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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7: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4)(막 1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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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3,757 2016.07.2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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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7: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4)(막 12:1-17)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3)

highpriests_Annas_Caiaphas.jpg마가복음 12장 1-12절에 실린 포도원 소작농부들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희망성취를 위한 예비사역으로 보여주신 네 번째 일로써,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이냐며 따져 묻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모든 권위(권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지상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잠정적인 것이며, 권위를 위임받은 자는 그 권위를 일시적으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란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고 따져 물은 것은, 마치 청지기가 주인에게 “이 집의 결정권자는 나인데,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느냐?”고 반박하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포도원 소작농부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못된 소작농부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을 돌려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는 그들의 병든 상태가 심히 위중하여 수술을 늦출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또 이 비유에는 그들에게 맡겼던 정치와 종교의 청지기역할을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넘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9-10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고한 말씀이 그 증거이다. 여기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그 주인은 하나님을, 농부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을 말한다. 또 농부들에게 능욕을 당한 주인의 종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 주인의 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심지어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7절)고한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한 가지는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이 누린 정권과 교권이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두 이양되어야할 한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들은 정권과 교권을 위임받은 청지기들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청지기에 불과한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들이 권위(권세)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배반할 뿐 아니라 그 권위를 찬탈함으로써 그들이 일시적으로 손에 쥔 정권과 교권을 영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4)

vineyard_tenants.jpg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오랜 희망이 성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야욕은 9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는 말씀대로 능욕을 당하였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정권을 이방나라들에, 교권을 기독교에 1878년간이나 빼앗겼다.

하나님은 유대교에 맡겼던 야훼신앙을 빼앗아 기독교에 넘기셨다. 하나님은 유대교의 병든 상태, 곧 하나님독점, 성전독점, 권위찬탈, 배타적 선민사상 등을 더는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셨다. 유대교를 통해서는 인류의 희망을 성취하실 수가 없으셨다. 유대교는 선교의 대상인 이방인들과의 접촉과 교제를 거부할 수밖에 없도록 수많은 울타리법들을 만들어 방어막을 겹겹이 쳤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타민족들의 신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한분밖에 없는 신을 독점해 버렸으니, 타민족들에게 참신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없애버리셨다. 이스라엘에서 유일했던 예루살렘성전은 하나님독점의식과 남녀노소민족의 차별의식과 배타적 선민사상의 옴팔로스(Omphalos, 배꼽)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권위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을 지성소에 가둬두고, 겹겹이 담을 쌓아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능욕당하는 치욕이 있고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성전지성소에서 해방되셨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것을 폐하시고, 두 번째 것을 세우신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히 10: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권을 빼앗아 이방나라에 넘겨버리셨다. 주후 66년에 유대총독 플로루스(Gessius Florus, 64-66년)가 성전금고에서 금 17달란트를 강탈할 뿐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육하였다. 격분한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주후 70년에 비극적 참패로 끝났다. 로마군이 막강한 탓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분열과 주도권 싸움도 문제였다. 패배의 대가는 너무 컸다. 6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노예로 팔렸거나 광산에 보내졌으며, 검투사로 등록되었다. 땅은 황폐해졌고 경작인은 사라졌다. 공회(산헤드린)는 해산되었고, 정치적 자율권마저 빼앗겼다. 일년에 반 세겔씩 내던 성전세를 로마의 주피터 신전에 바쳐야 했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토지세와 주둔군의 재정까지 부담해야 했다.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5)

denarius_tiberius.jpg 마가복음 12장 13-17절에 인두세에 관한 질문은 예수님께서 희망성취를 위한 예비사역으로 보여주신 다섯 번째 일로써 성(聖)과 속(俗), 즉 하나님의 나라(교회)와 세상의 나라를 구별하는 것이었다. 예수님당시 이스라엘은 세속국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신정국가였다. 그런데 신정국가가 이상적인 국가일지는 역사적인 교훈들로 볼 때 지극히 회의적이다. 중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신정국가들은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평화와 안녕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고, 사람들의 생명을 파리 취급하듯이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聖)과 속(俗), 영(靈)과 육(肉), 즉 하나님나라(교회)와 세상나라 모두에 속한 시민들이다. 이 두 나라는 구별되며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이 신정국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아도 우리 몸에 둘 다 필요하듯이, 이 두 나라도 성도들의 영적 육적 삶에 모두 필요한 공간이다. 성과 속, 영과 육의 융화 없이 신정이든 세속이든 한쪽에 경도된 집단이나 국가는 빛이 어둠이 되고, 질서가 혼란이 되며, 생명이 죽음이 되게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에 인두세를 바쳐야 했다. 로마가 평화를 보장해 주는 대가로 12세(혹은 14세)부터 65세까지 일 년에 1데나리온씩을 바쳤다. 열심당원(zealot)이나 단검단원(sicarii) 같은 과격한 유대인들이 볼 때,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행위는 굴종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수치였다. 만일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했다면, 매국노로 몰려 민중의 몰매를 당할 일이고,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다면, 반역자로 고소당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따라서 세금에 관한 질문은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 몰아가려는 음모였다. 그런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본 예수님은 명쾌한 대답으로 질문자들의 악한 의도를 부끄럽게 만드셨다. 그런데도 나중에 그들은 빌라도법정에서 예수님이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지 말라고 했다고 모함하였다(눅 23:2).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의 관심과 일은 온통 손에 쥔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보수하는 데 있었다.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이시라면, 그들이 로마정부에 뇌물을 바쳐서 지켜온 권력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직책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아니한 떠돌이 예언자를 한 마음으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참혹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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