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43: 희망성취사역의 종말론적 완성(2)(막 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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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43: 희망성취사역의 종말론적 완성(2)(막 14:10-11)
민중이 원했던 것
예수님이 사해 호수 언덕 유대사막에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께 바라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희망사항이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은 유대인들이 메시아의 자격으로 내세운
첫 번째 조건이었다.
제2출애굽사건을 주도할 메시아는 모세가
제1출애굽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민중에게 만나를
내려 먹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한 것이나 바울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말한 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한 두 번째 시험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헬라,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6백여 년 동안 땅바닥에 실추된 유대민족의
명예를 회복시킬 메시아인가를 증명해 보이란 뜻이었다.
민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극히 높은 산에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엎드려
경배하면,
이것들을 다
주겠다’고 말한 세 번째 시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다윗왕국의 권세와 영광을 천하만국 위에 세울 수 있는 메시아의 능력을 말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꿈꿨던 다윗 왕가의 복원과 예루살렘 성전예배의 재건 그리고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통치를 실현하려는 세속적인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강력하고 권세 있는 세속적인 메시아가 되어 달라는 유대민중의 이 세 가지 유혹을 강하게 뿌리쳤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무력하고 쓸모없는 자로 여겨 팔아넘긴 것이나 유대민중이 예수님께 크게 실망하고 환멸을 느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 앞에서 외친 것이 다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들의 희망은 수많은 인명의 피를 흘린 후에야 겨우, 그것도 일시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고, 궁극적이고 영원하며 영적인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빌라도 총독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다. 하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예수님이 대답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땅의 것,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이었고, 예수님이 주고자 했던 것은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기적을 베푸는 신(神)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신이었다.
그러나 민중은
예수님한테서 사랑의 중요성을 배우려하기보다는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만이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 채 분노의 불길 속에 몸을 던지려한다는 것을 알고 슬픔과 고뇌에 빠졌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정을 줬던 여인에게 환멸을 느껴 헤어지려 해도 쉽게 헤어질 수 없는 사내의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배신은 예수님께 환멸을 느낀 자들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유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랍비여, 당신은 사랑보다 큰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보다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것을 원합니다. 현실에 쓸모 있는 것밖에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김남조 시인은 신앙에세이집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진실은 오히려 상처투성이일 때가 많다. 막 원정 가위로 다듬고 난 봄날의 정원이기보다 겨울 하상(河床)의 밑바닥을 흐르는 찬 물줄기일 수 있다. 부서지고 피 흘리면서 다가오는 진실, 일그러지고 반은 불에 타 버렸을 수도 있는 진실, 어차피 사람은 이것을 맞아 주어야 한다. 상처 나고 피 흘리는 진실을 사랑해야 한다. 슬픔에 대한 사랑, 고난에 대한 사랑, 이를 거쳐 가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며 어떤 생산과 창조에도 결코 다다를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생명’이란 시에서는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고 했다. 예수님은 금가고 일그러진 민중을 사랑하셨고,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추기를 원하셨으며, 그런 하나님을 민중의 친구로 소개하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한테서 사랑의 하나님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표적을 행하는 하나님만을 원했다. 따라서 민중은 사랑의 신을 말하는 예수님한테서 그들의 기대가 깨지고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중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은, 구상 시인의 시구처럼, 홀로써 가야만 했다.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홀로써 가야만 했다.
민중이 느끼는 환멸
이문열의 소설 중에 <사람의 아들>이 있다.
이 소설에 떠돌이
유대인(The
Wandering Jew) 아하스 페르츠가 등장한다.
아하스 페르츠에 얽힌
전설은 13세기에 나왔으며,
저주를 받아 죽지도
못하고 세상을 유랑하는 유대민족을 의인화한 것이다.
페르츠는 이문열의 소설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자이자, 이스라엘에게 빵과 명예와 주권을 되찾아줄 그리스도를 갈망하지만, 예수님한테서 환멸을 느낀 유대인들의 대표자이다.
페르츠가 돌덩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이오. 당신은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 수 있겠소? 다시는 저들이 빵이 모자라 고통 받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으시오?” 예수님이 말했다.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빵으로 족하겠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소.” 페르츠가 되받아쳤다. “저들이 겪어 온 그 오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오? 결핍과 갈구만이 저들 육신의 숙명이란 뜻이오?” 예수님이 말했다. “바람 앞의 겨와 같고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육신의 삶이 저 영원한 참 생명에 비교될 수 있겠소?”
아하스 페르츠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경이 당신의 권능을 두고 한 말씀을 믿고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 예수님이 말했다. “당신이 네게 요구한 것은 곡예사나 술사(術士)들이 할 짓이요.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얕은 안목으로 저울질하지 마시오.” 페르츠가 탄식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백번의 거룩한 말씀보다 단 한 번의 어쭙잖은 기적에 더 쏠리는 것이 인간이며, 미망과 방황의 세월을 울고 신음하며 더듬어 가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소?” 예수님이 말했다. “물질과 기적에 의한 믿음과 순종은 참이 아니요. 오직 말씀과 사랑 속에서 불신과 회의를 이겨낸 사람만이 하늘나라로 인도될 것이오.” 페르츠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땅의 민중이 고대하는 것은 정신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군사적인 메시아요. 가서 저들을 조직하고 무장시켜 옛 다윗의 영광을 재현토록 합시다. 나의 지혜와 당신의 권능을 합치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이요. 먼저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내고, 이 땅의 권세부터 손에 넣읍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소.” 예수님이 말했다. “나는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온 것이지 통치하고 억압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죄와 고통을 덜어 주러 온 것이지 나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의 권세와 쾌락은 한순간이지만, 천상의 권능과 복락은 영원하오.” 이처럼 예수님이 인도하여 드리기를 원했던 나라는 일시적이고 허망하며 요동치고 흔들리는 세상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과 평화의 나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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