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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3: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6)(막 10: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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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725 2016.07.10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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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3: 희망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6)(막 10:32-52)

예수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난예고

judea-samaria-gustavo-kralj.jpg 마가복음 전반부의 마지막 장인 8장에서 벳새다 맹인이 고침을 받고 만물을 밝히 보게 된 직후에 비로소 제자들의 대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벳새다 맹인의 눈이 뜨인 것은 제자들의 무지의 눈이 뜨인 것이었다. 그러나 마가복음 10장은 아직 제자들에게 뜨이지 아니한 또 다른 무지의 눈이 있었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제자들의 무지를 상징한 벳새다 맹인의 눈이 뜨였을 때 제자들의 대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분명히 보고 입으로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수난예고 때에 매번 무지한 태도를 보였다.

마가복음 10장에 실린 수난예고는 마지막이자 세 번째였다. 이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야보고와 요한은 37절에서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무지한 요청을 하였다. 이 무지한 요청이 있고나서 여리고성의 또 다른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았고,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52절)고 하였다.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 받은 사건은 눈이 열려야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또 세 차례에 걸친 수난예고는 예수님께서 친히 겪게 될 수난에 대한 예고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겪게 될 수난에 대한 예고였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들은 세례 요한이 죽고 그리스도신분을 밝히신 직후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뤄졌다. 예수님이 성공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때에 대한 예수님의 자각은 매우 명확하였다. 이를 마태는 “이때로부터”(마 16:21)라고 소개하였고,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혹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10:1, 32-34)라고 하였다.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라고 적었고,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감람산 아래 벳바게에 도착하신 날짜는 유월절(주후 30년 4월 7일)을 일주일 앞둔 주후 30년 3월 31일 금요일이었다.

수난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jericho.jpg 수난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첫째로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며 붙들고 말린 것이었다. 둘째는 심히 근심한 것이었고, 셋째는 야고보와 요한의 막후로비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말린 것과 근심한 것이 스승을 위해서였는지, 자신들의 꿈의 실현을 위해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두 가지 모두 다 옳을 수 있다. 그들의 반응이 순수했는지, 불순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막후로비가 마지막 세 번째에 소개된 것을 보면, 제자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들이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처럼 반드시 눈을 떠야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땅의 문제와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자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표적들을 잇달아 행하시자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얻게 될 명예와 권세와 재물에 점차 눈이 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말리고 그 때문에 사단이란 소릴 듣는가 하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더 높으냐며 서로 다투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막후로비를 통해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떠 자신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가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랐듯이 말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민중이 원했던 그리스도는 붙잡혀 고문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줄 자였다. 이 때문에 갈릴리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하는데 성공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민중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머지않아 통치자가 될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처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발걸음이 쇳덩이를 매단 듯이 무거웠고, 머리엔 수심으로 가득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행은 정말 지독히 고독하고 고통스런 것이었다. 제자들이 함께했고, 민중이 노변에서 환호했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고 생각이 되어야할 제자들은 명예와 권세와 재물에 눈이 멀어 상황파악을 할 수 없게 된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허풍이 가득하였으며, 머리엔 권모술수만이 난무하였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세 번씩이나 수난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의 무지를 깨우치려 하셨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음

bartimaeus.jpg복음서에서 제자의 길에 관한 교훈은 수난예고 다음에 나온다. 제1차 수난예고에서 주신 제자의 길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는 것이었고, 제2차 수난예고에서 주신 교훈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제3차 수난예고에서 주신 교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은 45절에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고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고 눈뜨기를 바라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필요하였다. 예수님은 눈뜨기를 소원한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고 하셨다. 눈을 뜬 바디매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랐다. 이는 먼저 무지의 눈이 열려야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에 “자기의 십자가”(19:17)라는 표현을 썼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특별히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마 16:24; 막 8:34; 눅 9:23)를 강조하였는데, 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란 낱말을 덧붙였고, 마가는 초대교회 성도의 한 사람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일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강조했던 십자가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였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오르신 것처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언덕으로 올라간 것처럼, 기독교신앙 자체가 죽음을 의미했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이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짊어지도록 설교하였다.

만일 우리가 벳새다의 맹인처럼 눈을 뜬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여리고의 맹인 바디매오처럼 눈을 뜬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과 복음의 일을 위해서, 빵이 아닌 하늘의 양식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과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눈이 뜬다면, 육안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니고, 참된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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