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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5: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2)(막 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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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2,997 2016.07.1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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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5: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2)(막 11:11-14)

무화과나무

fig_taqsh_teenah.jpg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날은 입성하신 당일인 주후 30년 4월 2일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시장기를 느끼시고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신” 것은 4월 3일 월요일이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잎사귀는 새순들이었다.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던 것은 아랍어로 ‘타크시’(taqsh)라 불리는 작은 열매들이 열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타크시는 히브리어로 ‘테엔나’(te'enah)라 불리는 정상적인 무화과처럼 과육이 풍부하지도 않고 특별한 맛도 없지만, 시장기를 면하게 해주는데다가 누구나 따서 먹을 수 있는 열매였다.

마가복음의 큰 특징은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씀은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중계하듯이 생생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 같은 사례가 마가복음에 많다. 예를 들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2:4),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4:37-38),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6:39),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7:33-34)가 있다. 이처럼 마가복음의 기사들은 생생함과 현장감이 넘친다.

“무화과의 때”란 첫 수확이 시작되는 6월경을 말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3월 하순쯤 무화과나무에 새순이 나오기 시작하고, 1주일쯤 후면 새순 아래에 작은 열매들이 열리는데, 아랍어로 ‘타크시’(taqsh) 또는 ‘겨울무화과’라 불린다. 히브리어로 ‘테엔나’(te'enah)라 불리는 여름무화과는 타크시가 떨어지고 6주쯤 후에 열린다.

타크시는 체리 크기로 자라면 대부분 떨어져 버린다. 타크시는 맛도 없고 상품가치도 없어서 내버리는 열매지만, 농부들과 여행객들의 시장기를 면하게 해주기도 한다. 또 타크시는 무화과의 수확량을 미리 예측하게도 한다. 타크시는 테엔나의 전령과 같아서 새순이 나온 가지에 체리 크기의 타크시라 불리는 겨울무화과가 많이 열리면 테엔나라 불리는 여름무화과가 많이 열리고, 새순만 나오고 타크시가 열리지 않으면 무화과도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와 토라

figtree_knowledge1.jpg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로 이해되었다. 이런 이해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렸다는 것에서 근거한다(창 3:7).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는 토라(율법)에 관한 지식을 뜻한다. 토라는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을 분별해주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무화과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인식된 데는 무화과나무에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것이냐 혹은 불순종할 것이냐를 인간이 선택함으로써 선악이 판가름 난다는데 있다. 그것은 마치 토라 자체에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토라에 실린 계명들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선악이 갈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뱀이 내민 열매를 받아먹기 위해서 아담과 이브가 손을 불쑥 내민 것은 잘못된 손 내밀기였다. 그 열매를 먹어서가 아니라, 먹지 않기로 한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이 잘못된 손 내밀기의 대가로 거부의 손짓과 두려움에 쌓여 웅크린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뱀의 유혹과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묘사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기둥조각(1225년)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시스티나성당 천장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도 뱀을 여성으로, 무화과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무화과의 성별을 여성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화과의 집산지인 지중해에서는 수세기 동안 무화과를 여성성으로 보았다고 한다. 김지하 시인의 <무화과>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이 시를 해설한 다음카페 두레박국어교실은 무화과나무의 잎을 남성으로, 무화과의 열매를 여성으로 설명하였다. 무화과 열매 속에 있는 내면의 꽃이 무화과의 여성성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기둥조각과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도 아담을 무화과 나뭇잎에 밀착해서 그렸고, 이브는 뱀으로부터 무화과 열매를 받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이렇듯 무화과가 선악을 알게 하는 토라의 상징이란 점에서,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신 것은 토라에 목숨을 걸지만, 정작 열매가 없는 유대교를 고발하고 징계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무화과나무와 유대교

torah_knowledge.jpg 복음서들에는 구조주의 모형론이 담겨 있다. 복음서들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상반된 대립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념체계인 복음을 독자들에게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 당대의 정치종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의 울타리 법들, 곧 규례와 장로들의 전통을 건강한 복음에 대립되는 병든 것으로 설명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 밝게 빛나듯이 유대교의 병든 상태를 지적함으로써 기독교복음의 건강한 상태가 밝히 드러나게 한다. 따라서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는 토라(Torah) 또는 계명(Mitzvot)을 철저히 지킨다는 명목으로 장로의 전통 또는 울타리법(Gezeirot)이란 것을 만들어 열심히 지키지만, 열매가 없고 위선과 허례의식의 잎사귀만 풍성한 유대지도자들과 그들의 유대교를 상징한다. 이점에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신 것은 위선이 가득하여 진실과 영성이 없던 유대지도자들과 유대교를 고발하고 징계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려하는데 있었고, 문제점은 그것들의 본질보다는 의식, 의미보다는 형식, 정신보다는 문자에 치우친데 있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행동은 알맹이가 없는 겉껍데기 허례의식에 불과했고 형식에 치우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울타리법들에 노예가 되어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사람을 억압하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예수님은 외적인 허례허식에 매달리는 유대인들의 문제가 신앙심의 자만과 우월감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죄인취급하고 멸시하였다. 그들은 겉껍데기 사슬에 묶인 자신들의 현실을 눈이 있어도 직시하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머리가 있어도 깨닫지 못했고, 가슴이 있어도 느끼지 못하였다.

유대지도자들은 계명의 불순종으로 얻은 그들의 수치심을 계명들의 울타리법들로 덮으려하였다. 그것은 마치 아담과 이브가 계명을 불순종하고 얻은 수치심을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로 덮으려했던 것과 같다. 열매가 없었던 유대지도자들이 울타리법들로 자신들의 삶을 포장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유대지도자들이 열심을 보였던 울타리법들은 계명을 상징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잎사귀였던 것이고,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풍성했던 무화과나무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유대지도자들과 유대교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신 것은 유대지도자들과 유대교를 고발하고 징계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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