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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9: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6)(막 12: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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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15,424 2016.07.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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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39: 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6)(막 12:28-44)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7)

love_god_neighbor.JPG 마가복음 12장 28-34절에 실린 큰 계명은 예수님께서 희망성취를 위한 예비사역으로 보여주신 일곱 번째 일로써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마가는 질문자를 서기관이라고 기록한 반면, 마태는 율법사라고 적었다. 서기관은 문자적으로 성경필사자란 뜻이고,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란 뜻이지만, 호칭만 다를 뿐 하는 일은 같다. 또 마가는 서기관이 예수님께 호의를 갖고 질문한 것처럼 기록한 반면, 마태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다고 적었다(마 22:35). 호의를 가지고 했든 시험하려고 했든,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에게 적대감을 키웠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같다.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 성에서 받았던 인두세, 부활, 큰 계명,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질문들은 이전부터 있어왔던 논쟁들로 추정되지만, 답변에 따라서는 자칫 반역자나 이단자로 내몰릴 소지가 있는 것들이어서 위험한 논제들이었다. 질문자들의 입을 닫게 만들었던 예수님의 답변들은 민중이 듣기에 속이 후련하고 통쾌했을지 몰라도, 며칠 후 빌라도법정에 제출된 공소장은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모독했고, 인두세를 반대한 자칭 그리스도요, 자칭 유대인의 왕이며, 신성을 참칭(僭稱)한 중죄인이므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서기관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하나님 사랑’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답변하셨고,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묻지도 않은 두 번째 큰 계명을 ‘이웃 사랑’이라고 답변하셨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하나님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지만,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증명되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증명된다는 취지로 답변하신 것이다. 이것이 계명의 정신이요 본질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지도자들은 계명의 문자적인 적용에 집착한 나머지 계명의 정신과 본질을 놓쳐왔고, 쓸데없는 울타리 법들을 많이 만들어 계명들을 왜곡시켜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사랑을 빙자하여 카샤룻 음식법과 같은 울타리법들을 많이 만들어 죄인과 이방인과의 교제를 차단시켜왔다.

하나님이 신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희망성취를 위해서 친히 사람이 되셨고,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신령한 일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인 것이다.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8)

chorazin_seat-of-moses.jpg12장 35-37절은 예수님께서 희망성취를 위한 예비사역으로 보여주신 여덟 번째 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의 선재성이란 예수님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창세전에... 이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을 말한다(요 17:5).

이 문제는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주간에 행하신 일련의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들이 예수님이 오실 자 그리스도였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권위, 곧 신성과 선재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주후 30년 4월 2일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셨으며, 예루살렘성전의 이방인 뜰에서 자행되던 부정한 상행위들을 몰아내시고, 이방인의 뜰을 기도하는 장소로 돌려놓으셨다. 이 일에 분개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화요일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보자,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며 따져 물었다. 악한 포도원 소작농부들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의 차이가 마치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의 권위와 소작농부의 권위의 차이와 같다는 점과 소작농부들이 주인의 권위를 찬탈코자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코자 했다는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포도원의 소작농부들의 비유에 이어 거론된 인두세문제, 부활문제, 큰 계명문제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문제,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의 문제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며 사람을 살리는 건강한 것이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는 세상과 생명과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병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38-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예수님이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유대교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에게 병을 고치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과 선재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단지 지상 가나안땅을 되찾아줄 정치군사적 영웅으로서 따름과 실천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지, 예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성취를 위한 준비사역(9)

trumpet_offering_chest.jpg12장 41-44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희망성취를 위한 예비사역으로 보여주신 아홉 번째 일로써 기도와 헌금에 관한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은 부자들의 많은 헌금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기도에 상반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부자들의 헌금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기도는 병든 예배를, 가난한 과부의 기도와 두 렙돈 헌금은 건강한 예배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려하며, 상석을 좋아하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40절)로서 큰 수술을 받아야할 만큼 병들어 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반면에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온전한 헌신이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신 장소는 여성의 뜰이었다. 그곳에 나팔모양으로 생긴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는데, 9개는 성전세와 제물대신 돈으로 바치는 함이었고, 나머지 4개는 성전보수와 유지비용을 헌금하는 함이었다. 사람들이 헌금할 때 헌금의 목적과 액수를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41-42절) 넣는 것을 보셨다.” 과부의 두 렙돈은 그녀가 가진 것 전부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다.

렙돈(lepton)은 유대인들의 주화로써 로마 돈 고드란트의 2분의 1,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막노동 인부가 받는 일당은 10만원가량이다. 이 돈을 예수님 때 노동자가 일당으로 받았던 한 데나리온과 비교하면, 두 렙돈의 가치는 1,563원 정도이다.

기도도 헌금도 꼭 필요한 예배의 요소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을 때,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을 때이다. 만일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면,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거나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서기관들이 사람을 사랑하였다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뽐내려하거나 상석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김과 경배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기 영달의 수단으로 삼았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가산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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