자비유에 등장하는 착실한 맏아들의 범주에 속한 유대인이다. 그가 부자였던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사람의 물음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다. 그런데 그가 말한 ‘영생’과 예수님이 언급하신 ‘영생’은 그 의미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구약의 관점에서 영생은 문자적인 것으로써 가나안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리스도가 오시면 성취시킬 ‘다가올 세상’(Olam Ha-Ba)으로 부른다. 반면에 신약의 관점에서 영생은 영적인 것으로써 하늘 가나안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이미 오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의 물음에는 토라계명들을 모두 지켰으면 100점 만족이지, 여기에 무엇을 더 추가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구약에 의한 유대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은 다가올 세상인 ‘올람하바’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였다. 그 점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사랑하셨다. 반면에 신약에 의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제자가 될 그릇이 못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21절에서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참 제자의 길이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영생’이란 말이 마가복음에서 처음 등장한 곳은 9장 43절이다. 예수님은 영생에 들어갈 제자가 걸어야할 자기 부정의 길 곧 십자가의 길이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그 일이 여성을 보호하고, 어린이를 보호하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제자의 길이 어린 아이와 같이 약하고 소외된 자를 예수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고, 9장 41절에서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는데, 10장 21절에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또 예수님은 영생과 관련해서 자기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시키기보다는 연자 맷돌에 묶인 채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9: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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